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상 바얀이 길에서 객사하는 운명을 맞이한 지 4년 뒤.
한때는 ‘후지원’ 이라고 했던 연호도, 이제는 지정(至正)으로 바뀌어 때는 지정 4년(1344년)이라고 했다. 복고주의를 부르짖으며 쿠빌라이 시기의 연호인 지원을 다시 썼던 바얀이 사망했으니, 정권에서는 바얀의 유산을 모두 씻어 없앨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이야기는, 황궁을 떠나면 크게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다.
회하(淮河) 유역, 약 1,000km가 넘는 광대한 범위에 걸쳐 제국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땅은 말라붙었다. 메뚜기 떼가 논밭을 습격했고, 고약한 역병이 배를 곪아 쓰러진 이들을 덮쳐왔다.
천신만고 끝에 약간의 수확물을 거둘라치면, 지방관청에서는 귀신 같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이를 갈취한다. 이것마저 빼앗기면 살수 없다, 굶어 죽는다고 말해도 매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그렇게 빼앗은 농민들의 돈과 재산은, 태반이 조정에는 올라가지도 않고 중간에서 전부 착복되었다.
노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조금이나마 남은 그늘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 앙상하게 삐적 마른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뛰어다닌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름답게 꾸며본 적 한번 없이 일만 하느라 손이 부릅튼 아낙들은, 지칠 대로 지쳐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늘진 얼굴로 논밭의 잡초를 베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힘이 남아 있는 청년들은 날마다 자신들끼리 모여 무엇인가 불온하게 수군거리고 하니, 멀리 팽형옥(彭瑩玉)이라는 선생이 봉기를 준비한다더라, 한산동(韓山童)이 세상을 뒤집으려 하는데 모이면 쌀밥을 준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떠들어 대고 있었다. 백련교니, 미륵이니 하는 말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호주(濠州)는 지금의 안후이 추저우에 있는 펑양(凤阳)이다. 그곳에 주오사(朱五四)라는 영감이 살았다. 그때 나이가 이미 64살이었고, 평생을 무지렁이 농부로 고생만 하면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이제 그의 아들들도 그렇게 살다 죽을 운명이었다.
같은 농꾼들 중에서도 주오사 영감의 집안은 더 살림이 곤궁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집안이 호주에서 살게 된 것도 당대의 일이었다. 본래는 사주(泗州)에 있던 집안이라고 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구용(句容)에 있었는데, 그것도 옛날이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으니, 그만큼 기반이랄 게 없었다.
주오사 영감이라고 떠돌아다니길 즐겨서 일가족을 이끌고 돌아다녔을 리 없었다. 주오사의 아버지는 본래 금을 캐는 직업이었는데, 이제 금광에서 금이 더 나오지 않는데도 나라에서 정한 산출량은 터무니없어 양식도 팔고 재산도 팔아 금을 가져다 바치다가 결국 모든 걸 버리고 타지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 때부터 이리저리 떠돌다가, 자신의 대에 이르러 종리(鍾離)에서 10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유도 알 수 없이 땅을 빼앗기고 내몰렸고, 이곳에 온 것은 이제 4년 밖에 되지 않았다. (1)
주오사 영감에게는 아들이 네 명이 있었고, 딸이 둘이 있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전부 무지렁이일 뿐이니 제대로 된 이름 같은 것도 없다. 셋째가 중칠(重七)이고 넷째가 중팔(重八)이라는 식이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살다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죽을 팔자다. 이름 같은 게 있을 의미도 없었다.
하나같이 하잘 것 없던 집안에서 유달리 기인(奇人)이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치면, 바로 주오사 영감의 장인어른이었다. 중팔 형제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막내인 중팔에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가끔씩 해주는 이야기만은 어렴풋이 추억에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은 죽었을 때 나이가 99살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허리가 꼿꼿했고 긴 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50년 ~ 60년 전에 몽골과 싸우는 전투에 참여했다고 했다. 당시는 몽골이 전 세계를 집어삼켰고, 최대의 적수인 남송을 유린하여 수도마저 함락하고 대충신 문천상(文天祥)도 사로잡았을 때다.
