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이하 '이냐리투'. 하지만 성은 곤살레스 이냐리투이다) 이상한 이름이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이름이 이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진동하고 있다. 여기서 고백하건대 나는 이냐리투의 빠돌이라 해도 좋다. 작년에 그가 <버드맨>으로 아카데미를 정복하였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리고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이런 게 '홍대병'인가? 그렇게 모두가 주목하는 감독이 된 이냐리투의 새로운 작품이 바로 <레버넌트>다.
나는 지난 감상문(
外)에서 <레버넌트>의 주제가 명료하다고 평했다. 다소 옹호적인 단어 선택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단순하다거나 노골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냐리투의 팬으로서 이 부분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이냐리투가 <레버넌트>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제는 이번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냐리투는 모든 작품에서 죽음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죽음을 통해 이냐리투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이다. 그래서 나는 이냐리투를 '생(生)의 구도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작가관은 <레버넌트>에서도 이어진다. 죽음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이냐리투에게 '죽음에서 돌아온 자'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또 있을까? 나는 <레버넌트>의 개봉일을 간절히 고대했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레버넌트>는 기대만큼 훌륭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아쉬움은 더 커져갔다. 그 아쉬움을 이 글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레버넌트>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레버넌트>의 주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명료하다.
[생존]과
[삶의 성찰]이다. 주인공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나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설원을 넘어 기지로 복귀한다. 그는 생존 과정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삶을 성찰한다. 자식을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났지만, 결국에는 복수를 내려놓는 성장을 보여준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원수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료하고, 너무나 이냐리투답다. 죽음에서 돌아온 복수의 화신에게서조차 삶의 성찰을 끌어냈다. 그 성찰의 결과는 종교적이고 가족적이다.
주제는 작품의 정수이다. 내러티브, 스타일, 연기 나아가 작품 외적인 홍보까지도 주제를 위해 존재한다. 영화의 각 요소가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작품은 높은 완성도를 갖는다. 그렇다면 <레버넌트>의 각 요소는 '생존과 삶의 성찰'이라는 주제와 잘 호응하고 있을까? 이를 따져보며 <레버넌트>를 살펴보자.
주인 없는 궁궐<레버넌트>의 초반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매우 훌륭했다. 마치 전장 속에 떨어진 것 같은 현장감이 경이로운 롱테이크로 펼쳐졌다.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평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
外) FPS 게임 같은 착각을 일으킬 뿐 실제로는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시점을 오가며 현실감(혹은 리얼리티)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FPS 게임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고 하는 말이다. FPS 게임은 플레이 시점도 있지만, 컷신이나 오토플레이도 있다. 반드시 플레이어의 시선만 강제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시점을 오간다. 이를 통해 더 생생하고, 더 극적인 영상을 얻고자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현장감은 1인칭이냐 3인칭이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전지적 시점이 정말로 현장감을 떨어뜨린다면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컷신이 등장할 때마다 몰입을 방해받아야 한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의 시선 변화현장감을 완성하는 조건 중 하나는 바로
[합(合)]이다. '영상과 사운드', '움직임과 시선'이 합을 이룰 때 현장감이 생긴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움직임과 시선이 절묘하게 합을 이루고 있다. 원주민의 습격에 당황한 병사들은 잔뜩 움츠린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화살을 피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이 순간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로우-앵글 쇼트(low-angle shot)를 유지한다. 그러다 움츠렸던 인물들이 활발하게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아이-레벨 쇼트(eye-level shot)로 이동한다. 이후로도 시선은 백병전과 매복 등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앵글을 자유롭게 오간다. 종국에는 전체 상황을 조망하는 익스트림 롱 쇼트(extreme long shot)를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단순한 시점 쇼트(point-of-view shot)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한 가지 종류에 고정되지 않고 다채롭게 변화하는 복합 쇼트(mixed shot)로 봐야 한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상황과 합을 맞춘다. 이 합이 원주민 습격 시퀀스에 현장감을 부여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롱테이크로 펼쳐진다. 인정할 점은 인정하자. 현장감 넘치는 압도적 촬영이었다.
