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에 계신 분들 중 새로운 장르를 찾으시는 클래식 음악 청취자이시거나 아니면 가벼운 instrumental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찾고 대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모두가 그러신 것은 아니겠지마는, 저는 늘 새로운 음악을 찾고, 익숙한 곡의 새로운 연주를 찾고, 그러다가 다시 애청하던 곡으로 돌아오는 도돌이표같은 행동으로 음악 감상으로 쓰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요리로 따지자면 익숙한 요리지만 신선한 레시피로 기똥찬 맛을 낼 수 있을만한 맛집을 찾아 헤매거나, 자주 가는 단골 레스토랑에서 이제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요리에 도전해보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러한 시도의 절반은 늘 썩 만족스럽지 않거나, 아니면 실망스러웠던 경우가 절반이 넘었습니다. 예를 들어 탕수육과 볶음밥이 맛있어서 이거 두 개만 시키던 집에서 팔보채를 시켜봤더니 별로더라… 아니면 짬뽕 맛집이라고 해서 가서 고속 버스 타고가서 줄 서가며 먹어봤는데 그렇게 맛있진 않더라… 이런 경우처럼요. 그러다보니 입맛은 점점 보수적으로 변했고, 새로운 맛집은 늘 시도해보기 전에 검색부터 먼저 해보고, 그나마도 추천을 받은 경우에만 발길이 떨어지고, 가보더라도 추천받은 메뉴만 시켜보고. 시간을 더 이상 뺏기는 것에 망설여지다보니 어느 샌가 그렇게 찾는 음식만, 찾는 곡만 선호하게 되었네요. 음악도 비슷했습니다. 어딘가에서 짤막 한 마디로 툭 던져진 ‘어느어느 작곡가가 좋다더라’, 이런 꾐에 넘어가서 도전해봤다가 별로라서 더 다른 곡들에 도전하기 망설여지고, 이런게 되풀이되다보니 더 가면 보물이 있을 것도 같은 그 문턱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냥 되돌아서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고 유튜브라는 참 좋은 매체가 있어서 정말 마이너한 작곡가의 곡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 들어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좀 마이너한 장르, 더 나아가 제 3세계 음악에 도전해보려면 CD로 몇 만원씩 투자해야했고, 들어보고 취향이 아니라서 후회하는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경우 이런 일이 훨씬 덜하긴 했습니다. 여느 감상실을 가보면 CD나 DVD, 아니면 당시에 흔치않던 SACD로 꽉 채워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한 번 쯤 시간을 내서 몇 곡씩 신청해서 들어보거나, 아니면 DJ의 안목을 믿고 그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곡들이나 연주들로 귀 호강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신청이 많은 곡들 - 예를 들어 파헬벨 캐논 - 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다소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에서 조금 벗어난 장르를 도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크로스오버 음악, 내지는 퓨전 음악이라 불리는 장르들은 클래식 음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로 분류 외 취급을 받는 일이 잦다보니 자료 자체가 풍부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가끔은 이들을 어느 장르로 분류해야하는지에 관해서도 종종 토론 내지는 말싸움이 일어나곤 했고요. 더군다나 크로스오버 음악은 단순한 장르의 퓨전을 넘어 조화로움과 참신함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이건 작곡가의 역량에 많이 달려있다보니 그 새로움만큼이나 실패확률도 컸고요. 여기서 좀 변명을 하자면, 제가 고전을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왜려 사랑하고요. 단지 새로운 맛집을 찾는 이유와 비슷하달까요?
이런 이유에서 저는 몇몇 장르를 융합한 크로스오버 장르와 작곡가들을 몇 분 - 그렇지만 서로 간에 공통점은 없는 -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이 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 대중적 인기를 얻으신 분들이고, 재미있는 곡들을 많이 쓰신 분들입니다. 다만 저와 비슷한 취미를 가지셨거나 아니면 전문가 분들께는 이 분들이 전혀 새로운 작곡가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문단에서 밝힌 이유대로 이 글은 이러한 크로스오버 음악에 어느 정도 공감하시는 분들을 찾고자 쓴 글이고 더 나아가 대화 및 정보공유를 목적으로 한 글이기에,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제 글에서 적절하거나 혹은 널리 쓰이는 한글 발음을 찾기 어려운 경우 인명의 경우 원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니콜라이 카푸스틴 (Nikolai Kapustin)
니콜라이 카푸스틴 (풀네임: Nikolai Girshevich Kapustin)은 1937년 구 소련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한 러시아 피아니스트입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사사한 Avrelian Rubakh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Alexander Goldenweiser로부터 배웠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경험으로부터 고전 클래식 음악에 재즈의 기법을 사용하는 시도를 많이 보여왔고요. 그리고 1950년부터 Juri Saulsky의 Central Artists’ Club Big Band라는 빅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고요, Oleg Lundstrem이라는 구 소련 재즈 음악가의 재즈 오케스트라와 함께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후의 행적은 주로 작곡 활동과 본인이 작곡한 곡들의 연주 (그나마도 공개 장소에서의 연주가 별로 없는)로 확인이 되고요.
