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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5 06:23
이분 유튜브채널 정말 재밌죠. 새 비디오 나오는게 가장 기대되는 채널입니다. 첫 비디오로 무려 봉준호의 마더를 다뤄주시기도 하고.. 같은거 보시는분 만나서 반갑네요!
15/10/15 06:24
예전에 PTA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나온 구조적 symmetry에 대해서도 분석하지 않았던가 싶은데, 삭제된 것인지 사라졌더라고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15/10/15 06:40
움직임에 대한 설명은 정말 좋고 많이 배웠는데요
음 저는 중간에 어벤저스의 장면이 까여야 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영화내내 시종일관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에서 필 콜슨의 죽음을 애도하는, 몇 안되는 감정에 집중해야 하는 장면이잖아요? 의도적으로 움직임을 절제하고 단조로운 화면속에서 어벤저스의 슬픔, 분열, 무기력을 표현해야 하는, 플랫하다고 지적하는데 플랫하기에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라고 봐요. 이 영화는 플랫하지 않은것들로 이미 넘쳐나니까요. 그렇다고 뭐 이게 어벤저스의 명장면이냐 뭐 그런건 아니지만 까일만한 장면도 아니라고 봅니다. 굳이 이 장면이 제게 인상깊었던 이유를 꼽자면 그 토니 스타크가 끝끝내 아무말 안하고 듣기만 하다가 나가는 장면이죠.
15/10/15 07:22
리뷰어가 해당 장면과 비교 대상으로 제시한 장면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무라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헤이아치라는 동료 사무라이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인데요. <어벤져스>든 <7인의 사무라이>든 양 장면이 수행하는 기능은 동일합니다. 적과의 싸움 과정에서 동료가 한 명 죽고, 동료의 죽음 때문에 모두가 사기가 떨어지고 완전히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죽음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며 분노와 동질감을 느끼고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양자가 똑같이 슬픔과 분열과 무기력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든 <어벤져스>든 영웅들의 활약을 다루는 히어로물적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 실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서부극 및 많은 히어로적 작품들에서 패러디 되었죠 -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비교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리뷰어가 두 신을 대조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때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바람의 흐름과 키쿠치요의 감정표현, 주민들의 동작, 이후 키쿠치요가 깃발을 흔드는 장면으로 넘어가며 비애감과 비장함과 웅혼함과 전의를 표출하는 반면, 어벤져스는 어떤 식으로든 이렇다할 정념들을 보여준 것이 없어 밋밋하다는 것이 리뷰어의 지적인데, 제 생각도 리뷰어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필 콜슨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어벤져스를 하나로 모으게 된다는 이후의 서사를 고려하더라도, 해당 장면에서 굳이 그런 강한 정념들을 회피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그에 걸맞는 무게감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지요. 적절한 감정적 동력이 등장 인물들에게 주어져야 블록버스터적인 액션과 파괴가 더 탄력을 받기도 하고요. 표현의 절제를 통해 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해당 장면이 딱히 그것을 의도한 것 같지도 않고, 설혹 의도했다고 한들 절제를 통한 풍부함이 전달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어벤져스에서 저 이후 이어지며 전투의지를 고조시키는 장면으로 넣은 것이 호크아이와 블랙 위도우의 신변잡기 대화나,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의미없는 말싸움 하다가 말하다보니 하나되는...뭐 그런 것들인데, 그런 것보단 저런 게 낫다 싶군요. 물론 그냥 플랫하게 넘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만,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지적은 충분히 유의미하지 않나 합니다.
15/10/15 08:14
결국 어느 정도 선에서 완벽성을 타협하느냐겠죠.
