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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23 21:14
호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니, 변화무쌍하고 왔다갔다 하는 그 모든게 나, '아'가 아닌가 싶습니다. 몸 생각 느낌이 왔다갔다 한들 그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과거의 것이 될 뿐이지.. 현재의 내가 아닐뿐 과거의 나 아닐까요. 과거의 내가 이어진 것이 현재의 나, '아'겠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05/23 21:17
불교에선 그 생각이 가장 잘못된 생각이죠...
모든게 "아"가 아니라 그 모든게 없는 것이 진실한 "아"라는게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13/05/23 21:27
개인적으로 불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중용" 입니다 ... ( 정치학 용어로는 "중도" 정도 될까요 ... )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정반합을 아우르는 개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요 ... 마지막 질문은 너무 어려워서 포기 ;; 윤회 사상은 전생의 내가 죄를 지으면 다음 세상에서 짐승으로 태어나고, 전생의 내가 착한 일 하면 다음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서리 ;;
13/05/23 21:44
힌두교는 예스. 불교는 본문에 나와있듯이 아라한이라는 존재가 윤회를 벗어난 존재입니다. 러프하게 설명하자면 소승불교는 본인의 열반을 꿈꾸지만 대승은 중생모두가 열반에 들어야 한다는 일념하에 같이 열반에 들려고 하는 차이가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13/05/23 21:44
그게 소승의 목적입니다.
대승은 윤회를 즐깁니다. 그래서 관세음 보살도 지장 보살도 여기 남아 사람을 돕습니다. 더 정확히는 윤회할 주체가 누구냐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크린 속의 배우가 아니라 텅빈 스크린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배우라고 여기면 계속 윤회하겠지요. 다른 영화에 끝없이 출연하면서. 하지만 스크린 자체라면..?
13/05/23 23:12
흰코뿔소님....더펄이 님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소승과 대승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불교를 상식으로 접한다면 아무 문제없지만 자신의 존재철학으로 받아들이려면 칼끝같은 정확함으로 이해해야 더는 의문이 나지 않습니다.
13/05/24 00:22
'나만 윤회에서 벗어나면 된다' = 소승
'나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윤회고의 종지부를 찍겠다' = 대승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글장님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제가 잘 파악을 못 하겠네요.
13/05/24 00:33
네 맞습니다.
소승의 아라한이 되어서도 계속 닦아야한다는 것이 대승입장이니까요. 심지어 보살도 10지까지 계속 닦아나가야하고..그 핵심이 중생을 돕는 것이니까 맞습니다.
13/05/23 21:37
제악을 막작하여 중선을 봉행하고 자정가의하면 시제불교니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그 뜻을 옳바른 곳에 두면 그것이 곧 불교이니라. 절에 가본지 몇년째인지 가물가물하지만 불자로서 평생의 신조로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13/05/23 21:57
음... 가끔... 순간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와 닿았다? 인식했다?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나 위에 고인 무언가가 걷히고 본질적인 나와 마주한다는 느낌같은 것. 그런 건 내 감정/행위/판단 같은 것들과는 좀 다르단 생각도 들고.. 그냥 본질적인 '나' 가 아닌가 나름 생각해보기도 했었죠. 어릴 땐 그런 내 안의 무언가와 닿는 느낌이 자주 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 빈도가 줄어드네요. 본문을 읽으면서 뭔가 익숙한 이야기다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질문하신 '나' 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그 '나' 겠죠? 태어나서 사회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모든 것이 그 나를 구성하는 바탕이겠군요. 앞에 언급된 오온 이라는 것. 윤회란 게 정말 있는진 모르겟지만, 있다면... 그 윤회를 거듭하는 건 그 '나' 와는 독립된 무언가가 아닌가 싶네요. 제가 종종 마주하는..
13/05/23 22:06
네 맞습니다. 감정 생각이 휙휙 지나가도 뭔가 나라는 느낌...대상과 인식 주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있지요.
그게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언뜻언뜻 열반이고 그 상태의 지속이 상락아정이라고 합니다. 원래 참자아 자리밖에 없는데 생각과 감정이 지가 주인공인양 차지한다고 합니다.
13/05/23 22:16
본문의 내용을 피지알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 대변이 급할 때 나는 없죠. 왜냐하면 다른 존재에 정신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갈피를 못잡지만 결국에는 어느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곧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의 나는 누구인가. 조용히 생각을 합니다. 느낌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변기 안의 물은 돌아가고. "
13/05/23 22:19
훌륭합니다 그 상태 나라고 하는 것을 지배하던 생각 느낌이 지나고 원래 텅비어있음을 아는 경계가 본성자리입니다
일상사 사시다가 순간 순간 그걸 알아 챙기시면 알아차리는 나가 님을 지배해서 참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13/05/23 23:21
제가 아는 것이 아니고 제가 들은 것이기에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아트만과 진아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아트만은 불교의 충만아에 해당하며 진아는 또 차원이 다른 경지라고 들었습니다.
