곽자흥과 주원장. 주원장과 곽자흥.
그 어떤 하늘에도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런 만고불변의 진리가 유독 곽자흥 군단에만 빗겨나갈 리도 없을 것이다. 작금 저주의 상황은 해가 둘이나 하늘에 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간 언젠가 반드시 파국이 닥쳐오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진작에 비극으로 결정되어 있는 결말을 향해 그들이 서둘러 달려가지 않았던 까닭은, 앞서 말했다시피 그들에게 있어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게 바로 ‘생존’ 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육합을 공격했던 원나라 군이 선선히 물러난 준 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서로의 시선이 험하디 험한 밖을 향해 있으니, 안에서 골육상쟁을 펼칠 틈도 없던 셈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마치 뒷일은 애써 잊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의식적으로 내정보다는 외정에 몰두했다. 외부의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하고, 외부의 일이 없으면 굳이 또 일을 만들어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탈탈의 대군은 마치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해재와 같았다. 그들로선 전혀 어찌할수 없었던 재해가 그저 하늘의 천운으로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던 것이다. 이제 곽자흥과 주원장은 세력확대의 필요성에 서로 공감을 나누게 되었다. 자신들의 세력은 중화 전체로 보면 아직도 미흡할 뿐이었다. 마침 갑자기 대군이 불어나 저주의 식량 사정도 악화되고 있었다.
현재의 추저우에서 70km 남쪽에 있는 허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주원장이었다. 그는 저주에서부터 수십 킬로미터 남쪽에있는 화주(和州)를 한번 공략해 보자는 제안을 꺼냈다. 화주는 지금의 허현으로, 강남이 아닌 강북이긴 하지만 위치만 놓고보면 남경보다도 아래쪽에 있는 도시다. 군사를 남쪽으로 이동해 활로를 뚫어 세력을 넒히고, 식량을 구하며, 저주에 쏠린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리는 계책이었다.
곽자흥은 별다른 고민 없이 군사를 내주었다. 곽자흥은 신경 쓰이는 주원장을 밖으로 내보내며 저주를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주원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주군을 당분간 피하며 밖에서 움직일수 있었다. 결국 지금으로선 이게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방책이었던 셈이었다.
주원장 포함 25명이 맨땅에서 시작해 일궈낸 저주 공략에 비해 화주 공략은 제법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주원장은 물론이고, 곽자흥 부인의 동생– 즉 곽자흥의 처남인 장천우(張天祐)도 이 싸움에 함께 했다. 서달, 탕화등 ‘24명의 호걸’ 역시 여전히 자신들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호대해(胡大海)라는 신임 장수였다.
호대해는 홍현(虹縣) 출신으로, 키가 크고 얼굴이 검었으며 지력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비록 배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식자들 이상으로 사리 분별과 형세 판단에 모두 능했다. 그는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론을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나는 본시 무부라 아는 게 아주 많지는 않소.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세 가지가있는데 그 첫째가 바로 부녀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약탈을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사람들의 집을 함부로 불태우지 않는 것이오.” (吾武人不知书,惟知三事,不杀人,不掠妇女,不焚毁庐舍) (1)
바로 이 호대해는 자신의 모든 가속을 이끌고 주원장에게 귀부하러 왔는데, 주원장은 그를 등용해 선봉으로 삼아 화주 공략에 나섰다. 호대해의 용맹에 힘입어 주원장 군은 어렵지 않게 화주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가 1355년 봄이었다. 주원장이 홍군에 투신한지 3년째 되는 시점이었다.
점령을 했으니 이제는 관리를 해야만 했다. 곽자흥은 격문을 보내 정식으로 주원장을 화주 총병관에 임명했다. 이 조치로 인해 화주의 군무를 담당하게 된 주원장이었지만, 정작 그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여지껏 주원장은 한 세력의 주인으로서 군사를 부려왔다. 그가 지시를 내리면 부하들은 이를 충실하게 이행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주원장의 위에는 자신의 주인인 곽자흥이 있었다. 물론 곽자흥은 그에게 총병관의 직위를 주긴 했지만, 가장 높은 위치에서 부하를 부리는 사람과 지시를 받고 권한을 위임받아 명령을 내리는 권위에는 천지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법한 간극이 있다. 그리고 화주 공략은 주원장의 부하들뿐만 아니라 곽자흥의 다른 장수들 역시 참여한 전투였다.