어벤저스의 장면이 나쁘진 않습니다만 전형적이고 습관적인 샷들로 구성이 되어있죠. 말씀하신대로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인물... 같은 상황도 어딘가에서 많이 접해본 클리셰같은 느낌이 있구요. (저는 한국 일일드라마에서 많이 봤네요.) 단, 토니 스타크가 함으로써 특별해지는 면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마치 예술고전처럼 보이지만 7인의 사무라이는 당시의 블록버스터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신기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오늘날의 루카스, 카메론급의 대형 영화 감독이었구요. 예산도 당시 기준 어벤져스급으로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7인의 사무라이의 거의 모든 컷들은 철저하게, 집요하게 연출되었고, 감독은 스크린 위의 작은 효과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돈을 썼죠. 그 결과 요즘에도 보기 힘든 귀중한 샷과 구도, 영상 표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끊임없이 제작사/투작사를 상대로 영화에 투자된 돈과 관련되어 투쟁을 하다시피 살아야했구요. 어벤져스가 굳이 까여야 될 이유는 없지만 7인의 사무라이 앞에서는 초라해지는게 사실입니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지금의 표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건 최소한의 감정 전달을 위해 극도의 안정적인 연출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히어로물 중에서도 특히나 어벤저스 시리즈가 그러한데,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스크린 내의 표현이 마치 감독의 개성은 거세된 것처럼 기계적이고, 안전지향적인 부분들이 많습니다. 집요하게 완벽성을 추구하고 그런 치밀한 감독의 노력과 영화의 촘촘한 결을 발견할때 관객이 느낄수 있는 희열도 영화를 즐기는 여러가지 재미 중 하나인데, 어벤져스는 그것과는 거리가 좀 있죠. 똑같은 블록버스터 급 영화에서 동일한 상황인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키라의 장면 연출은 감탄할 만한 것이죠.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라노벨이나 양판소와 문학을 비교할때 라노벨이 굳이 까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표현력의 깊이라던가 폭에서 아쉬운 부분이 생길수는 있겠죠.
15/10/16 12:26
굳이 어벤져스를 변호하자면, 두 작품은 씬과 사건과 장면의 수에서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어벤져스가 정해진 시간을 훨씬 잘개 쪼갰다는 말이고, 따라서 각 부분 부분의 의미는 7인의 사무라이의 한 부분과 비교해 "초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의 두 장면이 시간 상으론 비슷하더라도, 어벤져스의 장면이 의미나 비중에선 훨씬 적(작)다는 뜻이고, 7인의 사무라이에서 저 장면을 관습적으로 연출한다면 영화가 망가질 수 있어도 어벤져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럼 왜 영화를 더 잘게 쪼개느냐 하면은, 그걸 관객이 원하기 때문이죠. 요는, 7인의 사무라이 같은 영화가 현실적으로, 상업적으로는 도태되었다는 겁니다. 공들여 찍는 거야 구로사와만큼은 아니더라도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마는 그래서 얻는 게 잃을 것보다 훨씬 적을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상업영화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더하여, 평론가가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관객들이 날씨나 컷의 배치와 흐름에 그만한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념이 극대화된다"는 건 이론이고, 그 이론이 관객이 느끼는 영화적 쾌감과 이어진다는 근거는 많지 않습니다. 회화로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인데, 관객들은 의미가 가득 실린 과거의 그림들을 지루해하고 고루하고 심지어 촌스럽다고 느끼며 어쨌든 현재는, 직관적이고 미니멀한 작품들이 그려지고 소비되죠. '예술'로 치부되는 회화도 그런데 하물며 영화를 보고 각 장면의 의미를 아로새길 관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장면은 인상만 남기고 지나가야하며, 다음 장면과의 간극이 이를 대체해야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의 뇌리에 남는 건 장면의 세세한 기억보다, 몇가지의 인상과,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간극이란 말이죠. 그게 사실이든 어쩌든, 수많은 영화 연출 서적과 시나리오 서적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영화가 그런 가치에 입각해 쓰여지고 연출되며 제작됩니다. 평론가가 집착하는 '예술성'은, 그것이 위대하다해도 현재가 요구하는 영화와는 괴리가 있다고 봅니다. 고흐의 그림은 여전히 위대하지만 더이상 현대 작가들이 고흐처럼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듯, 7인의 사무라이가 위대하더라도 어벤져스를 그렇게 만들 감독은 많지 않다는 거겠죠. 어벤져스가 7인의 사무라이에 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영화 대 영화도 아니고 장면과 장면을 비교당하며 초라하다고 평가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5/10/18 08:50
'시각예술'이 뭐고 '움직임'이 뭔지부터 설명해주셔야죠.