(현장감을 이루는 요소는 다양하다. 세부 묘사, 음악, 분위기, 연기 등도 영향을 미친다)
(영상과 사운드의 합은 동시녹음과 더빙의 발달로 크게 어긋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합을 잘 맞추지 못하는 졸작들이 있다는 게 안습. 흔히 말하는 '타격감'은 영상과 사운드의 합이 잘 맞을 때 나타나는 현장감으로 볼 수 있다)
▲<카우보이 비밥>의 한 장면
움직임과 시선이 합을 이루는 좋은 예다. 덕분에 단순한 역동작을 치명적으로 만들었다.그러나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완벽하지 않다. 문제는 이 시퀀스에서 이냐리투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상은 현란한데 알맹이가 없다. 이냐리투가 사라진 자리는 촬영감독 루베즈키가 차지한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루베즈키가 지은 레고 성]이다. 롱테이크로 촬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가 치밀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카메라는 물론이고 배우와 소품 하나하나가 완벽한 시간에 완벽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 루베즈키는 각각의 블록들을 조립하여 마침내 압도적 영상이라는 으리으리한 성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 성이 텅 비어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냐리투는 그 성에 주제라는 이름의 주인을 정착시켜야 했다. 성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주인이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다면 주인 된 권리는 만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이냐리투의 영화가 아니라 루베즈키의 영화였다. 훌륭한 영상은 '생존과 삶의 성찰'이라는 주제를 완성하는 데에 전연 기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따로 논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따로 놀면 그저 묘기일 뿐이다. 아무리 짜릿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해도 그것에 그친다면 6분짜리 롤러코스터와 다를 바 없다.
이냐리투가 어쩌다 이렇게 헛발질을 하게 됐을까? 기술적 성취에 경도되었기 때문일까? 아카데미를 정복하고 나서 자만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처음으로 거대 자본을 다루는 작가주의 감독의 전형적인 실책 같다. 거대 자본은 양날의 검이다. 자원은 풍족해지지만, 관객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눈요깃거리]였다. "10분 안에 흥미를 끌어라!"라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법칙을 철저히 따른 결과이다. (
外) 작가주의 감독이 상업적 요구를 따르려다 미끄러졌다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기대와 다른 상차림을 맞이하는 아쉬움<레버넌트>의 발단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부터 각 인물의 신념이 뚜렷이 드러난다. 휴 글래스는 대원들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그 와중에도 가죽을 챙기라며 탐욕스런 모습을 내비친다. 앤드류 헨리 대위(도널 글리슨)는 가죽과 생존 사이에서 우물쭈물한다. 이러한 성격은 그들의 지위에 따른 것이다. 휴 글래스는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기에 부대원의 생존을 중요시한다. 존 피츠제럴드는 많은 가죽을 챙겨 돈을 버는 것이 임무이다. 앤드류 헨리 대위는 지휘관으로서 부대의 존속과 사업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극명한 성격 차이가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러한 성격 차이는 의견 차이로 이어지며 갈등을 유발한다. 단순한 선악 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성격과 신념에 따라 싸우게 한다. 그야말로 잘 차려진 밥상이다. 이 정도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든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우유부단한 리더와 욕망이 꿈틀대는 대원 그리고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이 셋이 펼쳐 보일 욕망과 복수의 이야기라면
<아귀레 신의 분노>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냐리투는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휴 글래스가 죽음에서 돌아온 이후 영화는 오로지 그의 생존에만 집중한다. 잘 차려진 밥상은 '욕망과 복수'였는데 영화는 기대와 다른 '생존과 삶의 성찰'을 이야기한다. 이냐리투다운 주제이다. 생(生)의 구도자라는 칭호에 어울린다. 그러나 영화는 이 주제를 관철하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포기했다.
