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수첩의 마지막 장을 넘기다 어느 여름의 메모가 생각났다. 소박한 소망과 거창한 목표, 사춘기의 찌꺼기 같은 하찮은 허영이 부끄러운 글씨로 씌어져 흰 여백을 메우고 있었다. 새벽이 밝도록 지난해를 곱씹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거리에 나섰다. 게으름에 메우지 못한 목록을 지워내고 싶었다. 몇 해 묵어 익숙한 후드와 청바지를 벗고 옷장 깊숙한 모서리에 밀려있던 까만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잠바 대신 코트를 꺼내 단추를 달았다. 어린 화장도 짙게 둘렀다. 성탄을 맞는 거리가 네온사인을 둘러 도시를 감싸 밤거리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서른 해는 묵은 디스토피아 영화의 한 구절처럼, 지금 막 전광판에 떠오른 매혹적인 입술의 광고처럼 도시가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이끄는 점원도 길거리에서 사랑 했나 우는 연인도 도무지 이 세상 것 같지가 않았다.
낯익음과 낯섦 속에서 한참을 걸었다. 새벽녘 최루탄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지하도에는 집 잃은 사람들의 욕설이 가득하고, 문 닫은 지하 상가의 진열장에는 팔릴 것 같지 않은 옷들이 먼지 앉아 있었다. 허나 지하철 몇 정거장을 더 지나 닿은 거리에는 잊혀진 줄 알았던 젊음이 모여 굽이쳐, 정처 없는 이방인을 놀래 키는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고? 눈 빛이 하얘 밤이 잊혀졌다고 했다. 그 거리에는 미처 갈무리 하지 못한 젊음과 그에 꼬리 밟힌, 매혹당해 미처 떠나지 못한 삶이 얽혀 빛나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 함박웃음을 달고 양팔을 벌린 청년, 환한 미소의 연인들, 그 말 한 마디로 길 가던 발길을 붙잡는 재담꾼, 그 재기발랄함과 찬란함을 넋 잃고 바라보는 나. 그 거리에서 나도 너와 한때 그랬었지 하며 문득 웃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도리질 친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과거를 떠올리며 웃게 되었을까. 대체 언제부터 내일을 꿈꾸지 않게 되었을까. 왜 어렸던 우리는 스무 살을, 서른 살을 꿈꾸었지만 그 이후를 꿈꾸지는 않는 것일까.
있잖아 말이다. 이건 너에게 건네는 말이다. 등에 짊어진 가방이 무거워, 어깨 끈이 몸을 짓눌러 쓰라린 너에게 하는 말이다. 나도 그랬었다. 나도 그 가방이 무거워 도리질 쳤더랬다. 그 짐을 함께 들어 줄 수 없어 미안하다. 울컥 치솟는 분노가 슬퍼 외면하는 것이 죄임을 안다. 절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외치던 어린 나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 나를 순수한 놀라움으로 바라보고 기억해주는 너에게 언제까지나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네가 혐오하던 어른이 되어버린 나를 부정하지도 않겠다. 너는 먼지 쌓인 책꽂이 사이의 편지처럼, 잊고 지내다 문득 발견한 부조리한 기억이다. 손 내밀 줄 몰라 이를 어찌해야 좋을까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멍청한 놈이다.
반은 웃음으로 반은 눈물로 밤길을 걷는다. 이 뼈 마디 마디에 우리가 새겨져 있는데 나는 도무지 드러낼 방법을 모르겠다. 이 살을 버혀내어 세상에 드러낼까, 찬 바람 살갗에 스쳐 아프면 비명이라도 지를까, 당췌 우리 이 아픔과 쓰라린 기억을 어찌하면 좋을까. 파고드는 걸음이 무거워질수록 너희들은 천진하게 빛나고 있다. 네 젊음이 웃으며 무심히 세상을 지나쳐간다. 그 앞에 이 겁쟁이는 또 다시 십여 년 전의 그 날처럼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보시오 거기 어르신, 어찌 해야 하오. 어찌 이 긴 긴 세월을 견디셨소. 저 젊음과 썩은 죄책감 사이에서 삶을 줄타기하며 어찌 그리 웃고 계시오. 끝끝내 이어지고 메워지는 삶과 삶의 경계를 고집스레 살아내면 되는 것이오? 대체 어떤 고집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오. 나는 도저히 모르겠소.
그렇게 문득 외로움이 무덤을 파헤치고 고개를 내민다. 발걸음이 깊숙한 심연에 닻을 내린다. 아무런 풍랑도 일지 않지만 갈 곳을 모르는 탓이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다. 그냥 거기에 있다. 낯선 술집에 들어가 술 한 잔을 시킨다, 모스코 뮬. 취기가 오르면 이 허전함이 가실까 허튼 도망을 해 보지만, 입술에 닿은 얼음이 깨져 날카롭게 귓가를 후비고, 찢어진 고막 사이로 네 기억이 스며든다. 정말이지 달아날 곳이 없다. 너무하지 않은가요, 선생님, 사막의 낙타를 꿈꾸던 소녀가 이젠 마음 놓고 술 한잔 조차 마실 수가 없어요. 외로워 도망치듯 마음 기대 술 한 잔 할 데가 없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 천 원어치를 샀다. 붕어빵이 너무 먹고 싶은 데 먹을 수가 없었던 시절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한 마리 입에 물고 가다 일부러 포장마차로 돌아섰다. 맛있어요 사장님, 아이구 고맙습니다. 사장님이 웃는다. 그런데 정말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누군가 즐거워하면 내가 이 도시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 것 같아서,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게 될 것 같아서요. 참 이기적인 의미 부여지요.
이제 노새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설원을 지나 국경을 건너 몽롱한 꿈의 약을 배달한다. 놓쳐버린 젊음을 애써 지우려고 술잔 가득 보드카를 붓는다. 이따금 입술에 닿는 생강과 라임의 맵고 씁쓸한 향이 돌아서는 노새의 어깨 끈을 옥죈다. 노래하세요, 이 설원이 불타버릴 때까지. 외면하지 말아요, 저 타오르는 젊음을. 아직 네가 살아내어야 할 삶들을 지우지도 밀어내지도 말고 무거운 걸음일지언정 멈추지 말아요.
그게 네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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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삶을 믿지 않을지라도, 소중한 여인에게 환멸을 느끼고 사물의 질서에 대해서 환멸을 느낄지라도,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저주받은 악마의 혼돈이라는 확신이 생길지라도, 그런 환멸이 무섭게 나를 내리쳐도 나는 살고 싶습니다. 이 잔을 입에 댄 이상 절대로 입을 떼지 않을 겁니다. 나의 젊음이 온갖 환멸과 혐오를 압도할 겁니다. 내 안의 광적이고 점잖지 못한 욕망이 절망을 이겨낼 겁니다. 욕망보다 강한 절망은 없으니까요. 그래 봤자 내가 갈 곳은 무덤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무덤입니다... 그렇게 참으로 오랫동안 세상 전체를 상대로 입을 다문 채 말을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기나긴 장광설을 지껄여댔습니다. 그것은 젊은 미숙함과 젊은 허영심에서 나온 젊은 신경질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지금까지 이리로 이끈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급회전하여 완전히 혼자 새로운 미지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한 순간, 많은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의 정체를 규정지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