7인의 사무라이는 무슨 움직임으로 무슨 의미를 만들어내서 그것이 어벤져스와 차별되는 시각예술인가요? (어벤져스와 비교한) 7인의 사무라이의 저 장면은 뭐 그렇게 대단한 움직임이 있는 겁니까? 저 장면도 대단히 관습적인 쇼트 구성인데 말입니다.
15/10/18 11:30
후대에서 선대를 평가할 때 저지르는 전형적인 오류가 바로 선대의 혁신을 보면서 관습적이라고 보는 거죠.
7인의 사무라이로 인해 저런 쇼토 구성이 '관습적인 구성'이 된 것이지, 7인의 사무라이가 관습적인 구성을 쓴게 아닙니다.
15/10/18 14:27
저 장면만 놓고 보자면 당대를 감안하더라도 '관습적인 쇼트'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 장면을 근거로 '7인의 사무라이'를 평가한 적이 없음을 주지시켜드립니다. 따라서 "후대에서 선대를 평가할 때 저지르는 전형적인 오류" 운운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벤져스는 '예술'로 다뤄질 영화가 아닙니다. 스스로 예술을 자처한 적도 없습니다. 더하여 멋대로 영화를 '예술'이라고 정의하시려면 근거가 필요하고, 더구나 '시각예술'이라 못박으려면 모르긴 몰라도 더 많은 반론에 부딪힐 것 같습니다. 많은 영화 연출가와 시나리오 작가와 음향감독과 음악감독이 반발할 것임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어벤져스가 "대화를 통해서만 의미부여가 되는" 작품인지도 근거가 필요합니다. 어벤져스는 시각적으로도 수많은 볼거리와 영화사적 의미를 던져준다는 데에 굳이 동의를 바라지는 않겠습니다마는, 혹 "대화를 통해서만 의미부여를 하는 작품"이더라도, 충분히 좋은 영화일 수 있다는 게 저만의 생각일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위대한 감독도, 컷바이컷이 내러티브나 캐릭터, 하다못해 대사보다 중요하다고 말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에이젠슈타인이면 또 모르겠습니다. 무궁무진한 오류를 본인이 범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5/10/18 14:30
'7인의 사무라이'가 1954년에 발표된 영화인데,
이 영화가 당대기준으로 보아도 이미 관습을 답습하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그 이전의 영화들이 이미 이러한 쇼트들을 관습적으로 다용하고 있었다는 말씀이 될텐데 그런 영화들은 어떤게 있는 지 좀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저도 이 기회에 '무궁무진한 오류'를 벗어나서 공부 좀 해보려고 합니다.
15/10/18 14:37
정작 본인은 이렇다할 근거를 하나도 내놓지 않고 비꼼이나 두세줄 끼적여놓으시면서
이거내놔라 저거내놔라 하시는 게 별 달갑지는 않습니다마는, 장르누아르와 비토리오데시카의 영화를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15/10/18 14:41
파스칼 님// 왜 그렇게 비꼼으로 인지하시는 지 모르겠는데
있었다는 증거는 해당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내놓을 수 있지만, 없었다는 증거는 내놓을 수가 없는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추천 감사드리고 잘 공부하겠습니다.
15/10/18 14:47
KARA 님// 제가 뭘 많이 알아서 댓글을 단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느 영화가 부당하게 평가절하당하는 느낌이었고(그렇다고 어벤져스를 대단히 재밌게 보았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오류 지적에 예민한 터라 곱지 않게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15/10/15 07:14
이 유튜브는 볼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네요. 예전에 성룡 다루던 회차가 정말 감격이었죠.
그리고 많은 평론가가 영화 평론이 아니랴 영상 소설 평론가라는 말씀 정말 공감합니다. 한국의 평단은 내러티브 의존도가 너무 높아요. 영화는 비 내러티브적 요소에서도 이야기를 전달하고, 평론은 그러한 부분을 설명해줄수 있어야 합니다.