애산(厓山)
국토 전역을 빼앗긴 송나라는 장군 장세걸(張世傑)과 승상 육수부(陸秀夫)의 지휘 아래 멀리 애산(厓山)으로 도망쳐 최후 항전을 준비했다. 송군은 함선 1,000여 척을 모아 몽골군에 맞섰으나, 보급이 차단 당해서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송나라 장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다가 참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며 싸웠고, 부대원들은 구토를 하며 병에 시달렸다.
때를 놓치지 않은 원나라군이 쳐들어와 송군이 무너져 내릴 때, 승상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위해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다. 죽는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아직 살아있는 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승을 미래를 위해 남기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그것이 송나라 문인의 삶에 방식이었다. 이제 적군이 근처까지 오자, 노년의 육수부는 7살의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홀로 남은 장세걸은 전군이 패퇴하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진중의 혼란 속에서 황제의 모친인 양태후를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들이 물에 빠져 자진했다는 것을 안 태후는 이렇게 울부지었다.
“내가 지금까지 욕을 견디면서 살아남으려 했던 것은, 오직 조씨의 마지막 혈육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더 살아간단 말입니까?"
다음 날, 지친 사람들이 태후를 주의하지 않을 때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져 먼저 간 아들을 따라갔다.
황제가 죽고, 승상이 죽고, 태후가 죽었다. 바다에는 10만이 넘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더 이상 송나라의 깃발을 들 병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장세걸은 갈 곳조차 잃은 채 황망히 먼 바다를 떠돌았고, 거친 태풍이 닥쳐왔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쳤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나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다.
중팔의 외할아버지는 그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 장세걸 휘하의 친위병으로 그를 끝까지 따랐고, 바다에 빠져 죽기만을 기다렸으나 요행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다. 그리고 온갖 고생을 겪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 날의 기억은 늙은 노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랑이었고, 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노인이 눈물을 머금은 채 옛일을 이야기할 때면,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은 사람들 역시 똑같이 눈물을 훔쳤다. (2)
노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가 바로 주오사 영감에게 시집을 온 진(陈) 씨였다. 노인이 죽고 난 뒤에는 외가와 있었던 왕래도 거의 끊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그쪽 역시 형편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본래도 빈곤했던 주오사의 살림은 가난이 닥치자 처참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밥을 먹으려 해도 쌀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뜯어 한줌 밖에 안되는 쌀과 섞어 밥을 지어 먹었다. (3) 제대로 먹는 게 없으니 몸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몸이 약해지니 병마가 닥쳐오면 마른 잎이 바람에 고꾸라지듯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못 먹고살아서 아픈 것이니 가진 게 없으면 죽는 것 말고는 달리 해결책도 없었다.
시작은 주오사 영감이었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살던 주오사는 그 해 4월 6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삶이었다. 그리고 불과 9일 뒤, 집안의 장남이 죽었다. 12일 뒤엔 주오사의 아내이던 진 씨가 죽었다. 손을 쓰고 말 것도 없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가족이었던 집은 이제 둘째와 넷째 중팔 밖에 남지 않았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일가족이 거진 전멸한 셈이었다.
