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양초의 심지를 손으로 잡아 불을 꺼 본 적이 없다. 물론 지방을 태워본 적도 없다. 난 언제나 제사가 끝나면 생밤 하나를 입에 넣고 두세 개를 손에 챙길 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을 씹고 두 개 챙겨서 바깥으로 나오니 둘째 형이 지방을 태우고 있었다.
‘안 뜨겁나?’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밤 맛있냐?”
“어? 어. 살짝 달아. 생고구마처럼. 계속 씹으면.”
“그래? 넌 항상 밤이더라. 어 너 어디 가냐?”
우리 집 장손인 해준이가 츄리닝 차림에 잠바를 걸치고 나오고 있었다.
“예, 아버지가 소주 사 오라고 해서요.”
“형은 또 뭔 소주야. 그냥 정종 있는 거 마시지. 아무튼, 알아준다니까. 너 신발끈 풀렸다. 넘어져. 묶어 지금.”
“어, 그러네. 감사합니다.”
“어, 춥다. 들어가자”
형은 몸을 움츠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조카 녀석은 앉은 자세로 움츠려 신발끈을 묶었다. 해준이는 양쪽 신발의 신발끈을 다 풀어서 다시 묶고 있었다. 묶고 나서 나에게 인사하고 대문을 나가는 모습까지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신발끈을 묶었었다.
‘넌 아직 안 해도 돼’
아버지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내라서 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 부엌에 들어가 ‘나도 할래’ 라고 어머니 옆에서 기웃거리다 뜨거운 국에 손을 덴 게 더 큰 이유다. 이미 형 둘에 누나 하나가 있었고, 다들 제 몫을 하는 나이였기에 나는 쭉 가족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아직도 기억하는 서러움은 눈이 수북히 쌓인 날, 여름이면 벌초하러 가던 동네 뒷산에서 형들과 누나 그리고 동네 친구들이 비료 포대를 타고 눈썰매를 타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서럽던지.
최진사댁 셋째딸까진 아니어도 아무튼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과잉보호는 ‘넌 아직 안 해도 돼’라는 말로 대표될 정도로 심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하지는 못하고 지켜본 기억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중 하나였던 저 멀리 동네 앞을 지나가던 기차. 내가 기차에 매력에 빠진 건 그 시절이라고 추정된다.
눈썰매도 자유롭게 타고 심지어 낫과 도시락을 들고 형들 따라 벌초를 자연스럽게 가는 나이가 되었을 때, ‘철도기관사’가 되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철도고등학교에 진학을 목표로 했다. 다른 놀 거리가 없는 시골이기에 성적엔 문제가 없었지만 비싼 입학금이 문제였다. 당연히 집에 말을 꺼냈을 때는 반대가 심했었다.
하지만 여태 못한 게 많은 막내였기에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에 부모님을 설득했고, 어머니, 아버지 순으로 허락해 주셨다. 특히 어린 자식이 힘들고 위험한 일 못 하게 막으셨던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니 시키는 거니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난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다짐을 한 번 더 듣게 되었다. 지금 이 방을 나가면 절대 철도학교 다니는 3년 동안은 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아비가 걱정되어도 돌아오지 말라고.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나를 졸라 댔으니 학교 간 거 무사히 마쳐야 하고 꼭 기관사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방학할 때면 와도 되지 않냐는 말에 아버지는 방학에 집에 오더라도 잠깐만 있다 가라고.
그러고는 이제 가라고 하셨다. 돌아보지 말고 딴 곳 들러 한눈 팔지 말고 곧장 학교로 가라고.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저놈이 약해져서 돌아오거나 하면 쫓아내라고. 내가 그리 말했으니 학교 졸업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도 서운해 지 말라고. 다 가족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아마 가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씀하시더니 목이 칼칼하다며 형수에게 부엌에서 동치미 국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형수에게 내가 대신 갖다 줄게 하시고는 나를 끌고 부엌에 가셨다. 거기서 난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아버지 말씀 잘 들으라며, 이건 갈 때 요기하라며 돈 몇 푼을 내게 쥐여 주셨다.
추운 날 그렇게 집을 나와 역으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쪽 집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난 방금 약속을 했으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내가 어길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발걸음이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차 시간도 여유가 있어 느리게 가는 건 괜찮았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이고 가는데 내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형수님이 재작년 아버지 생신 때 장에 나가 아버지 신발을 샀을 때 내 것도 같이 사주었다. 신발끈이 달린 운동화. 난 살짝 집 방향으로 몸을 튼 후 허리를 굽혀 신발끈을 묶기 시작했다. 한참을 묶은 거 같다.
묶고 풀고 묶고 풀고 묶고 풀고.
“작은아버지? 밖에 계속 나와 계셨어요?”
“어? 어. 너 금방 왔네.”
“아 요 앞에 새로 편의점 생겼어요. 오른쪽 골목 돌면 금방이에요. 들어가세요. 아까 엄마가 갈비 해 놨다고 했어요.”
“그래, 들어가자.”
잠깐 밖에서 사색에 잠긴 사이 제사상은 저녁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병풍도 치워져 있고, 과일과 전은 대나무 채반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들 녀석은 제기를 닦아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작은 형수님은 갓 지은 밥을 밥그릇에 나눠 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