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년 6월 윤달, 동오의 대장군 좌도호 예주목 완릉후 제갈근 자유가 68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제갈근은 연의에서의 비중이 "제갈량의 형"정도의 비중입니다. 제갈근은 항상 촉과의 외교문제에 있을때 자주 파견되었습니다. 거기다 오의 비중이 워낙에 공기급인데다 나오면 대부분 털리는 쪽이 연의 후반의 오의 포지션인 바람에 안습인 경우가 많죠. 거기에 연의에서의 제갈량 포지션이 거의 신급인 탓에 그만큼 제갈근은 묻혀버립니다. 거기에 제갈근은 동생이 촉의 승상으로 있지만 관우한테 박살나고 관평한테는 죽을뻔 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제갈근의 경우 노숙과 더불어 대촉외교를 담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사의 제갈근은 다릅니다. 그가 거친 직위는 장사,중사마를 거쳐 수남장군, 좌장군, 대장군, 남군태수 같은 주요 전선을 지키는 장군과 행정관의 직위였습니다. 연의에서 나온것처럼 마냥 유약한 문사가 아닌 노숙이 문무 양도에 뛰어났던 사람인 것처럼 노숙의 하위호환이 바로 제갈근이었습니다. 거기다 노숙과 제갈근은 비슷한 시기에 손권에게 등용되어 빈객 대접을 받았죠.
노숙과 제갈근은 부모를 일찍 잃었다는 성장과정이 있지만, 노숙은 예전부터 여강의 부유한 호족 출신이었지만, 제갈근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오군으로 흘러들어갔죠.
둘은 손권에게 등용되었지만 노숙은 오의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주유의 적극적인 구애로 등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갈근은 손권의 매형인 홍자의 추천으로 등용됩니다. 이후 노숙은 주유를 이어 대도독이 되었죠.
깐깐한 장소는 노숙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행동이 겸소하지 않고 거칠다고 해서 임용할수 없다고 한 반면 제갈근은 어떠한 행동의 결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두사람 다 정적이나 반대파는 없었습니다. 노숙의 경우 대도독으로서 친유비성향 때문에 여몽같은 반유비파 인사들이 불만을 표출할 법도 하지만 노숙이 직권으로 찍어눌렀어도 여몽이라는 사람이 전혀 반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심정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노숙의 의견이나 책략이 매우 이성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제갈근 역시 손권에게 등용된 200년 이후 41년간 손권을 모시면서 그 변덕대마왕 손권이나 다른 신료들과 마찰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손권은 제갈근을 모함하던 사람에게 역으로 화를 내면서 제갈근을 변호해주기까지 하죠.
워낙에 변덕이 심했던 손권은 의심병까지 있었습니다. 주치의 경우 손권을 옹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 한명이었고 31년간 오군태수를 지내면서 오의 내정을 안정시킵니다. 하지만 이후 손권은 그와 사이가 벌어지면서 불편한 관계가 되죠. 제갈근은 손권에게 글로 그를 잘 달랩니다.
손권의 의심병에 교위로 있던 은모라는 사람이 걸려듭니다. 손권은 은모를 잡아다가 벌을 주었는데 이 사람이 갖가지 누명을 쓰게됩니다. 중신들은 그를 변호하지만 손권은 더더욱 은모를 미워했고 그들과 말싸움까지 벌이게되죠. 이때 제갈근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습니다. 궁금한 손권은 따로 제갈근을 부릅니다.
손권 : 자유는 어찌하여 혼자 말을 하지 않은가?
제갈근 : 저와 은모는 난을 만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고향을 버리고 노약자를 끌어안고 오지에 숨었습니다. 주공을 만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위에 오르는 복을 입었지만 은모에게 깨우침을 주고 진언하는 데 소홀해 은모에게 그런 일을 맡게 해 죄악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신이 주공께 사과하려 하여도 그럴 틈이 없어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손권은 은모를 사면하죠. 우번은 술자리에서 손권에게 실례를 했다가 죽기 직전까지 갑니다. 이때 유요의 아들인 유기가 손권을 끌어안고 공융과 조조의 경우를 들어 겨우 말려 우번을 살립니다. 이후 우번은 교주로 유배를 가죠. 우번의 말을 꺼냈다가 어떤 벌을 받을지 몰랐던 사람들은 우번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았지만 제갈근은 혼자서 우번을 계속 변호하면서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우번은 제갈근을 진(晉)의 현신(賢臣) 양설힐과 양설직을 구한 기해에 비견하는 편지를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보냅니다.
제갈근이 손권과 개인적으로 친밀해진 것은 노숙과 비슷한 풍모에 성격마저도 노숙과 비슷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부치기 보다는 항상 상대방을 살피고 의견을 개진했죠.
장소가 꼬장꼬장하게 나와 상대방 의견을 깔아뭉개고 남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밀고나갔고, 고옹은 현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침묵을 지켜 분위기를 매우 험악하게 만드는데 능했던 반면, 제갈근은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설득을 통해 의견을 이끌어가면서 필요할 경우 비유를 자주 사용하여 다른 중신이나 손권과의 인간관계는 공사 두 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관계가 원만했습니다.
