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니벨의 지휘권은 전임자 조프르와 후임자 페탱에 비해 엄청난 제약속에 전투를 지휘해야했습니다. 니벨은 총사령관이 되고자 피력한 적이 없었으며 조프르가 니벨을 추천한 것은 니벨의 충성심과 미숙함을 빌미로 실각 이후에도 지휘부에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니벨은 총 3명의 전쟁부 장관과 합동해야했습니다. 첫째로 만난 루시엥 라카즈(Lucien Lacaze)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둘째인 위베르 리요태(Hubert Lyautey)는 애초에 니벨을 탐탁해하지 않았고, 셋째로 만난 폴 펭르베(Paul Painleve)는 적극적으로 간섭했습니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의 경우에는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를 고삐잡기 위한 도구로 니벨을 사용해 헤이그와 상의하지도 않고 영국군의 지휘권을 니벨에게 내준 것은 이런 분쟁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애초에 지휘부내 정치싸움에서 조프르의 패로써 기용된데다가 전체적으로도 니벨은 조프르보다 훨씬 더 심한 정치인들의 간섭속에 지휘해야 했습니다.
[페탱과 니벨]특히 니벨이 고전했던 점은 녹록지 않았던 휘하 지휘관들의 견제와 뒷담화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군사령관 조제프 미셸러(Joseph Micheler)는 상원의장 앙토냉 듀보(Antonin Dubost)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휘부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페탱은 이들중 가장 심했는데, 5월 6일 전시내각 회의 직후 에두아르 드 카스텔노(Edouard de Castelnau)와 함께 지휘부로 이동하며 니벨을 호되게 비난했습니다.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해 앞을 가리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지적으로 부족함(을 꼬집어서 니벨을 비난했다)"
"(Petain reproached Nivelle for the) pride that was blinding him and for certain intellectual failings"]
-『The French Army and the First World War』 by. Elizabeth Greenhalgh pg. 198
그외에도 페탱은 니벨이 지금껏 소규모 작전밖에 시행하지 못해 전체적 상황에 대한 적절한 통찰을 이루어내지 못할테고 전투에 대한 "치명적인 구상"(fatal conception)과 유연하지 못한 사고가 겹쳐 독일군이 갑자기 후퇴할 시에 나타날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예견했습니다. 니벨 공세의 실패는 페탱의 고찰이 맞았음을 증명하지만 페탱이 멋대로 이러한 발언하는 것자체가 한명의 지휘관 휘하로 뭉치지 못하고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지휘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7
그러나 이러한 점은 니벨이 기획한 제2차 엔 전투가 흔히 알려진대로 처참한 졸전이 아닌데다가 타 프랑스 총사령관들에 비해 더 어려운 상황에서 지휘했음을 보여주지 당시 니벨이 보여준 무능한 모습에 대한 변호가 되지 못합니다.
[전술가로써 유능했던 로베르 니벨]니벨은 상황이 전혀 녹록하지 않은데다가 오히려 조프르보다 더 취약한 지휘권을 보유했음에도 니벨은 이전과 색다른 기동과 기습을 약속하며 지나친 자신감에 멋대로 24-48시간 이후 돌파를 성취하지 못하면 곧바로 공세를 멈추겠다고 기약했습니다. 이는 2차 엔 전투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니벨이 3년간의 힘겨운 총력전을 끝내기를 염원했던 사람들에게 크디큰 배신으로 다가와 더욱 실망해 몇몇 프랑스 사병들은 지휘부의 명령을 거역하는 항명사태로 번졌습니다.
안좋은 날씨와 지형에 대해서도 니벨은 베르됭 전투의 승리를 근거로 들어서 눈따위는 전혀 승리에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니벨이 12월에 역공을 펼쳤던 것에 비해 니벨 공세는 4월에 시행되었습니다. 가을직후의 12월의 눈보다 기나긴 겨울을 거쳐간 4월의 눈이 훨씬 더 큰 지장을 주는건 자명한 일이였으며 안좋은 날씨는 프랑스군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약속된 기습효과에 대해서도 니벨은 놀라울 정도로 자각없이 준비중인 공세에 대해 떠벌려 파리와 런던에서는 니벨의 공세는 대표적인 화두로 떠오를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본래 2월에 펼쳐질 예정이었던 공세를 2개월이나 지연하는 덕에 독일군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예견된 공세에 대해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장병중 한명의 신체에서 작전명령이 소실된 사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좋게 말해 대범한,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모습을 거듭 보여줬습니다.
