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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집단군이 캅카스를 아주 휘젓고 다니는 동안 B집단군은 A집단군의 측면 보호를 위해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자연 방어선의 존재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철도 시스템으로는 진군이 더딜 수밖에 없었죠. 어쨌든 8월 말이 되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코 앞에 다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캅카스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껀수를 찾고 있던 히틀러의 눈에 스탈린그라드가 들어와버렸고, 전략적인 목표는 외곽에서 포격전만 해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전력을 다해서 스탈린그라드를 접수하라는 명령을 내려버리고 맙니다. 이 때문에 B집단군의 대다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 끌려들어갔습니다. 소련군도 상황은 무척 나빠서 볼가 강까지 겨우 100 m 가량만 남겨놓고 처절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백 퍼센트 철저한 고의로 제가 일부러 빼먹은 사실이 있습니다.
11월 18일자의 양군의 대치 상황인데, 저 방어선을 자세히 잘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회색 동그라미에 별표가 들어 있는 지역 말이죠. 그리고 다음 지도를 또 유심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뭔가 이상한 걸 느끼셨다면, 빙고.
앞 글에서는 거의 일부러 추축국군이 돈 강 너머로 소련군을 밀어붙였다고 이야기했고 사실 그게 거의 맞기는 했습니다만,
그게 완벽하게 사실인 건 아니었습니다. 실은 소련군은 8월 말에, 그것도
독일의 동맹국을 공격해서 세라피모비치(Serafimovich)와 크레멘스카야(Kremenskaya)에 교두보를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밑줄 그어 가며 강조하는 것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이거, 되게 큽니다. 작전의 시작이 도하인 것과,
도하를 미리 해 놓고 충분히 준비한 후에 작전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은, 특히나 이전 글에서 보여드린 지도에서처럼 해당 지역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인 경우 그 차이가 매우 크죠. 독일로서도 뒤통수가 찜찜했던 터라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병력의 일부를 차출해서 교두보를 공격할 정도로 신경을 썼지만 결국 밀어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극적인 순간이죠. 한줌의 병력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피에 피를 덧칠하며 버텨내야 했던 추이코프의 군대였고, 고작 백 미터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추이코프의 제62군은 볼가 강에 수장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추이코프, 그리고 그와 함께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했던 알렉산데르 로딤체프(Alexander Rodimtsev)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동안, 제2전선을 열지 못한다는 영국의 이야기를 듣고 대노한 스탈린에게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가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그걸 실행한 건데...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준비되고 작전이 완전히 수립되기까지 거의 두 달이 걸렸습니다. 여기서 세워볼 수 있는 if 가정이 한둘이 아니죠. 소련군이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독일군이 가진 병력 다 털어 가며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지 않았다면? 측면이 취약한 이탈리아나 루마니아군이 아니라 독일군이었다면? 추이코프와 로딤체프가 버티지 못했다면? 소련군이 지레 겁먹고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볼가 강 뒤편으로 군사를 물렸다면? 등등... 이 모든 질문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만약 그것이 사실로 벌어졌다면" 소련군의 이러한 카운터 블로우가 실행될 수나 있었을까요?
여담입니다만, 저 "다른 대안"이 우위에 서기 이전의 회담에서, 영국 측에서 스탈린에게 한 말은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건 바닷물에 물 한 방울 격이오"였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했죠. 까놓고 이야기해서 독소전은 지금까지 인류가 벌여 왔던 수많은 전쟁 중 단연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하며 지독한 싸움이었습니다. 저 아프리카에서 로멜이 원수 지휘봉을 받고 "차라리 기갑사단을 하나 더 주는 게 낫다"고 투덜대고 있는 동안, 이쪽은 사단은커녕 그보다 두 단계나 위인 군 단위로 병력이 갈려나가는 판이었는데... 그 소수 병력을 가진 로멜을 잡네 마네 하면서 아둥바둥 버티는 영국군이 소련군에게 무슨 도움을 주고 제2전선을 열어제낄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규모 및 잠재력에서 소련군과 맞먹는, 아니 잠재적인 측면에서 훨씬 능가하는(이게 맞죠. 렌드리스가 뭐 어디 땅 파서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미군이 있긴 했지만, 그 당시 미군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우리 애들, 싸움할 줄은 아나?"
결국 당시 영국의 1/4 가량의 지원을 받아 가며(1942년까지 렌드리스로 공급된 물자가 영국은 58억 달러 상당, 소련은 14억 달러 상당) - 사실 이것도 결코 적은 양은 아니지만 - 소련은 거의 자신들의 힘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하긴 그래서 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 같습니다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 극적인 장면 따위는 단 한 순간의 평화만도 못한 것이겠죠.