제갈근과 손권의 관계에 있어서 손권이 한 말이 제갈근전과 그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 나와 있습니다. 제갈근이 이릉대전 직전 오 공격을 말리기 위해 유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때 누군가가 제갈근이 적인 유비에게 편지를 보냈고 혹여 군사기밀을 전하거나 내응할지도 모른다고 참소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제갈근은 형주의 중요지역인 남군에 있었습니다. 그 참소에 손권은 제갈근을 변호하죠.
손권 : 나와 자유(제갈근)는 생사도 바꾸지 않을 맹세를 한 사이로, 자유가 날 배신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자유를 배신하지 않는 것과 같다.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는 제갈근을 참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당시 이 지역을 지키던 육손은 유비와의 전쟁을 앞두고 이런 논의를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손권은 육손의 제의에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제갈근을 변호합니다.
손권 : 예전에 유비가 공명을 오에 보냈을때 내가 자유에게 공명은 그대와 형제이며 동생이 형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니 공명을 오에 눌러앉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공명이 여기 머물러 경을 따라 나를 섬기면 내가 글을 보내 현덕에게서 떠나는 것을 허락받게 하겠소.라고 말한적이 있소. 하지만 자유는 동생이 남에게 절개를 굽히고 인질로 붙잡혀도 그는 자신의 주군을 따를것입니다. 동생이 오에 눌러앉지 않는 것은 제가 유비에게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소.
제갈근은 전쟁에 있어서 승전의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전략은 상당히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전면전이나 기습전을 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방법을 사용했죠. 조진과 하후상이 강릉을 공격하자 제갈근은 급하게 무리하지 않고 반장과 함께 각 지역을 지키는 방법을 씁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좋아질때 바로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방법을 써서 적을 패주시킵니다. 오록에는 이에 대해서 큰 공훈은 없지만 군과 백성을 보존한 것을 공으로 평가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제갈근의 능력을 높이 산 손권은 육손의 뒤를 후원하는 사람으로 제갈근을 자주 기용합니다. 육손이 계교에 뛰어났지만 내부의 민심을 수습하거나 장수들간의 마찰 문제에 있어서는 육손이 미숙한 점이 있다면 제갈근이 이러한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이죠. 제갈근이 얼마나 오나라 안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자 제갈근은 대장군 좌도호 예주목의 직위를 맡습니다. 촉에 있던 동생 제갈량은 촉의 승상, 아들인 제갈각과 융은 장군, 사촌관계인 위의 제갈탄은 어사중승상서라는 재상의 비서관 직위로 위촉오의 고위직을 제갈가문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를 부러워하게됩니다. 오록에는 제갈근의 재략이 아우에 미치지 못했지만 덕행은 순했고, 아내가 죽은 후 재가하지 않고 애첩의 아들이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일체 등용하지 않았죠.
촉은 용을, 오는 범을, 위는 개를 얻었다는 말을 기억하실겁니다. 이건 워낙에 제갈량이 먼치킨 of 먼치킨이라서 그런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제갈량과 제갈근은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인성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생전에 어떠한 적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이 두 형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당장 제갈각의 경우 제갈량과 비견할 만큼의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이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워낙에 적이 많았고, 제갈탄의 경우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조나 절개 하나만큼은 제갈근이나 량에 비견할 정도였죠. 사실 제갈탄이 사마씨에 협력했다면 서진에서 고위직을 맡았을 겁니다. 제갈탄의 아들인 제갈정은 사마염의 어릴때부터 친구였고, 문앙이 어떠한 관계도 없던 양준 일파로 몰려 사마요(제갈탄의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제갈탄의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제갈근은 아들인 제갈각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손권이 제갈각을 총애하는 것을 보고 그가 집안을 망칠것이라 여기고 걱정합니다. 결국 제갈근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떨어지게되죠.
제갈근이 68세로 죽자 그냥 나무관에 수의 없이 평상복으로 염하게 하고 장례는 검소히 치르라고 말합니다. 제갈각은 나름대로 관직에 출사했기 때문에 제갈근의 관작은 차남 제갈융이 작위를 잇고 공안에 주둔합니다. 제갈근이 이끌던 군사는 진표와 고승이 각자 나누어 맡았다가 진표가 죽자 제갈융이 이어받습니다. 제갈융은 놀기 좋아하고 화려한 복장을 해입고 놀기좋아하며 학문은 얕았다고 합니다. 제갈융은 빈객들을 모아 연회를 벌이면서 지금으로 치면 부루마블과 같은 쌍륙, 바둑, 윷놀이, 투호, 활쏘기 놀이를 즐기면서 과일과 술을 즐기죠.
이후 제갈각이 죽으면서 제갈융 역시 사망하고 제갈근의 대는 끊길뻔 합니다. 이건 나중에 제갈각을 말할때 이야기하죠.
저는 제갈근을 노숙과 비견할때 노숙처럼 견실하고 원만한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제갈근 자유, 어찌보면 재상으로서는 가장 적격인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