15/10/15 20:40
내러티브는 일련의 사건이 가지는 서사성을 말합니다. 스토리(story)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는 내러티브는 언어로 기술이 불가능한 '모든 종류의 서사성 전부를 포함하는 이야기'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내러티브적 요소라고 말했지만 포괄적으로 보면 스타일, 미장센, 조명 등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도 내러티브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비 내러티브적 요소라 하면 이야기와 관련 없는 미장센이나 심지어 잡담같은 대사도 포함 할 수 있습니다. 아예 형식 자체가 비 내러티브적인 다큐 같은 장르도 있지요.
하나 좋은 작품은 내러티브적 요소와 비 내러티브적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호응하며 주제를 심화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구분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고 있습니다. 위 동영상을 예로 들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날씨'라는 요소는 비 내러티브적 요소로 봐야 할지 내러티브적 요소로 봐야할지 매우 애매하지요.
15/10/15 08:50
정말 대단하군요... 좋은 영상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하고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기회 닿는대로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__)
15/10/15 09:57
번역된 동영상이 있고 안된것도 있고
예전에 번역된영상인데 지금보면 안되어있기더 하고 삭제된 영상도 꽤 보이고..... 저작권 문제때문에 그런듯 싶네요
15/10/15 12:14
나름 영화좀 봤다고 하고 싶었던 시절에 고전 흑백 영화 안 보면 안 될 거 같아서 찾아봤었는데 솔직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 말고 재미있었던게 없었슴다.
시민 케인은 그 시대에 그런 완성도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긴 했지만 주제가 영 와닿질 않아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일본 영화들 보면 슬플때가 있음.
15/10/15 18:34
제가 생각하기에 진입 장벽 없이 쉽게 볼 수 있는 고전 흑백 무성 영화라면 <셜록 2세>입니다. 러닝타임 45분으로 짧고, 내용 복잡하지 않고, 유쾌하고, 액션 볼만하고 그렇거든요. 이래서 무성 영화를 만드는 거다 싶었죠.
15/10/16 09:58
정말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란,라쇼몽,들개,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카케무샤, 츠바키 산주로 등등 정말 재밌게 봤네요. 그 중에서 '란'은 이때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색감이 이쁜 영화로 기억에 남네요,
15/10/16 13:49
"영화 리뷰를 문학적으로 하는, 무늬만 영화 평론가이지 사실은 영상 소설 평론가인 이들이 많은데, 그에 비하면 이 리뷰는 아주 예리하게 영화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리뷰라고 봅니다. 영화 리뷰는 이런 식으로 해야합니다."
말꼬리 잡으려는 게 아니라, 영화의 본질을 뭐라고 여기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위의 리뷰가 아주 예리하게 영화의 본질을 통찰하는 리뷰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느 영화과 학생이라면 수도없이 보고 배웠을 내용인 점만은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영상소설평론가'들이 위의 내용을 미처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베르히만 브레송 타르코프스키 하며, 대중이 모를 뿐 오래 전부터 저이상으로 파헤쳐져왔고(구로사와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감독, 영화들인데요), 정성일만 해도 '컷바이컷'만으로 요근래의 영화들까지 거의 분해하다시피 써왔는데, 정작 그런 평론은 대다수 관객들에게 소비되지 않았습니다. 몇몇 영화평론가가 영상소설평론가라고 비난당해야한다면, 영상소설만 만드는 감독과, 영상소설만을 소비하는 관객들도 비난당해야하지 않을까요. 영화를 컷바이컷으로 이해하는 건 의미있는 시도지만, 실제로 영화가 만들어질 때, 과거처럼 그 문제를 씨름하는지 의문입니다. 컷바이컷의 효과는 이론이지 실제 관객이 느끼는 '영화적 쾌감'의 지점과 반드시 동일하지 않으며, 굳이 영화의 요소 가운데 우열을 가린다면, 어느 감독도 컷바이컷을 시나리오나 캐릭터나, 내러티브 위에 두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겠습니다. 영화가 다양한 측면으로 해석되는 거야 나쁠 게 없다해도, 어떤 측면만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고 해서 비난당해야는지 제 딴엔 의문이 드네요. 더구나 그것이 영화와 관객들로부터 비롯되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이와 상관없이 '킹콩'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15/10/16 22:39
