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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8/24 15:44:24
Name 말랑
Subject [일반] 환갑
아버지 말로는, 나는 4살 때 한글을 떼었다고 했다.

나는 12월 31일 생이니까 4살 때라면 2년 모 개월 만에 떼었다는 소리다. 믿거나 말거나. 가장 일찍 배운 노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 오 트라이’라고 했다. CF를 그렇게 좋아했단다.

CF를 본 다음엔 그냥 잔다고 했다. 나를 키우는 것은 마치 얌전한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딱히 울지 않았다. 엄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는데 아들은 그러려니 하고 자버렸다고 했다. 재워놓고 시장을 다녀오면 재워놓은 그대로 자고 있었다. 밤에 재워놓으면 자기를 깨운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병치레도 없었다. 나는 집안에서 9년 만에 나온 아들이었는데, 3kg도 나가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었단다. 근데 막상 낳아놓고 보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걸음마를 5살 때 떼었다는 것 빼고.

아버지는 어디를 돌아다니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이제 막 걷는 아들과 막 태어난 딸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이제 내가 그렇게 돌아다녀줬는데 너는 기억을 못하느냐고 종종 타박을 준다. 그 때 나는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귀여운 아이였다. 숏팬츠를 입고 두툼한 팬티스타킹을 신었다. 집에 돈이 없었는데, 돈 없이 노는 법을 아는 놈이었다고 한다. 책 보는 법을 알았고, 그림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학원에 보낼까 하면 막상 돈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엄마는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재능이 발견되면 그 쪽으로 투자를 해야 할까봐 무섭다고까지 했단다. 어릴 때 국제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는데, 그 때 솟아오른 알 수 없는 감정이 그게 아니었을까 싶었단다.

난 공부를 꽤 했다. 집안 역사에 이런 놈은 없었다고 했다. 이놈이 공부에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리더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실의 아들은 성적이 좀 나오는 것을 무기로 만화만 봤다. 어릴 적 CF 노래 부르듯이 만화주제가를 부르고 다녔다. 심지어 그 짓을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다.

아버지는 으레 한국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나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다. 그냥 가끔 아버지 일 도와준답시고 갔던 일. 어쩌다 시간이 나면 여행이라도 갔던 일 정도만 기억했다. 전업주부 어머니의 기억을 빌리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자식 돌보는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했다. 너희들이 나를 돈 버는 기계로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것 알게 뭐냐고 했다. 늦게라도 퇴근하면 아들은 늘 집에 있었다고 했다. 남들은 자식이 방에 들어가서 방문 콕 닫고 있는데 나는 집에 가면 아들이 TV보다가 마중을 나온다고. 그건 그 집 아들이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말을 들었지만,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베풀 호의까지는 없었다. 대신 남한테 얻어오는 건 있었다. 아버지는 장난감 오락기 가릴 것 없이 모두 남에게서 얻어왔는데, 아들은 그것도 불평하지 않았다. 남이 붙여놓은 스티커는 아들이 알아서 떼고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붙여놓았다.

아들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실패했다. 그 전까지는 실패라고 할 만한 건수가 딱히 없었다. 취직을 생각할 때 쯤, 아들은 공무원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3년은 해야 하지 않을까 했지만, 아들은 1년 해 보고는 이건 아니라면서 때려치웠다. 저래 끈기가 없게 키웠나? 나중에 어떻게 살까? 아버지는 공무원 때려치운 건 잘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의 끈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크다. 항상 나보고 원대한 꿈이 없다고 했다. 도전정신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팍팍한 세상에서 공무원 포기할 용기는 어디서 났느냐고 가끔 묻는다.

아들은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인생의 똑 절반이었다.

아버지의 주위엔 손주가 하나 둘 늘어났다. 아들은 종종 나는 이제 결혼은 못할 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딸도 그렇다. 딸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것도 있고, 못 하는 것도 있다. 한 번 연애하고는 영원히 연애를 못하는 아들은 오늘도 땀범벅이 되어서 퇴근을 한다. 통장에 박히는 돈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60평생 속을 썩이지 않던 아들은, 이제 와서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하나 하나 박아넣었다. 마누라는 완전 초기이긴 하지만 위암 수술을 두 번 했다. 다음 주 주말에 결혼식에 가면, 네 아들은 결혼 언제 하는지 보나마나 물을 것이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아버지는 환갑이 되었다.