인물의 개성과 입체적 면모가 사라진 점이 가장 아쉽다. 휴 글래스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존 피츠제럴드의 탐욕은 추가 보수를 챙기는 것에 그쳤다. 그의 광기는 어린애를 윽박지르는 것 외에는 분출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끝내 정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짐 브리저(윌 폴터)는 입체적 인물의 면모가 있었다. 존 피츠제럴드에게 굴복했지만, 추가 보수를 거부하며 양심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하나 이게 전부였다. 짐 브리저의 내적 갈등은 그 이상 표현되지 않았다. 입체적으로 피어날 수 있었던 인물이 평면적 인물로 남아버렸다. 호크(휴 글래스의 아들, 포레스트 굿럭)는 보다 심오한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생존과 삶의 성찰'이라는 주제에서 호크는 가족과 사랑을 상징한다. 그 사랑이 휴 글래스가 생존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동력이다. 반면 '욕망과 복수'라는 주제였다면 호크는 복수의 이유이자 욕망의 희생자가 된다. 특히 욕망의 희생자가 될 때 원주민이라는 그의 인종은 의미를 갖는다. 침략자에게 유린당하는 원주민 역사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영화는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다양한 장면을 영화 전반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이러한 장면들은 서사로 엮이지 못하고 파편으로만 남았다. 주제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짐 브리저, 존 피츠제럴드, 호크앞서 언급한 압도적 영상이 따로 노는 이유도 주제와 관련 있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는 극적이고 역동적이다.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극적 쾌감을 추구하는 주제라면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는 정적이다. 어울리지 않는 영상은 주제와 연결되지 못하고 기술적 과시이자 눈요깃거리로 몰락했다. 물론 가장 우선해야 할 대상은 주제이다. 원주민 습격 시퀀스를 살리자고 주제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너무 아쉽다. 너무나 잘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기대와 다른 상차림을 맞이해야 하는 아쉬움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 '생존과 삶의 성찰'로 정해진 순간 이 아쉬움은 예정되어 있었다. 다양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훌륭한 영상은 서사와 어긋나며, 빈약한 주제만 남게 될 뿐이다.
'생존과 삶의 성찰'은 좋은 주제다. 하지만 굳이 <레버넌트>에서 다뤄야 했을까? 이냐리투는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작가관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치 "나 이냐리투가 놀라운 기술과 훌륭한 사상을 전파하러 왔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이것은 관객과의 소통이 아니다. 일방적인 통보다. 복음을 전파한다며 원주민을 학살했던 백인들의 폭력과 무엇이 다를까? (
外)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레버넌트>는 작품이 꼬집고자 했던 추악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마치며...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은 아무런 서사도 없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영상이라는 기술적 혁신만으로도 관객은 놀라워했다. 이후 영상 기술은 조르주 멜리에스를 거쳐 CG의 세례를 받고 이제는 배우마저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상 기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면 굳이 영화라는 매체로 만들 필요가 없다. 문학이나 연극이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레버넌트>의 경이로운 롱테이크를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상 기술의 진보로써 얻어지는 쾌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서사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서사와 호응하지 않는 기술은 그저 묘기에 불과하다. 소재와 인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서사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레버넌트>는 이냐리투의 아집으로 인해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만 남게 되었다. '욕망과 복수'에 대한 기대는 곰의 습격 장면
쮸쀼쮸쀼신을 끝으로 사라졌다. 훌륭한 재료가 어울리지 않는 방식 때문에 빛을 잃었다. 싱싱한 양배추를 앞에 두고 김치를 담그겠다는 것은 장인 정신이 아니라 고집일 뿐이다. <레버넌트>는 그 고집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잠시 미끄러졌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레버넌트>에서는 이냐리투의 클래스가 느껴진다. 그의 클래스가 다시 한 번 나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이제 곧 있으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나는 이냐리투의 팬이지만, 이번에는 그가 상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상을 거머쥐길 바란다. 그는 클래스가 있으니깐. 그가 다시 한 번 찬란한 작품으로 아카데미를 정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날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Written by 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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