해당 영상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특징을 짚은 것에 대해, 여느 영화과 학생이라면 수도없이 보고 배웠을 내용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영잘알들은 수도 없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서사 구조나 캐릭터메이킹 등은 굳이 영화에 대해 몰라도 누구나 일정 수준 파악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입니다. 드라마나 예능만 보는 사람도 머리 조금만 쓰면 그 정도는 하지요. 이처럼, 세상에는 영화를 보는 사람은 무수히 많고, 영리한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이 사이에서 영화의 서사 진행과 인물의 연기 정도만 짚는 무수한 평론들은 아무런 차별성을 띠지 못하지요. 서사구조에 대한 평가는 블로거들 중에서도 탁월한 사람이 숱합니다. 그러니 평론가에게는 아마추어와는 구별되는 전문성을 확보하여 이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당연히 요구되겠지요. 비단 영화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전문가 자격이 없는 것일 테며, 나아가 평론가의 존재의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평론이 소비가 되고 말고는 존재의의를 갖추고 난 다음의 문제이지요.
모든 분야가 다 그렇듯, 영화 평론가의 전문성 역시 직관적이거나 경험적인 명철함과 기민함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영화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전문지知에서 나와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의 고유 영역에 속한 시나리오/연출/촬영/편집/음향 등일 수도 있고, 영화사적으로 형성된 장르적/매체적 관습이나 코드, 패턴일 수도 있겠지요. 이와 같은 전문지가 없는 평론은 아마추어의 평론과 구분될 것이 없을 테고요. 이렇게 전문지를 갖추어서,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을 파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쉬 알기 어렵고 경시하기 쉬운 것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옥석을 고를 수 있게 도와주며, 그로써 사람들의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어야만, 그리하여 영화라는 [매체와 형식 그 자체]의 발전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해야 전문 평론가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평론가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왜 블로거가 아닌 평론가라는 직종이 필요할까요. 소비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범위에서만 행해지는, 그리하여 소비자의 영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조금도 올리지 못하는 그런 평론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요. 그런 평론을 보느니 영화 커뮤니티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요. 그렇다면, 전문가로서의 존재의의를 충족하고 있는 전문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할지 모르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수는 있겠지만, 소수라는 것만으로는 변명이 안 되지요. 그들 각자가 동료들의 뒤로 숨어서는 안 되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하는 전문가니까요. 가령 <버드맨>의 원테이크라는 촬영 형식적 특성이 주제의식과 어떤 식의 호응을 하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통찰해낸 전문가가 몇이나 있는지 의문입니다. 실명이 공개되어 있다는 민감성 때문에 직접 제시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나름 명망 높은 평론가 협회의 자리에서 나오는 분석임에도 소수의 주도자 빼고는 작품의 변죽을 울리는 경우도 온라인 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https://cdn.pgr21.com/?b=8&n=55545 글에 나오는 김영민의 일갈을 떠올리게 했죠. [...결코 적지 않는 수의 문사들은 유독 학술적 대화에 만연한 오해와 오인 속에 덤으로 묻힌 채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를 손쉽게 숨길 뿐 아니라, 아예 왜장치듯(쓸데없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실없이 떠벌리기만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화술에 대한 몽테뉴의 고전적 권면과는 달리, 강연자를 위협하는 정신의 힘을 만나는 쾌락(!)은 점점 드물어만 간다....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R.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문학적/코드적 비평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커뮤니티의 매니아들이 더 열심이죠. 예컨대, PTA의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왜 토마스 핀천의 원작과는 달리 솔리테쥬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게 되었는지, PTA가 소설을 영화화하며 어떤 목적의식을 가졌는지에 대해 짚은 전문가는 한국에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창동의 <시>를 두고도 대부분 ‘천박한 세상 속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의 순수함을 강조한 작품’이라는 식의 패턴을 보였는데, 특정한 대상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의 잔인성이라는 이면에 대해 통찰한 전문가가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고요. 해외의 포럼에 있는 아마추어들에게서조차 곧잘 나오는 통찰들이 씨네21 같은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위의 영상이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해 연구는 많이 되어 있지요. 