즉 지금껏 ‘자신의 부하들’ 에게 명령을 내리던 주원장은 이제 ‘곽자흥의 부하들’ 에게 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주원장의 세력이었던 사람들을 주원장 계(系)로 표현하면 이들은 그 파벌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나이도 주원장보다 많았고,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곽자흥의 측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주원장이 곽자흥의 격문을 들이밀고 ‘내가 상관이다’ 라고 한들, 저들이 얼마나 존중해줄지 알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어디까지나 곽자흥의 부하인 그로서는 다른 장수를 마음대로 죽여서 군심을 다잡을 수도 없었다. 그건 곽자흥을 무시하는 월권행위로 반역하자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고민 끝에, 주원장은 곽자흥의 격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스스로만 그 내용을 읽고 조용히 봉인해둔채, 자신이 총병관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밝히지 않고 아직 ‘저주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은 상태’ 로 해서 그 자리를 공백으로 두었다. 여기에다 일을 의논하는 대청에 있는 주장(主張)의 의자 역시 치워버렸다.
다음날 아침, 화주의 제장들은 일을 의논하기 위해 청사(廳事)로 몰려왔다. 제장들은 자기네들끼리 온 순서대로 알아서 상석을 찾아가 자리에 앉았다. 주원장이 청사에 나타난 것은 제장들이 모두 모이고도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뒤늦게 참석하게 되니 자리는 모두 가득 차 있는데, 좌측 구석에 한자리가 남아 있는 게 눈에 띄였다.
이 당시 중국인의 관습으로는 우측을 상석으로 여겼다. 즉 반대로 말해서 좌측 가장자리라고 하면 가장 말단이나 앉는 자리라는 뜻이 된다. 주원장은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그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실 늦게 온 것도 처음부터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윽고 공무에 대한 회의가 펼쳐졌다. 하지만 대다수 제장들은 그저 칼을 높이들고 적을 찔러 죽이는 것만 잘 알았지 도시의 내정이라던지, 큰 틀에서 살펴보는 앞으로의 행보라든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의 상황에 대한 대비라든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자신들끼리 이놈 저놈 하며 한껏 악을 지르다가 제대로 된 의견 하나 내지 못하고 어물쩌물 할 뿐이었다. 애당초 그렇게 되리라 이해하고 있었기에, 곽자흥 역시 주원장을 총병관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면 제가 짦은 의견을 하나 내보려고 하는데, 한번 검토해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회의가 산으로 갈 때마다 주원장은 상황을 살펴보며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그렇게 제안한 안건들 모두가 실정에도 맞고 합리적이며 결단성도 있었으므로 누구도 여기에 토를 달지 못했다. 안건을 몇 건 처리할 때마다 모두 이런 식이 되자, 형식만 서로 의논한다는 것이지 나중에는 모두들 주원장의 얼굴만 바라보며 ‘이젠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하고 무언으로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일솜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화주의 제장들 모두 직접적으로 말만 꺼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사실상 그 내정전반은 이미 주원장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의 안건에 따라 무너진 화주의 성벽을 벽돌로 보수하는 작업이 모든 제장들에게 할당되었다. 기일은 모두 3일로, 3일 내에 맡은 임무를 끝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촉할 상관도 없고, 벌을 줄 책임자도 없으니 일을 열심히 할리가 만무했다. 많은 제장들은 일은커녕 술을 마시거나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는가 하면, 그나마 좀 낫다는 사람들도 가끔가다 현장에 나와 뒷짐을 지고 조금 살펴보다 들어가는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다. 유일하게 주원장 한 사람만이 3일 밤낮으로 현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독려해 공시 기일을 맞출 수 있었다.
약속된 3일이 지나자, 공사 진행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제장들은 다시 청사에 모였다. 물론 확인해보나 마나 주원장이 맡은 구간만 완공되고 나머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던 형국이었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본 주원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석인 북쪽 자리에 가서 앉아 남면(南面) 하고 제장들을 바라보면서 곽자흥에게 받은 격문을 꺼내 읽었다. 모든 장수들이 깜짝 놀라 그제야 부랴부랴 예를 취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차분하게 입을열었다.
"나는 명을 받들어 제군들의 군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지금 성을 벽돌로 보수하는 공사를 맡아 모두들 기한을 맞추지 못했는데, 과연 군법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던가?" (奉命總諸公兵,今甓城皆後期,如軍法何) (2)
장수들은 감히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용서만을 구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능력과 권위를 모두 과시한 주원장의 행동으로 인해, 화주의 제장들은 감히 그에게 반발하거나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무려 10만을 칭하는 원나라 군이 화주를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군대의 규모, 군대가 나타난 시기를 생각하면, 이 원나라의 정체는 탈탈의 갑작스러운 해임 이후 장사성에게 대패한 뒤 흩어진 원나라 군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10만이라는 숫자는 필시 과장된 숫자였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자리 잡은 화주의 군사들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적이었음엔 틀림없었다.
