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에서 이수인은 과장의 신분으로 노조에 신청합니다. 그러나 기세좋게 모였던 다른 과장들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였으나 이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회피합니다. 아마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자유롭지는 못할겁니다. 그래서 이수인은 별난 사람이고, 그래서 이수인은 송곳과도 같습니다. 현실은 더 참혹합니다. 이수인같은 사람의 미래는 대체로 끝없이 투쟁하다가 지저분한 법률앞에서 몇몇의 복직을 이뤄내고 본인의 목을 치는 대신 손해배상청구를 막는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혹은 징역을 살기도 하죠. 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온 징역당해본 만화? 구치소에 있던 만화? 를 보면 징역이라는게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가깝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노동쟁의는 세발쯤 양보하고, 한발쯤 얻어내며, 양보하는 세 발자국에 대한 책임은 수뇌부가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송곳은 부러집니다. 현실에서는 노조를 혐오하게 되거나, 인생이 망가지거나, 정신병에 걸리거나, 가정이 파탄나거나. 그런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훨씬 적습니다.
사실 좀 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한다면 이러한 비극적 결말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건 사내 권력투쟁과도 맞닿아있지만 동시에 사회에 대한 사회노조적 투쟁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사회체제 안에서 노조란 단순히 당사자의 이익집단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한 기업의 혹은 한 산업의 노동조건은 다른 산업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며 크게는 다른사회, 이를테면 생산기지를 세워둔 타 국가들의 노동조건까지 흔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와 합쳐졌을때 '사회적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능 역시 갖게 됩니다. 왜 민주노총이 굳이 비정규직 노조와 알바들의 권리를 같이 외치는지, 왜 노조들의 연합이 정치적 선언을 행하는지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정하는 전선들은 정치에도 정규직에도 비정규직에도 알바들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합은 끊임없이 연대를 요구합니다. 규모가 커지는 것만이 잔혹한 미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PGR이니 스타크래프트나 롤을 예로 들어본다면, 연대가 강하고 규모가 큰 노동조합은 멀티가 많은 저그, 혹은 CS수급이 높은 챔피언과 같습니다.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겠죠. 연대가 약하고 규모가 작으면 장기적으로 갈 수록 불리하다는 말이 됩니다. 반면 기업은 꽤 일정합니다. 노조의 규모가 크면 좀 더 버티기 힘들지만, 시간은 대체로 그들의 편입니다. 물론 노조의 쟁의에 의해 기업이 힘들어지는건 맞습니다. 그러나 운좋게도, 기업의 내구도는 훨씬 강합니다. 대체로 그렇습니다. 몇 달의 쟁의기간동안 노조는 대체로 생활비 문제와 가족문제등을 무시할 수가 없지만, 기업은 별 일 없이 불법 대체고용, 회유, 하청등을 통해 생산성을 어느정도 유지합니다. 이걸 엄격하게 금지해야할 국가는 대체로 잘 모르는척 방관하지만, 쟁의를 막는데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방관하는 이유는 특별히 기업의 편을 들어준다거나 정경유착의 개념이라기보단 그런걸 잡는쪽이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절차를 갖기 때문인 반면 노조를 압박하는 것은 훨씬 더 쉽고, 대중에게도 인정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이제까지는 단순히 '생업이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노조와 연대할 수 없다거나, 혹은 아예 관심도 없거나 적대적이라거나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의 원인이 곧 개인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노동자의 구조적 파편화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 내면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 투쟁의 장소에 '능동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것을 결정합니다. 이제 글 제목을 다시 읽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라인이라 말을 씹기가 좀 그래.'
'우리'라는 개념은 하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소속된 개인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개인이 우리로 포섭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통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한민족일까요? 나랑 삼성전자 이건희네 가족은 도무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공유합니다. 같은 땅덩이에 살아서? 같은 국경에 살아서? 한 민족의 피를 공유해서? 다양한 공통점들이 있을겁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인이니 백제인이니 신라인이니 싸웠을 테지만요. 어쨌거나 우리는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큰 차이를 갖고 있음에도 하나의 '우리'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사람인데. 그러나 정작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개인의 삶을 미시적인 부분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하면 그건 아닌것 같습니다. 적어도 삶의 노동조건보다는 하위에 있을겁니다. 월급만큼 큰 팩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 라인' 역시 비슷합니다. 정부장과 과장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라곤 고작 현장 출신 정도입니다. 이 말은 그럴듯하면서도 모순적입니다. 우리가 같이 똥개밭에 굴러가며 개고생했으니 모른체 안할거라는 기대감과, 내가 저 사람의 부당한 구정물을 함께 삼키기 위한 당위에 가깝습니다. 현실에서 이런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선배니까, 우리 과니까, 우리 회사니까. 그래서 정체성의 언어는 어떤 옳음보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갈등합니다. 개인에게 내재된 도덕률 역시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규정하는 조건들이 있다면 사람은 능동적으로 정체성을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이지 '옳음'이 아닙니다. 합리성이 잉태하는 지점들 역시 대체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게 진짜 '우리'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저런 우리의 정체성은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 어떤 조직 내지는 이념에 동화된 '우리'가 되고나면 다음에는 실존적 규정들 안으로 몸을 던져야 합니다. 이미 정체성의 전환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진짜 우리가 되기 위해 행동양식을 바꿔야 합니다. 