게다가 조프르에 비해 정치적 역량이 심히 후달렸던 니벨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전초에 (전적으로 조프르의 책임으로 볼 수 있는) 충격적인 패전에 불구하고 168명의 지휘관들을 해임시키고 이후에도 프랑스군을 수월하게 지휘한 조프르와 달리 휘하 지휘관들에게 끌려다닐 뿐 제대로된 지휘권을 수립하지 못했습니다. 지휘권에 워낙 제약이 많아서 불리한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로이드 조지의 계략에 무방비된 상태로 이용당한 점은 쉽게 변호하기 어렵습니다.8
["LE GENERAL NIVELLE, NIVELEUR"
끌어올린다는 뜻의 niveler(영어로 to level)과 니벨의 이름을 합친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참호에 틀어박힌 독일군을 "끌어올린다는" 의미로 한때 대단했던 니벨에 대한 희망을 옅볼 수 있습니다.]결론을 내리자면, 로베르 니벨은 졸장이 아니며 그가 지휘한 니벨 공세(혹은 2차 엔 전투)는 단순한 졸전이 아니였습니다. 니벨은 페탱이 언급했듯이 그전까지 소규모 작전을 위주로 지휘했으며 제2군 사령관으로 베르됭 전투 말기에 역공을 성사했듯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오히려 이러한 소규모 작전에 강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임하더라도 어느정도 지휘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조프르의 흉계와 공격적인 지휘관을 선호했던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e)의 뜻이 맞아 본의 아니게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 시점부터 니벨의 커리어는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정도 니벨을 가이드하며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막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조프르는 정치인들에 의해 미국으로 "파견"나가 쫓겨났고 프랑스군이 연합군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는 덕에 사실상 연합군 총사령관직이였던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니벨이 익숙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도의 정치력을 요했습니다.
여러 제약과 정치인들과 휘하 지휘관들의 견제가 난무하던 상황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지휘가 불가능했던 니벨은 무모하게 무조건의 승리를 약속하며 전의를 이끌어냈지만 2차 엔 전투라는 도박이 실패로 끝나자 니벨이 내뱉었던 48시간드립등은 오히려 칼로 돌아와 그의 몰락에 일조했습니다. 처참한 졸전은 아니였지만 전쟁에 지친 대중과 사병들은 1915-16년에나 행하던 공세와 색다른 승전을 원했습니다. 니벨의 여러 미사어구와 대담한 장담들이 공세에 대한 기대를 한껏 이끌어낸만큼 어느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는 점이 아닙니다.
니벨은 2차 엔 전투의 실패 직후 북아프리카로 좌천당해 1918년에 제10군 사령관으로 복직하고 2차 마른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임으로 악명을 청산한 동료 샤를 망쟁(Charles Mangin)과 달리 1919년의 개선행진에조차 참여하지 못한채로 쓸쓸히 잊혀져갔습니다. 총사령관으로는 부적절했지만 1917년 시점의 프랑스군 총사령관직이 독이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는 점과 전술가로는 상당히 유능했던 니벨이였던만큼 그의 뻘짓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니벨이란 이름과 니벨 공세는 패전의 상징으로 전락한 상황은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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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First World War』 by. John Keegan pg. 117
2. 『The Great War: 1914-1918』 by. Cyril Falls pg. 193-194
3. 『The French Army and the First World War』 by. Elizabeth Greenhalgh pg. 176-177
4. 『War of Attrition: Fighting the First World War』 by. William Philpott pg. 265
5. 『The French Army...』 pg.207
6. 『The French Army...』 pg. 197
7. 『The French Army...』 pg. 197-198
8. 『The French Army...』 pg. 198-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