주원장은 그런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3개월을 버텼다. 적군의 맹공을 저지하는 동시에 신당(新塘), 고망(高望), 계롱산(雞籠山) 등 요충지에 자리 잡은 적을 상대로는 오히려 역습을 취하기까지 했고, 전투가 생각보다 훨씬 길어지자 지친 적은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장강을 건너 타지로 이동해버렸다. 원나라 군이 장사성에게 한번 패전해 사기와 전투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부대였을 순 있지만, 대군을 상대로 이토록 완벽한 방어전을 펼친 주원장의 군사적 능력 역시 굉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화주의 제장들을 완벽하게 지배하에 놓고, 위협적인 적의 공세도 어떻게든 저지하는데 성공한 주원장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확실히 젊은 날의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일단 망망대해에 한번 풀어놓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금세 치고 올라섰다. 아무것도 없이 홍군에 몸을 던졌을 때도, 맨손으로 호주를 나와 세력을 만들 때도, 화주를 점령하고 장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기세를 떨치던 주원장이 개인적인 용무로 인해 청사를 나서 출타하려고 했던 어느 날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문을 나서던 그는, 문득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조금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문밖에서 어린이 한 명이 구석에 앉아 울고 있었다.
주원장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기다려요.”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
“관청에 있어요.”
“관청에서 무얼 하고 있길래?”
“말을 돌보고 있대요.”
“어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군영에 있다고 했어요.”
듣자 하니 아이의 아비와 어미는 모두 군영에 있는데, 그곳에서 서로를 만나도 둘이 감히 아는 채를 하지 못해서 부부를 부부라고 하지못하고 서로를 오빠와 누이로 부른다고 했다. 여기에 어린아이는 감히 군영에 들어갈 수도 없어서 문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이게 무슨 사정인지 한번 알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파악하게 된 진상은, 단순히 한 아이의 부모와 관련된 일을 떠나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홍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적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도적 집단이 성장하며 군벌이 된다. 무수한 군벌 중에서도 강력한 군벌이 되려면 군율이 엄격한 병사를 키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강군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어느 세력이건 대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군에 들어와 창을 휘두르는 일반 농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반인을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마구 받아들이다 보면, 깡패나 건달들 역시 무수하게 섞여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혼란을 틈타 한몫 단단히 채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성을 한번 떨어드리면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은 물론이며 재물을 약탈하고 젊은 남자는 잡아가 노비처럼 부리고 부녀자는 겁탈하고 첩으로 삼았다. 그런 과정에서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집안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당장 세력을 불리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이런 일은 적당히 눈감아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엉망으로 해나가서는 군대를 제대로 지탱하긴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주원장은 제장을 급히 소집해서 이렇게 선언했다.
“대군이 저주로부터 여기에 왔을 때에는 누구나 홀몸이었고 처자가 없었다. 입성한 뒤에 모두 제멋대로 남자를 포로로 잡거나 여자를 처로 잡아, 백성들의 부부가 헤어지도록 만들었다. 군대가 기율이 없다면 어찌 능히 한 지방을 안정시킬 수가 있겠는가? 이 다음부터는 성을 공격하여 얻으면, 무릇 붙잡은 부녀의 경우 결혼하지 않아 남편이 없는 경우라면 몰라도,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멋대로 차지할 수는 없도록 하겠다.”
그렇게 선언한 주원장은 다음 날 성안의 모든 남자와 여자를 관아 앞에 모이게 해서, 남자는 문밖 큰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게 한 다음, 붙잡을 부녀를 문 안에서 한 사람씩 걸어 나오게 하여 부부가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거리는 만남의 광장으로 바뀌어 수많은 부부와 부자가 어지롭게 서로를 불러대면서 떠들고 껴안고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울다가 웃는 사람, 울면서 웃는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3)
한편, 명사에서는 같은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있다.
“군중(軍中)을 수색해 약탈해온 부녀는 풀어줘 집으로 돌려 보냈다.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乃搜軍中所掠婦女縱還家,民大悅) (4)
주원장의 적절한 조치로 인해, 화주는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군사들이 주둔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사람들의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백성들의 형편 역시 약간이나마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차분하고 순탄하게 자신의 영지를 가꾸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주원장이었지만, 그런 평화도 결국 잠깐이었을 뿐이다. 그를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명사 권 133 호대해 열전
(2) 명사 태조본기
(3) 명태조실록, 황조본기(皇朝本紀), 오함 주원장전 pp107,108.
(4) 명사 태조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