두 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통곡만 했다. 하지만 현실의 괴로움은 슬픔도 집어삼켜버렸다. 집안에 시신이 몇 구가 굴러다니는데도, 마땅히 매장할 방법도 없었다. 가진 땅이 없으니 묻을 곳도 없고, 가진 돈이 없으니 매장할 관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누워 잠을 자던 가족을 길거리에 내버려 들짐승이 뜯어먹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두 사람은 동네의 부유한 지주 유덕(劉德)을 찾아갔다. 많이도 바라지 않고 가족을 어떻게든 매장만 할 수 있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도움은커녕, 더러운 욕설 밖에 없었다. (4) 결국 그들은 쫓겨나듯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저 막막한 차에 다행히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었다. 마을 사람인 유계조(劉繼祖)가 자신의 땅에 묻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팔 형제가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 어떻게든 장지(葬地) 문제는 해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관이나 수의(壽衣) 따위는 준비할 수가 없었다. 형제가 일가족을 거적에 둘둘 말아 둘러메고 약속된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낡은 끈이 떨어져 일가족의 시체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비참한 마음을 참고, 둘째 형은 새로 끈을 가져오기 위해 마을로 되돌아갔다. 시신을 지키던 중팔은 비바람이 억수로 몰아치자 근처의 절로 피신하여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찬비 떨어지는 산골짜기에 내버려 둔 가족 생각에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뛰어나와 보니, 가족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시신이 있었던 자리는 쓸려온 흙이 모여 절로 두툼한 흙무덤이 되었던 것이다. (5) 기막힌 일이었다.
훗날 주원장은 이 날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곽이 없어 더러운 옷으로 시신을 감싸, 흙으로 살짝 덮어 무덤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하니 제삿 상인들 어떻게 제대로 바칠 수 있었겠는가?” (6)
겨우겨우 매장을 끝냈지만, 살아있는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직 막막함 뿐이었다. 세상 천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두 형제 밖에 없고,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 형도 의지하기엔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끝에 중팔은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기로 했다.
당시의 중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고살았다. 지주들처럼 소작을 놓고 사는가 하면, 마을에 사람이 죽으면 가서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며 몇 푼이라도 챙겨 왔다. 어느 부유한 신도가 보시(布施)를 하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 놀이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사찰마다 달라 부유한 사찰도 있고 가난한 사찰도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인 중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결국 중팔은 머리를 깎고 낡은 승복을 입은 채 행자(行者)가 되었다. 황각사 입장에서도 어린 행자를 받아들이는 건 남는 장사였다. 어차피 절간을 관리하려면 사람 손이 필요한데, 머슴 따위를 두는 것보다는 행자를 하나 받아들여 보리밥 한 공기와 누워서 잘 허름한 방 한 칸만 주면 싸게 먹히는 종놈을 두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실상이 이랬으니, 중이 되었다곤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이라곤 청소, 잡역, 온갖 심부름 등 자질구레한 일들뿐이었다. 나이가 어리고 들어온 것도 가장 최근이다 보니, 절간에 있는 모든 중들의 심부름 따위를 혼자서 도맡아해야 하는 위치라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에도 수십 번은 눈 앞의 사람을 두들겨 패고 달아나고 싶었겠지만, 이 어지러운 세상에 퍽퍽한 보리밥이라도 얻어먹을 곳이 따로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나마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중팔 - 주원장이 절에 들어온 지 달포 정도 지났을 무렵, 절에서는 기껏 있는 중들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명목으론 행각승(行脚僧)이라고 하니 듣기는 좋았다. 실상은 절에 먹을 게 없어서 입을 덜려고 하는 수작이었을 뿐이다. 밖에 나가 세상을 보고 오라면서 내쫓는 셈이었다. (7) 결국 어떻게든 빌붙어 법이라도 먹으려 했던 주원장 역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명사』 혹은 『명사기사본말』 같은 사서에서는 당시 주원장의 행적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태조가 서쪽으로 가서 합비에 이르렀고 광주, 고주, 여주, 영주 등의 여러 주를 편력하였다.”( 太祖西至合淝,歷光、固、汝、潁諸州。)
글로 풀자면 이렇게나 짦은 이야기다. 단 13자로 정리가 된다. 그러나 실제 주원장이 겪었을 고난은 130자로도 전부 적기 힘들 만큼 막대했을 것이다.