서점 가도 관련 서적도 많고, 영화학 서적 치고 구로사와 아키라 한 번쯤 안 거치고 넘어가는 일이 없지요. 그러나 저런 식으로 깔끔한 편집을 통해서 텍스트로는 한참 길어질 수 있는 이론적인 설명을 압축적으로 축약하고 그만큼 밀도는 농축시켜 백문불여일견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영상 평론>은 본 일이 없군요. 아마 이 내용을 대학의 영화학 강의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추가 설명과 영상 제시만으로도 적잖이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의 소모를 요구하겠죠. 각 작품에 대한 비평은 작품이 띠고 있는 매체를 통해 취해져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평론은 텍스트를 가지고, 만화 평론은 만화를 통해서, 영화 평론은 영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하겠지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구로사와에 대해 해박하게 아는 것도 아니겠지요. 영화학도나 매니아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근거 하에서는 애초에 논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어떤 예술이든 최상층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고 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론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평론은 말이 필요 없는 최상층을 제외한 나머지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들과는 차별되는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당장 이 글의 댓글 타래를 보더라도 위의 영상 평론이 이 목적을 꽤나 잘 수행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씀대로 당연히 관성적인 창작자들과 소비자들도 비판을 받아야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론가에게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들이 의욕 없다고 해서, 창작자들이 관습적이라고 해서, 자신의 평론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수준에 동의하고 머무른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의 태만함을 반성하지 않고 감독들과 관객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면, 이를 두고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가 아니라고 한다면야, 아마추어에 머무른다면야 자신의 기호에 맞고 시야에 들어오는 특정 측면만 부각해서 보고 남들 좋아하는 이야기나 들려주며 살아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라면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러하기에 3대 영화제니 아카데미니 골든글로브니 평론가 협회상이니 하는, 다수결과 여론과 포퓰리즘에 끌려가지 않고 전문가 집단을 통해 변별력과 검증력을 확보하기 위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요. 게다가 소비자들은 어차피 목적도 책임도 의무도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에 실체 자체가 모호하지요. 따라서 영화 담론의 부재에 대해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봐야 무의미합니다. 창작자들은 이와 달리 분명 격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할 의무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직업적 특성상 분석보다는 직관이, 이론보다는 실행이 중요한 이들이라, 분석적 판단과 반성적 사유에 익숙지 못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든 터라, 담론을 추구함에 있어 결함과 부족함을 쉬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영화 담론은 영화 평론가들이 주도해야하며 그래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존재의의 자체가 분석적 판단의 극대화에 있으니까요. 평론가들이 침묵한다면, 분석을 포기한다면, 그럴듯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발전은 정체되고 혁신은 발생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평론가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일 테고요. ‘평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할 수도 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부분이겠습니다만, 그저 거기에서 그치고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하는, 먹고사니즘을 위한 것이 평론이라면, 평론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평론가가 영화감독처럼 필연적으로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는 여러 어느 정도는 소신을 굽히고 당사자들의 눈치를 고려해야만 하는 그런 직업도 아니니까요. 영화 평론가의 존재의의와 관련하여 예전에 인상 깊게 본 인터뷰의 일부를 인용하며 다소 긴 댓글 마무리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 <블로우 아웃>에 대한 폴린 카엘의 리뷰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녀가 쓴 것 중에 제일인 것 같았어요. 