토카타 Op. 8 - 위에서 말씀드린 Oleg Lundstrom의 밴드와 순회 공연을 하던 시기의 연주입니다.
소련에서의 빅 밴드라니, 신기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재즈는 1900년 초에만해도 유럽에 많이 전파되었고, 실제로 유럽에서 작곡된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재즈의 느낌을 살린 곡들도 얼마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카푸스틴도 그런 경우에 속한 음악가가 아닐까 싶긴 한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소련에서 재즈를 연주하거나 어디에 결목시킨다는 발상은 갈 수록 탄압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구 소련의 폐쇄성 덕택에 카푸스틴도 왕성한 작곡 활동에 비해 구 소련 붕괴 전까지 서방에서는 많이 알려져있던 작곡가는 아니었고요. 카푸스틴 작품의 레코딩이 예전에는 많지 않았는데, 초기에는 그의 곡을 꾸준히 연주해 온 Ludmil Angelov와, Hyperion에서 나온 스티브 오스본과, 마크 앙드레 아믈랭의 레코딩이 대표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믈랭의 연주로 카푸스틴을 처음 접했습니다). 다만 카푸스틴 본인도 피아니스트이면서 본인이 작곡한 곡들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화려하고 기교넘치는 아믈랭의 연주보다 정확한 템포의 카푸스틴 본인의 연주를 선호하는 청취자 분들도 많습니다.
아믈랭 연주가 참 좋은게 많은데 저작권 때문인지 유튜브에서 찾을 수가 없네요...
카푸스틴이 작곡한 곡들은 일본에서는 꽤 많이 레코딩이 된 편이고 (예를 들어 Masahiro Kawakami), 나름 꽤 사랑받는 작곡가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 라운드에서 변주곡 Op. 41을 연주했었고, 여러 곳에서 카푸스틴의 곡들을 자주 연주해 주신 덕분에 더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변주곡 Op.41 연주.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실황입니다.
글이 더 길어지기 전에, 카푸스틴을 크로스오버 음악가라는 제목 아래에 놓은 이유를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카푸스틴은 본인이 부정했듯이 재즈 음악가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재즈의 기법을 접목시킨 클래식 음악 작곡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카푸스틴은 본인의 음악에는 즉흥적인 연주가 전혀 없는데 이러한 음악을 재즈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일화가 있지요. 또한 카푸스틴은 본인에 작품에 늘 opus 넘버를 부여하고, 협주곡, 소나타, 연습곡, 전주곡, 3.4중주와 같이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카푸스틴을 단지 클래식 음악 작곡가라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의 작품 전반에는 재즈의 향취가 곁들어져 있고, 이들은 고전 클래식 작법 아래 공들여 나온 작품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카푸스틴의 음악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놓는 것은 다소 부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로스오버라는 명칭이 다소 상업적이거나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절대 카푸스틴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온 것은 아니며, 그의 음악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 시도에서 온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카푸스틴의 곡들은 재즈처럼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패시지가 많고 짧은 곡 안에 여러가지가 빠르게 변하는 느낌의 곡들이 많습니다. 가끔은 그런 점이 고전 클래식과 많이 달라서 어색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잦지만 몇몇 곡의 경우 이런 것들이 잘 조화롭게 이루어져서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인 추천 작품
1. 8개의 피아노 연습곡, Op. 40 (8 Concert Etudes for Piano, Op. 40)
총 여덟개로 된 연습곡 모음인데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주곡 Op. 41과 함께 제일 연주 버전이 많습니다.
손열음이 연주한 6번, 7번, 8번입니다.
아래는 카푸스틴 본인이 연주한 1번과 6번입니다.
No. 1 "Prelude"
No. 6 "Pastoral"
2. 변주곡 Op. 41 (Variations, Op. 41)
카푸스틴 본인 연주입니다. 위에 링크된 것은 손열음 연주입니다.
3. 'Aquarela do Brasil' 패러프레이즈, Op.118 (Paraphrase on 'Aquarela do Brasil' by Ary Barroso Op.118)
브라질에서 유명한 가곡인 'Aquarela do Brasil'를 편곡한 피아노 곡입니다. 재미있는 곡입니다.