아들이 건넨 봉투에 담긴 돈은 아들 월급의 1/5 정도는 되었다. 저 놈 월급 2/3은 적금이다. 10만 원은 주택청약저축이다. 6만 원은 휴대폰 값이다. 그럼 얼마가 남지? 아들은 원래 기념일은 기가 막히게 챙겼다. 우리 부부가 매년 까먹는 결혼기념일을 아들이 챙기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이것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30년은 대략 이렇다. 나는 아버지의 남은 30년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며 월급을 도둑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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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로즈
17/08/24 15:55
수정 아이콘
친구 아버지 환갑잔치 갔었는데 삼남지방도 아니고 경기도인데 기생도 부르더군요. 참고로 절값은 기생이 다 가져가더군요.
다른 친구 어머니 환갑잔치는 풍물패 불러서 길에서 한바탕 공연했어요 볼만했어요.
공안9과
17/08/24 16:53
수정 아이콘
보험 가입도 80세 만기에서 100세만기가 대세가 된지도 한참 된 시대에 환갑잔치를 한다는 것도 신기한데, 기생의 존재는 더욱 신기하네요.
영화 같은데 보면 유력인사들이 들락거리는 요정에서 한복입고 나오는 여자들을 기생이라고 하는건가요?
사악군
17/08/24 15:58
수정 아이콘
아들이 이렇게 생각해주면 아버지로서 너무 기쁘겠네요..
저도 부모님한테 그리 잘하지 못합니다만 제가 제 아들 크는거 보면서
아 내가 좀 잘 못해도 내 인생 하나 건사하고 있으면 부모님은 괜찮으시겠구나-_- 셀프 안심합니다.
크크크크 이래서 내리사랑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서른이신데 아직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진 않으실 거에요. 아버지 세대치고는 빠른 편은 아니시라
아버지 친구분들의 출가한 자녀분들은 나이도 좀더 위 아니신가요. 생각이 없는게 아니시라면 천천히 하시면 되죠 뭐.
이쥴레이
17/08/24 16:03
수정 아이콘
군대가기전 -> 군대갔다와야 철들지
제대하고와서 -> 군대갔다와도 넌 똑같냐
복학하고 학교다닐때 -> 넌 그렇게해서 학교 졸업은 하겠냐?
졸업하고 취업준비할때 -> 그렇게 놀아서 취업할수 있겠냐?
취업하고나서 집에올때 -> 돈도 그렇게 적게 주는데 결혼이나 할수 있겠냐?
결혼하고 살고 있을때 -> 결혼해도 아직 애야, 애.. 언제 니 자식 낳아서 키울생각이냐?
첫애 낳고 살고 있을때 -> 자식 낳아서 아버지가 되어도 넌 항상 똑같냐, 애같아서 니 마누라가 얼마나 힘들겠냐?


이다음은 뭘까 하고 고민중이기는 합니다. 곧 있으면 아버지가 칠순이 되고.. 장인어른은 팔순이 되는데.. 하루하루 고민입니다.
아버지들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아들이 대견스럽거나 좋을때도 있지만 항상 걱정하는거 같습니다.

그게 내 기분과 상황에 따라 잔소리냐 걱정어린 충고이냐 고민이 되지만요.
스타나라
17/08/24 16:53
수정 아이콘
그래서 저는 요즘 부모님 모시고 1년에 한번은 여행다니고, 기회되면 아빠랑 술한잔씩하고 카메라 들고다니면서 사진 찍어드리곤 합니다.
사진으로 본 부모님은 또 다르더군요. 분명 머리속에는 26년전 그모습인데 사진속에는 60이 다된 할아버지의 얼굴을 하고계시더라구요.
고분자
17/08/25 07:07
수정 아이콘
아기때는 잘자주는 아들이 최고죠. 건강하셔요~
저도 아버지와 최대한 시간 보내려고 노력중입니다 술한잔 탕한그릇 같이 해도 그게 다 좋은 추억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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