13/05/23 23:26
네 흰코뿔소님 상관없습니다.
저 역시 제가 들은 것과 체험한 것만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득도한 것도 아니고요. 진아는 뭘까요? 가짜 아가 있다는 거겠죠. 가짜 아가 바로 오온입니다. 오온을 제거한 상태(아라한, 소승) 오온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상태(, 대승=공즉시색 색즉시공)가 진아입니다. 즉 존재하는 것은 참자아 하나뿐입니다. 그걸 아트만으로 부르던 진아라고 부르던 참자아라고 부르던 상관없습니다. 충만아라는 것은 그저 좀 더 그상태에 머무는 느낌을 표현한 단어일 뿐입니다. (좀 더 부연 설명하면 흰두적인 것을 부정하려던 불교의 경향성을 생각해보시면 왜 그토록 불교가 힌두교적인 용어를 배척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 많은 오해가 발생하고요. 자꾸 생각이 나서 덧붙이다보니 글이 지저분합니다. 용서하세요. 다시 말해 부처님 당시의 설법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승불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대승이고 소승의 입장을 사실 부정합니다. 그 차이를 흰코뿔소님께서 오해하시는 대목입니다.
13/05/23 23:34
충만아라는 단어는 우주의식이며 우주의 법칙을 모두 아는 우주의 창조주인 상태입니다.
진아는 그마저도 벗어난 상태를 뜻하기에 좀 더 머물고 덜 머물고 하는 식으로 버무릴 수 있는 개념차이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13/05/23 23:38
네 그말도 옳습니다.
그게 하나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체다... 성경에 i am that am 자리도 표현만 다릅니다. 이제 더 단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제가 흰코뿔소님께 또 다른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는 자리지 단어로 규명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단어에 집착하지 마시고 나타나는 것은 나타나게 두고 하나만 바라보시면 됩니다. 지금 가보지 않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계속 얘기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봤다고 해서 수행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에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궁극이 무엇인지는 10지에 이르기까지야 모른다고 화엄경에 하지 않았습니까.
13/05/23 23:45
타 종교의 개념과 진아를 같은 개념으로 두시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말씀하신대로 단어로 규명이 될 자리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그 개념에 대해서 섣불리 말씀하시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3/05/23 23:50
네 맞습니다.
제가 또 어딘가 힌코뿔소님을 자극한 언어가 있었겠지요. 제가 이글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언어와 사고로 통해 접근할 수 없습니다. 견성은 간장이 짜다는 것만 알아도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쉽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견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후의 수행이 지속되야겠죠. 위험한 것은 힌코뿔소님 말씀처럼 어떤 상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글을 썼고요. 붙잡고 있는 상이 하나도 없다면 그 개념 조차도 상관없을 겁니다. 전 위험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말 하려고 이글 썼어요. 그거만 서로 통하면 전 됐습니다.
13/05/23 23:42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었죠.
이 명제는 훌륭하지만, 그만큼 엉성하기도 했습니다. 저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존재하지요. "내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인식하는 나는, 인식된 나와 같은가?" "내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나의 위치는 타당한가?" 본문의 '나라고 할게 없다면 뭐가 더 남아 있어서 무아인지 뭔지를 느끼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하지 않나요? 나를 인식하는 나에 대해 많은 언급이 있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프로이트는 무의식, 퐁티는 육체...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가장 비슷한 것은 사르트르가 아닐까 합니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無)라고 했었죠. 사르트르는 나를 인식하는 나를 순수의식으로 정의합니다. 순수의식은 존재성을 확립하기 위해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대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선 자기존재를 확대함과 동시에 부정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부정의 근원으로 무(無)를 상정하죠. 본문의 제행무상에서 제법비아로 나아가 무아의 상태가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는 반대합니다. 내 안에 본질적인 내가 있다는 생각, 즉 영혼같은 존재가 몸과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영혼의 존재유무는 확언할 수 없으나, 그 영혼의 형상은 내 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외부와 소통하는 경계가 내 몸이고, 나는 어떤 현상이든지 내 몸에 맞게 해석하게 되죠. 즉 나를 인식하는 나는 다름이 아니라 내 몸이라는 것이죠.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한 근대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나오고 나아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낳았다고 생각하구요.) 외부와의 상호작용은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확립하죠. 전통적인 영혼이나, 사르트르의 무와 같은 개념이라면 상호작용 자체는 나의 존재의 근원을 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로인해 나를 아는 것보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경우가 더 많죠. 혹은 남이 아니라 자연이나 우주와 마주하며 자신을 알아가기도 하구요. 불교에서의 참선도 이와 비슷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내 안으로 파고드는 생각의 춤이 아니라 외부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소통의 자세라고 봅니다. 이걸 가장 멋있게 주장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구요. 사랑은 나라는 존재가 남이라는 존재와 온전하게 소통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를 초월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설명하신 게 아닐까요? (참고로 교회에 다니진 않습니다.)