여러 가지를 아주 잘 밝혀주고 있었죠. 브라이언 드 팔마 : 자네 세대의 영화 감독들에게 폴린 카엘 같은 평론가가 없다는 건 불운이다. 그녀는, 그녀의 비평을 좋아하든 말든, 대단한 열정으로 글을 썼고... 쿠엔틴 타란티노 : 그럼요. 브라이언 드 팔마 : 영화에 대해서도 굉장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요즈음은 그렇게 애정과 정열이 담긴 글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쿠엔틴 타란티노 : 사실 나는 평론가란 직업을 높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평론가를 존경한다는 게 아니라 평론이란 직업을요. 감독이 되지 않았으면 평론가가 되었을 거예요. 평론가들의 글도 많이 읽어 각 평론가의 스타일도 알고, 내가 좋아할 타입인지도 알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감독들과 이야기해 보면 그들은 평론가를 별로 높이 치지 않는 듯해요. 그들은 평론가를 단지 자기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 것 같더군요. 브라이언 드 팔마 : 별 넷, 별 셋, 걸작, 졸작. 쿠엔틴 타란티노 : 꼭 방송사 친구들 얘기가 아니예요. 테리 길리엄도 폴린 카엘 얘기를 꺼내니까 '아, 그 여잔 <브라질>을 싫어했어'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 글을 읽어봤는데, 싫어한 것은 아니던데요. 몇 가지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조건 나쁘다는 아니었어요' 그랬더니 '글쎄, 그래도 내가 보기엔 그래' 하더군요. 다른 감독들도 대개 비슷했죠. 같은 글을 읽어도 다 다르게 받아들이더라고요. 브라이언 드 팔마 : 나도 항상 평을 읽는 편이다. 좋은 글도 있고, 말도 안 되는 글도 있다. 그러나 폴린 카엘의 글은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언제나 특별했다. 요즘은 새영 화가 나와도 영화평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글은 첫 문단만 봐도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있으니까. 너무들 덤덤하고 기계적으로 써 평론가의 생각이(옳든 그르든) 그다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쿠엔틴 타란티노 : 폴린 카엘은 내게 선배 감독들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학관을 수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죠. 그녀의 비평적 견해를 늘 같이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일종의 스승이었어요. 브라이언 드 팔마 : 그랬군. 쿠엔틴 타란티노 : 그녀는 내가 <저수지의 개> 후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은퇴했습니다.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내게 있어 너무 중요한 인물이니까 나는 어쩌면 그녀가 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젊을 땐 달랐죠. 그 때는 그녀가 내 영화를 보고 평을 쓰는 걸 상상하곤 했어요. 그녀는 아무 영화나 쓰지 않거든요. 그리고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서...' 어쩌고 하는 걸 그려보곤 했죠. 생각만 해도 좋았어요!
15/10/18 09:48
장황하게 쓰셨지만 현실은 간과되었고 비평에 관해서도 편협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에는 영화 평론 전문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씨네 21등은 기대하시는 것보다 훨씬 라이트한 편집방향을 가지고 평론가들에게 기사를 요구하며, 그 정도 선에서 잡지사가 운영될만큼은 충분히 소비되는 중입니다. 오히려 훨씬 무거웠던 일련의 잡지들은 말씀하신 존재의의를 갖추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사라져버렸죠. 따라서 잡지에 게재한 글과 블로거의 글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블로거는 따로 고려해야할 편집방향과 한계가 따로 없으니 말이죠. *<매체와 형식 그 자체>의 발전 가능성을 왜 평론가에게서 찾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감독, 제작자, 심지어 관객에 비해서도 후순위라고 여겨집니다. *평론가협회에서 있었던 얘기는 이 글의 맥락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버드맨>의 원테이크가 주제의식과 어떻게 호응하는지는 절대적인 답이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럴싸하게 비평을 하는 거야 자의더라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거나 별 개의치 않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원테이크는 누구나 인식할만큼 절대적인 효과를 주는 촬영방식이 아닙니다. 자꾸 명쾌하게 통찰해낸다느니, 예리하게 본질을 드러낸다느니 하시는데,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합니다. *[...결코 적지 않는 수의 문사들은 유독 학술적 대화에 만연한 오해와 오인 속에 덤으로 묻힌 채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를 손쉽게 숨길 뿐 아니라, 아예 왜장치듯(쓸데없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실없이 떠벌리기만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화술에 대한 몽테뉴의 고전적 권면과는 달리, 강연자를 위협하는 정신의 힘을 만나는 쾌락(!)은 점점 드물어만 간다....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R.