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은 명성왕후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명선공주, 둘째는 숙종, 셋째는 명혜공주, 막내는 명안공주였지요.
그 중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정혼을 하게 됐습니다.(왕자녀들은 십세 전후로 혼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숙종도 11살 때 동갑내기인 인경왕후와 혼인했죠.) 명선공주는 맹주서의 아들 맹만택과, 명혜공주는 신정의 아들 신요경과 정혼했고, 공주와 정혼한 두 소년은 각각 신안위와 동안위의 위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1673년 음력 4월 27일 명혜공주가 9살의 나이로 혼례을 올리지 못한 채 죽고 맙니다. 현종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만, 해결할 일이 남아있었죠. 바로 동안위 신요경의 처분이었습니다.
이 건은 비교적 쉽게 해결됩니다. 아직 날을 정한 것도 아니고 혼례 할 때의 예를 행한 것도 아닌데다가 아직 어린 나이였을 신요경이(명혜공주가 9살이었으니 아마 그도 8~10살 정도 됐을 겁니다.)죽을 때까지 부부간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이유로 신요경의 위호를 거둡니다.
그로부터 서 너 달 뒤인 음력 8월 2일 명선공주가 사망합니다. 실록 7월 23일의 기사로 보아 두역, 즉 천연두로 죽은 모양입니다. 14살, 길일까지 잡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신안위 맹만택에 대해서도 신요경과 같은 논의가 이뤄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종의 태도가 신요경 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현종은 이미 길일까지 받아두고 가례청까지 설치했으니 이미 혼인한 것과 다름없으므로 맹만택의 위호를 그대로 두겠다고 고집합니다. 그리고는 맹만택과 그 아버지 맹주서를 궁에 불러서 상사(喪事)를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반대 상소가 잇달아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예법에 이런 경우 재최복(상복의 종류 중 하나)을 입고 장사 지낸 뒤 벗는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면 되는데 굳이 위호를 놔둘 필요는 없다는 거였죠. 그리고 근 세달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11월 2일 결국 왕이 받아들여 맹만택의 위호를 회수합니다.
대신 현종은 일찍 죽은 두 공주에 대한 전장(田庄) 및 공장(供帳) 등을 살아있는 공주들의 예와 같이 하게 했습니다. 숙종 연간에 내시들이 이들 물건을 가로채는 등 폐해가 많고 백성들의 부담도 크니 줄이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숙종은 이는 현종의 뜻이고 또 이미 지원을 많이 줄여왔었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리고 숙종 또한 일찍 죽은 두 누이를 위해 사당을 지을 때 조정에서 도움을 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맹만택은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숙종 36년인 1710년에 사망합니다. 죽기 전 해에 대사간직을 제수받은 것을 보면 죽기 전까지 활발하게 벼슬살이를 한 듯 보입니다.
두 공주가 죽은 후 아비인 현종과 오라비 숙종의 애정은 막내 명안공주에게 쏠립니다. 실록에서는 사신이 청에서 가져온 비단을 왕비나 후궁이 아닌 명안공주에게 보내는 모습이 나타나 있고 하가했을 때 오라비 숙종은 그 사저를 1868칸의 대규모로 지어주려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전례에 따라 줄이도록 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명안공주가 땅을 원하자 숙종이 하늘의 솔개를 보며 저 솔개가 한 바퀴 돈 땅이 다 네것이라고 하며 주니 그곳이 지금의 월곡동 일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명안공주도 1687년 21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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