어쨌거나 북쪽에는 이미 교두보가 확보되어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고, 남쪽도 상황은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6군의 남쪽 측면을 수비할 독일군은 루마니아 제4군을 제외하면 독일군 제16차량화보병사단(군단 잘못 쓴 거 아닙니다. 사단 맞습니다)이었습니다. 이들이 담당할 거리요? 400 km. 서울서 밀양까지의 거리를 담당하는 게 (아무리 동맹군이 있다고 하더라도) 딸랑 사단 하나.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장진호 전투 당시에 북쪽의 함흥에서 서쪽의 평양까지 무려 480 km 전선의 길이를 꼴랑 군단 하나가(제10군단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담당한 걸 봐서 당시 사령부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 게 오늘날의 일인데, 이건 그보다 더했습니다. 아니, 군단은 최소한 사단이 두셋인데다가 한반도는 지형이 험준하니 수비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라도 하죠.
그리고 버티고 버틴 끝에, 마침내 붉은 군대에게 기회는 왔습니다.
11월 19일에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제1근위군, 제5전차군 및 제21군을 필두로 북쪽에서부터 추축국 군대를 박살내 가면서 소련군이 진격의 나팔을 불었고, 다음날에는 남쪽 측면을 강타하며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명한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 Operatsiya "Uran")이 개시된 것이었죠. 시간차를 둔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돈 강과 볼가 강을 잇는 지류가 갈라지는 곳에 칼라치나도누(Kalach-na-Donu, 이하 칼라치. 로스토프나도누와 마찬가지로 보로네시 인근에 칼라치가 있어서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씁니다)라는 곳이 있는데, 북쪽에서 칼라치까지 150 km인 반면 남쪽에서는 90 km였기 때문이죠.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철도는 덤이었습니다. 역시 지도를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르겠군요.
소련군으로서는 당연히 도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세에 전차군이 동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은 공세 역량을 이 곳에 최대한 동원한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이는 독일군을 상대로 "꼬라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소련군의 전차 정비 및 유지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함과 제공권 문제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죠. 게다가, 이런 포위전을 한 번이라도 직접 게임상으로(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 등) 시도해 보신 분이라면 바로 아시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포위망에 가둔 적을 섬멸하기 전에 포위망이 "터지고 찢겨지는" 걸 어떤 식으로든 막아야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근데 그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게 기병군단이었죠. 이들은 상대적으로 경무장을 할 수밖에 없던 터라 더욱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작전을 결행한 데에는 역시 바투틴의 과감성이 크게 작용했죠.
* 수정 - 작전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예레멘코입니다.
이렇게 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의 성과는 소련군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죠. 소련군이 상대하는 루마니아군은 사기도 낮고 장비도 후진적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대전차 수단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기갑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작전이 개시된 지 몇 시간 - 며칠도 아니고 몇 시간!! - 만에 추축국군의 전선은 완전히 무너져내렸습니다. 가히 이쯤되면 눈사태라 할 만했죠. 마치 소목정석에서 걸쳐간 이후 들이받아서 벽을 쌓아버리는 큰눈사태정석(큰밀어붙이기)을 두는 것처럼 소련군은 싸움을 걸고 밀어붙여서 벽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단 4일 만에 독일군 돌출부의 양 측면은 완전히 작살이 났습니다.
바둑 두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이 큰밀어붙이기정석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변화가 심한지... 가히 대사백변에 필적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죠. 그것과 비슷한 변화가, 그것도 정말 큰 변화가 하나 벌어졌습니다.
소련군이 칼라치 교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데, 이 칼라치 교량을 지키고 있던 독일군은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공격을 받을 때 소련군이 건너가지 못하게 박살내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격을 지휘하던 제26전차군단 예하 필리포프 중령이 다리를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자, 대담하게도 인계받은 전차의 전조등을 환하게 켠 채로 다리로 돌진했고, 독일군은 당연히 아군이 온 것이겠거니 하면서 소련군을 그대로 통과(!!!!!)시켜버린 겁니다. 이 사소한 실수가 굉장히 큰 나비효과가 되었습니다. 이런 실수를 놓칠 소련군이 아니었죠. 곧 이들이 다리와 그 주변부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주 병력이 몰려올 때까지 다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마침내 11월 26일...
포위망은 완벽하게 완성되었습니다. 북측의 제26전차군단과 남측의 제4기계화군단이 조우하면서 포위망의 내선이 완성되었고, 즉각 소련군은 포위선을 두껍게 키워 가면서 완전히, 문자 그대로 완전히 독일군을 포위한 것입니다. 이 작전을 위해 동원된 소련군의 병력은 무려 백만 명. 전차는 9백 대에 달했고, 중포는 무려 1만 3천 문에, 항공기도 천 대를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전력이 단 하나의 목표, 스탈린그라드를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스탈린과 주코프는 초기에 이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의 규모가 8만 명 가량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이게 워낙 성공적으로 작전이 돌아가자 잿밥에 눈을 돌리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죠. 그러나... 실은 이 때 무려 33만 명 가량의 병력이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작전은 소련군 스스로의 예상조차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Decisive Victory)였던 것입니다.
이제 턴은 완벽히 소련군에게 넘어갔고, 독일군이 이 재앙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건데... 제목의 요참형은, 고대 중국의 처형법이었습니다. 허리를 자르는 형벌이었죠. 작두를 이용했고, 중국에서는 시황제를 보좌했던 승상 이사가 이 형벌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유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