낡아빠진 승복 하나 입고 정처 없이 길을 헤매며, 밤마다 염치 불구하고 찾아가 헛간에서 잠을 지새우며, 그마저도 못하면 길바닥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밥 한 끼를 얻어먹기 위해 눈에 보이는 집마다 찾아가 목탁을 두들겨대고, 겨우겨우 뭐라도 얻어먹으면 환영받지 못하는 몸을 일으켜 또 다른 곳으로 떠난다.
“중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행각승으로 뿔뿔이 흩어져 떠돌았다. 나는 할 일도 없으려니와 한 가지 재주도 가진 것이 없었다. 여태껏 부모님에 기대어 살다가, 일이 이렇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망연한 느낌이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그림자를 길동무 삼아 다녔다. 굴뚝에서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면 급히 달려가 밥을 얻고, 저녁이면 낡은 절간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깊은 산속 깎아지른 절벽을 쳐다보면 푸르기만 하고, 달밤에 듣는 원숭이 울음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혼은 계시지 않은 부모님을 유유히 찾아다니고, 뜻은 여지없이 꺾이여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서풍이 부니 학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어느새 부슬부슬 서리가 흩날려도 몸은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떠도니, 마음은 부글부글 세차게 끓어오르는 물과 같았다.” (8)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합비(合肥)를 떠돌던 주원장은 갑자기 몸에 탈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 약을 쓸 돈이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누워서 쉴 수 있는 장소도 없었다. 길바닥에서 누구도 모른 채 조용히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는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주원장이 정신조차 가누지 못할 무렵, 자줏빛 옷을 입은 정체 모를 두 사람이 그런 주원장을 발견하고 딱하게 여겼는지 극진하게 간호해주며 불편함 점이 없도록 살펴주었다. 비몽사몽하던 주원장은 이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평범한 사람인지 지나가던 부호인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겨우 몸이 좋아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명의 사람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뒤로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9)
주원장이 그렇게 이슬을 마시고 서리가 올라오는 땅바닥에 누워 떠돌아다닌 기간은 총 3년이었다. 그가 부모를 잃은 나이가 17살이었으니 17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시기를 노상에서 보낸 것이다.
그 3년간 병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하고, 굶어죽을 뻔 하기도 했으며, 밤에는 들짐승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지켜보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참으며 헛간에 누웠고, 어스름한 절간에 누웠으며, 온갖 들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산속 한복판에 누워 서리를 맞으며 잠을 청했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두 눈에 담았고, 천하의 온갖 부조리를 온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3년 동안 기구하게 지내고, 황각사에 되돌아왔다.” (崎嶇三載,仍還皇覺寺)
그런 3년을 지낸 뒤, 주원장은 황각사로 다시 되돌아왔다. 처음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그러나 황각사를 떠났던 그 소년과 돌아온 이 청년은, 똑같은 사람인 동시에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평생 부모님에 기대어 살았다가, 부모님이 사라지자 오직 망연함 뿐이었다’ 고 했던 소년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평범한 인간으로는 겪을 수 없는 고통과 경험을 체험하고, 동시에 살아남으며 주원장은 무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그가 겪은 경험은, 이후의 그를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버렸다.
시대가 주원장을 만들었다. 그걸 영웅이라고 칭하건, 혹은 괴물이라 부르건.
(1) 오함, 주원장전
(2)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
(3) 명태조실록 권 39
(4) 명태조실록 권 14
(5) 명사기사본말
(6) 황릉비(皇陵碑)
(7) 명사기사본말
(8) 어제황릉비(御制皇陵碑)
(9) 명사 태조본기 - (태조가) 달을 넘겨 합비(合肥)지역을 걸식하며 다녔다. 도중에 병이 났지만, 자줓빛 옷을 입은 두 사람과 함께 했었는데, 이들이 간호하며 돌보는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병이 나았지만, (그들이) 소재한 곳을 잃었다. 무릇 광(光)주, 고(固)주, 여(汝)주, 영(潁)주의 여러 주를 3년간 돌아다니다가 다시 절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