4. 피아노 소나타 2번, Op. 54 (Sonata No. 2, Op. 54)
아믈랭 연주입니다. 피아노 소나타가 20번(!)까지 있는데 2번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5. Elegy, Op. 96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곡입니다.
5. 신포니에타 Op. 49 (Sinfonietta Op. 49)
4악장으로 된 재미있는 곡입니다. 1악장입니다. 마사히로 가와카미 연주
6.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지 길레스피의 만테카 패러프레이즈, Op. 129 (Paraphrase on Dizzy Gillespie's Manteca for 2 Pianos Op.129)
길레스피의 만테카를 피아노로 편곡한 곡입니다.
7. 두 대의 피아노와 퍼커션 협주곡, Op. 104 (Concerto for 2 Pianos and Percussion Op. 104, mov.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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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응이 좋으면 다음 글도 써볼까 합니다. 크로스오버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클로드 볼링을 다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도 추천해주세요.
그리고 해외에 거주해서 유튜브 링크가 잘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안 나오는 영상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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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스틴 좋죠. 전 재즈에뛰드 1번, 3번, 7번, 8번을 제일 좋아합니다. 음악만 듣다가 2007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재즈 에뛰드 악보가 있는데 한국 들어왔다는 소식에 바로 가서 대한음악사에서 구매한적 있는데 옛날생각 나서 반갑네요^^
전 카푸스틴 할배 연주 빼고 전부 해석이 부족한 느낌을 심하게 받습니다. 일단 전부 클래식스러운 페달 과다에 재즈 특유의 아티큘레이션을 제대로 표현 하지 못하더군요.
글 잘봤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카푸스틴 처음 접한게 2005~2006년쯤 된 것 같아요.
사실 아믈랭 음반으로 처음 들어서 카푸스틴이 직접 연주한 곡들 들을 때마다 좀 낯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계속 들어보니 말씀하신대로 카푸스틴 본인이 연주한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느낌이 더 들더군요.
특히 아믈랭은 너무 기교가 넘친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좋아는 하지만요...
와우 ,,, 저는 기본적으로 가사가 있는 음악을 싫어합니다 ,,,좀 많이요 .
그리고 음악이라고 하면 대중음악을 생각했고 대중가요들을 싫어하므로 음악을 거의 안들어 봤습니다 최근까지는요
최근에 위플레쉬라는 영화와 클래식음악을 조금씩듣다보니 "아,, 가사없는 음악들도 많았지 " 하며 듣고있습니다 ,
추천해주신거 들었는데 너무 좋아요 , 전음악을 잘 모르니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은 모르겠지만 ,, 리드미컬하고 상큼? 합니다 ,,기교도 있고 ,,좋아요 진짜 ,,, 유투브에서 다른곡들 더 찾아봐야겠어요 ,,너무 좋아요 ,추천감사합니다,
올려주신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변주곡 Op.41 연주 영상은 갈라 연주가 아니라 콩쿨 본선 실황 연주입니다. 제가 손열음씨를 좋아해서 유투브로 콩쿨 실황 중계를 해줬기 때문에 새벽에 보곤 했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너무 좋은 곡에 황홀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떨리고 진지하고 묵직한 콩쿨 중에 갑자기 봄바람 부는 느낌이 들더군요. 연주 후 관객들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콩쿨이 끝나고 카푸스틴 본인이 직접 콩쿨에서 자기 곡 연주해줘서 고맙다고 손열음씨한테 이메일도 보냈다고 하더군요.
저도 저 연주로 카푸스틴을 처음 접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주로 손열음, 아믈랭 등의 연주로만 들었는데 작곡가 본인의 연주도 굉장히 훌륭하네요. 어쨌든 좋은 게시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영상을 쭉 보는데 연주 후 관객 반응이 너무 좋아서 콩쿨 도중 같지는 않고 갈라인가 생각했었는데, 본선 실황이었군요. 본문 글을 수정했습니다.
저도 손열음씨가 연주해줘서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콩쿨 곡에 적합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카푸스틴도 클래식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작곡가라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위에서 답글 달아주신 피아노님 말씀대로 계속 듣다보면 카푸스틴 연주가 가장 좋은 편에 속하는 것 같더군요. 본인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이 많아서 찾기도 쉬운 것 같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아믈랭 연주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아믈랭은 하이페리온 음반이랑, live로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 2번 정도밖에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유튜브에는 아믈랭 연주가 삭제되었는지 거의 보이지 않네요.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