13/05/24 00:00
늘 하는 경험이지만 이번에도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단어 설명하고 뭐하다보니 무수한 생각만 제가 불러들였네요. 글을 지울까..생각해봤는데...뭐 이과정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과정으로 보려고합니다. 댓글에 동의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만 되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다만 절 용서해주실 대목은 이웃과 남이라는 기준점 가르는 기준을 단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는 정도로만 봐주십시오. 예수님 말씀처럼 '가르지만 마라..'로요..
13/05/24 00:23
어리석다니요;;
무아라는 본질에 대해 고민하신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전 그저 불교의 존재론적 고찰을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오히려 제가 심상을 흐린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마지막 문단은 제 개인적 소신일 뿐입니다. 정답은 존재하겠지만 제 생각일수는 없겠죠
13/05/24 00:39
네...고맙습니다.
그럼 정말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일 거 같아요. 존재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 가르는 것이 무엇이 되었던 진실을 막는 가림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사라질 것은 사라지겠죠.. 그러니 제 생각도 마스터 충달님의 생각도 시간이 되면 변하고 사라지겠죠..
13/05/24 00:05
다...들 보셨으면 이제 곧 글을 지울게요.
생각만 왔다갔다하게 해서 죄송하고요. 직지무심하는 자세로 돌아가겠습니다. 헉! 댓글이 붙어 삭제가 안된다네요...쩝..
13/05/24 00:27
이 글이 올라온 계기가 된 글을 올린 입장에서 뭐라고 댓글을 달긴 달아야할 것같은데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뭐라 제대로 된 댓글을 달긴 힘들고, 좋은 글과 댓글들 잘 보았습니다.
13/05/24 00:35
쪽지 보내고 받다보니..지금 이글을 봤습니다.
아닙니다. 그 글에서 인용된 개념이 혼동을 줄 수 있어서 써본 것입니다. 님의 글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제가 뭐라고 할 실력이 없습니다.
13/05/24 00:39
신경학에서 요즘 논란이 되는게
공포라는 감정을 예로들면 내가 무서워서 동공이 커지는건지 동공이 커져서 무섭다고 느끼는건지 선후가 불분명하다는 얘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실험측정을 하면 대뇌에서 공포를 느끼는것 보다 몸의 반응이 더 빨리 작동한다고 하더군요 이 모순이 일어나게 된게 옛부터 내려오는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생각하는데요. 육체가 곧 인식의 주체가 되는 일원론적 접근으로 이 모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13/05/24 00:44
제 원글에서 다룬 것이 그것입니다. 공포를 의식하는 시점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한다는 것은, 실제로 공포에 반응하는 오토마타는 따로 있고 의식은 그 오토마타의 로그 화일이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제 원문의 주제였습니다.
시간 순서를 나열해보자면 공포에 대뇌가 반응하기 시작 - 동공이 확대 - 피실험자가 공포를 의식 대충 이런 순서라는 것이지요.
13/05/24 00:54
원문에서 윤리의 소실을 걱정하시던데 오히려 육체 혹은 오토마타를 자아의 실체로 규정한다면 생명이 최고의 선이 될것이고 이는 이분법적 사고보다 더 윤리가 강화된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세상을 지저분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대부분 이념을 생명보다 높게 치고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거든요
13/05/24 03:15
윤리란 것이 본질적으로 둘 이상의 사람의 이득이 상충할 때 발생하는 것이니, 어떤 오토마타의 이득을 더 중시할 것인가가 해당 윤리관의 핵심이 되겠지요. 아래 글에서 나눴던 관련 대화의 링크를 걸어둡니다.
https://cdn.pgr21.com/?b=8&n=43969&c=1553746
13/05/24 01:06
와, 저는 이런 글타래 정말 좋아해요. 질문도 반갑네요. 제가 궁금했던 바로 그거거든요.
그런데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란게 없다는 게 함정이네요. 제 솔직한 느낌은 -> 헐???? 그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13/05/24 01:11
저도 헐??? 입니다. 저도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모를 뿐이라는 인식에 같이 도달해보자고 한 글에서 또다른 생각을 보니..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진실하게 알게됩니다. 하하
13/05/24 01:2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놈의 생각의 굴레는 평생을 따라다닐 것만 같습니다. 죽도록 번뇌하고 사는게 저의 업보라 생각하니 조금은 편해지는데, 그래도 내가 누구인지, 저 사람은 누구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산다는게 뭔지, 이런 쓸데없는 말장난같은 단어의 나열이 계속되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13/05/24 01:29
네 저도 글 하나 쓰고 그 글에 생각 보태신 분들과 대화하다보니 계속 여기 머물게 되네요.