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평론가들더러 스스로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라는 말씀이신가요? 잡지의 편집방향이나 밥벌이와 상관없이 컷바이컷의 위대함을 설파하라는 뜻인지요? *[그렇다고해서 문학적/코드적 비평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커뮤니티의 매니아들이 더 열심이죠. 예컨대, PTA의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왜 토마스 핀천의 원작과는 달리 솔리테쥬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게 되었는지, PTA가 소설을 영화화하며 어떤 목적의식을 가졌는지에 대해 짚은 전문가는 한국에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창동의 <시>를 두고도 대부분 ‘천박한 세상 속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의 순수함을 강조한 작품’이라는 식의 패턴을 보였는데, 특정한 대상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의 잔인성이라는 이면에 대해 통찰한 전문가가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고요. 해외의 포럼에 있는 아마추어들에게서조차 곧잘 나오는 통찰들이 씨네21 같은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 대단히 아이러니한 대목입니다만, 구밀복검님께서야말로, 특정한 대상을 예술의 소재로 삼으며 잔인하게 구신다는 겁니다. 영화를 예술로 치부하여 이러저러한 해석을 가하는 거야 각자 알아서들 하는 거고요, '무엇을' 통찰이라 자부하며 남을 까내리는 게 시종일관 구밀복검님의 논지라는 점 주지시켜드립니다. *영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영화평론은 ‘컷바이컷’이어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쯤에서 영화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여쭙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제 입장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컷바이컷이 내러티브나 캐릭터에 질적으로 우선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영화감독도 그럴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내러티브가 영화의 본질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담론을 평론가들이 주도해야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영화 비평을 문학비평이나 여타 예술비평만큼 철학적인 틀에서 하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라 생각합니다. 영화는 철학이니 예술보다 경제적이고 대중지향적인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평론가더러 억지로 그런 것들을 캐치해내라는 게 그렇습니다. 폴린 카엘이 누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평론을 모르더라도 좋은 영화는 만들어져왔고,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타란티노나 드 팔마는 영화계에서도 일반화할 수 없는 인물들이며 저도 숱하게 감독들의 인터뷰나 집필 서적을 읽어왔지만, 영화평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타르코스프키, 브레송, 베르히만이 그랬고, 코엔들이나 자무시, 우디 알렌, 하물며 박찬욱 봉준호도 그랬습니다. 정성일이 그토록 컷바이컷에 관한 여러 지문을 쓰고, 거기에 근거해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박찬욱도 봉준호도 대부분 웃고 말죠. 영화 비평이 스스로 자라서(영화와 별개로 말입니다.) 문학 평론처럼 되라고 요구할 순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비난할 순 없는 겁니다. 문학평론은 그것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습니다. 덧붙여 문학평론이 문학을 기가막히게 오독하고 있다는 건 제 주관적인 생각이고요.
15/10/30 14:13
거의 2주나 지나서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만, 본문과 댓글 모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특히 이 댓글은 별도의 글로 쓰여져도 좋을 완성도로군요.
이 every frame a painting은 예전부터 저도 즐겨보고 있었답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성룡편입니다) 특히 글이나 (Siskel & Ebert처럼) 말에 의존해야 하는 평론들은 수용자들에게 영상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많은데, 이렇게 영상과 평론을 결합시킬 수 있는 미디어를 진작에 왜 접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정도더군요. 비평의 목적이 "영화에 대한 수용자의 이해도를 높인다"에 있다면, 몇 분 남짓한 시간에 시각정보와 담화정보를 결합시킬 수 있는 이 매개수단은 앞으로도 비평계에 있어서 상당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도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일자무식이지만, 이런 몇 분의 동영상만으로 조금이라도 위를 지향할 수 있다면, 이것은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금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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