처음에는 노조를 깨라는 말에 마지못해 동의하다가도 나중에는 정부장 혹은 그 이상가는 탄압가로서 '라인'을 타야합니다. 정부장의 마음에 들기위해, 정부장의 '우리'가 되기위해. 우리가 되기 위해 던진 또 다른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잘 돼야 합니다. 성공만이, 생존만이 그런 께름칙한 기억들을 합리화 시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언어란 단순히 합리화의 도구로서 쓰이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이후의 모든 행동양식을 결정지어버리는 이념적 토대에 가깝습니다. 끊임 없이 일어나는 내적모순은 '우리'라는 안정감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집니다. 다들 군대를 다녀오셨겠지만, 이런 원리가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노조 역시 또 하나의 우리임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노조의 우리는 훨씬 불확실합니다. 모이면 정부장보다 강한게 분명한데, 거기까지 혹은 그 이상까지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나 불명확하고,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조가 갖는 이미지와 활동 역시 본인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 것 같은 께름칙함을 남깁니다. 썩 괜찮은 정규직 노동자에게 노조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력생존이 가능하고 나의 주체적 삶의 결정권을 공동체적 결정을 통해 위협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노력충은 그래서 생산됩니다. 자신이 '우리'로서 기능하기위해, 이 사회의 정상성있는 '우리들' 안에 속해있음을 굳게 믿기위해 자기착취의 길을 가혹하게 걷고, 그 생존의 방식을 믿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공동체적 정치결정을 혐오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태한 자들의 떼쓰기에 지나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 똑같은 인간인데 나만큼 희생했냐고 외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을 투여했는데 이정도의 차이, 차별을 누리지 못하는게 말이 되냐는 근본적 욕망이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이 원동력에 윤활유를 뿌려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내가 속한 우리가 무엇인지, 우리 라인이 갖는 의미가 대체 뭔지, 그리고 자신을 규정하는 많은 조건들. 이를테면 '민족' '성별' '계급' '지역' '부' 같은 커다란 공통된 조건들이 어떤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과 조건들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우리'라고 느끼는지, 왜 나와 같은 계급을 착취하기 바쁜 상대들을 하나의 공동체내에 존재한다고 여기는지, 왜 이 지역의 사람들과 내가 동일시 되어야 하는지, 왜 내가 이 계급의 사람들과 공통된 존재라고 규정될 수 있는지. 어쩌면 그 안에 내재된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발견하는 순간이 개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 아닐까요. 내가 그들이기를 희망하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뒤틀어 믿는 것은 종교에 가까우며, 내가 가진 삶의 조건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어떤 것이 과연 내가 지금 위치해 있는 정체성인지, 그리고 이 정체성을 직면했을 때 과연 어떤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한번 쯤 고민해 보는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마 사회의 구조를 바라보는, 구조를 구성하기 위해 짜여진 이데올로기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만, 허위로부터 또 다른 주체적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것이며, 많은 선동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쥐고 다른 것들을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회적 시민으로 기능하기가 한결 편해질 것입니다. 비록 생존이 달린 경제적 조건들이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편에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지에 대해 이수인이 될 수도 있고 정부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쪽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느쪽이 더 옳거나 정상적인지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쪽이 더 비극적이냐고 한다면 옳은 쪽이 아직은 더 비극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우리'의 허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구체성을 명확히 한다면, 그래서 하나의 편안한 회의주의와 절망으로부터 거짓을 인식한다면, 그래서 희망적이게도 이수인 같은 사람이 늘어나서 세상이 더 불편해지고, 민주주의가 더 짜증나고 귀찮은 체제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비극적인 인물의 위치는 바뀔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조는 사회적이어야 하고, 시민들은 정치적이어야 하며, 이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좀 더 분석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결정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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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흥했으면. (2) 드라마 특유의 긴템포가 부담스러워 풀하우스 이후 드라마 완주한적이 없는 제가 유일하게 정주행을 시작했습니다..
미생조차 중간부터 드라마 특유의 각색된 어색함을 저 스스로가 못 이기고 끊어버렸었는데 송곳은 이런 것들을 지키면서 끝까지 흥했으면 하는 과한 욕심이 있네요. 화이팅!
제겐 글자밥 청춘님이 말씀하신 정체성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일종의 휴리스틱...민감도 문제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 검사처럼요.
길게 쓰기에는 그리 정련된 생각들이 아니라 조금 조심스럽지만, 자신이 세운 내적 기준과 외부의 현실은 언제나 동치되지 않고 갈등과 파열음을 일으키죠. 이때 자신의 기준에 대해 높은 민감도를 가진다면 그 파열음에 주목하고 끊임없이 분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낮은 민감도를 갖고 있다면 현실에 쉬이 타협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가장높은 민감도를 설정한 뒤 바이러스 검사를 시행하면 오래 걸리듯이, 개인이 자신의 기준에 대해 높은 민감도를 가지면 필연적으로 피로감을 수반할테고(본문에서 밝힌 노조 간부들의 모습들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지점에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제한된 합리성 혹은 합리모델에 가까운 판단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극복하고 개별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수복할 수 있겠죠. 정말 그랬으면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