글 쓴 죄로 말씀드리면 '이런 쓸데없는 말장난 같은..'것을 어느 날 안하고 보니 통째로 보이는 경험을 한번 해봤어요. 처음부터 그자리였다는 것도 봤고...나타나는 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도 봤어요. 그걸 느껴봤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도 나중에 알게되었고,.., 제 에고 상태는 경쟁 좋아하고 말싸움 좋아하고...질투하고 싫어하고..늘 하던 대로였는데..거기엔 그게 없더라고요. 그냥 통으로 존재해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나도 남도 없고...의식은 합니다. 그럴 때 내 생각 내 느낌은 방해가 안되요...그냥 생기게 두던 말던...통으로 느껴져요..그러면 다시 더 통으로 확대되고.. 그렇습니다. 만약 그런 것도 있어라고 궁금하시면...아무 것도 모를뿐...하고 해보세요...분별과 생각이 끊어지면(일시적이라도) (자기가 앉아 있던) 그늘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가 뜨거우지면 어 저기 (자기가 앉아 있던) 그늘이 있었잖아..하고 돌아가는 식...과 제일 비슷했습니다. 그럼 한발작도 못벗어난 곳에서 눈앞에 펼쳐진 그걸 못봤다는 걸 아실거에요.
13/05/24 02:05
전 기독교신자지만 불교 참 매력적이더군요 ..
제가 나이롱 신자여서 그랬나는 모르지만 대학교때 불교동아리에 연등축제에서 등들고 행진하고. .불교수업도 듣고 좋은 추억이 많네요.
13/05/24 02:13
전 이제 종교는 가리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저도 참 좋아합니다.
기독교 불교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뜨락에서 행복하십시오.
13/05/24 02:37
아 이말을 빼먹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없다의 가치 판단이 아니고... 한 개인이 살아가는 문제라면 말입니다. 결국 고통없이 잘 살아가는 문제라면 말입니다... 저는 도무지 모르겠어서..괴로왔습니다. 욕심도 가져보고 그 대로 안되서 지금도 여전히 괴롭고요.. 그런데 그 상태로만 머물다가는 늘 같은 자리를 맴돌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분명한 것은 텅빈 그자체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현상계에 위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제게 있어선. 제 생각의 오류를 바로 잡아주고...이끌어주는 스승이라고 해야할 거 같아요. 암튼 그렇습니다. 이제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얼추 다한 거 같네요. 성령으로 산다는 것과 남과 나의 구분없이 텅빔으로 살아가는 것과 덕을 드러내는 것이 요즘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위에선 선문답처럼 말했지만 실상 제게는 오히려 성실한 질문이자 대답으로 여겨져요. 공허했던 제 에고의 선택과 목적없는 방황을 붙잡아준다고 할까요..
13/05/24 03:59
자꾸 생각을 불러오기에 글을 지우신다는 말을 하셨는데 (어차피 지우시지 못하셨지만;)
지우시는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쉽게 말해 '해본자와 안해본자의 차이'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불러 모을수 있다는건 사실입니다만 그 많은 생각을 '해보는 것'과 '안해보는 것' 중에서는 '해보는 것'이 더 중요한것이 아닐런지요. 답과 깨달음을 떠나서 말입니다. 실타래가 엉키게 되었을 때 푸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풀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다음에도 종종 이런 글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우려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고민하던 것들도 들어있어 더 그랬던듯 싶네요.
13/05/24 09:53
이제 잠에서 깨어서 님 글 읽었습니다.
어제 밤에 무슨 생각이 나서 글을 섰고 그 글이 엉뚱한 느낌을 오히려 갖게 한다면 좋지 않을 거 같아 지우려고 했어요. 글을 쓸 때 에고가 작용하는지 나와 남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는지 관찰하려고 하다보니 지우려고 했습니다. 좋게 읽어주셨다면 저도 기쁩니다.
13/05/24 09:28
와 진짜 뭔 말인지 모르겠네요. 마지막 생각이 춤춘다는 표현은 참 재미있네요.
아이디어를 만들려고 짜내고 그럴듯 하게 보이려고 없는 말 지어내고 그러는게 아니고 생각을 춤추게 한다라. 크크 비슷할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영화공부를 하면서 했던 생각이 매력적이고 독특하면서 주위에서 만날 수도 있는 현실성있는 캐릭터를 3~4개 만들어놓고 걔네들이 그냥 알아서 움직인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만한 멋진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크크 여튼 재미있네요.
13/05/24 11:14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얘기를 만들기도 하지요~ 처음엔 어느정도 스토리를 만들고 캐릭터를 만들다가 나중에는 큰 틀만 잡고 이런 상황이라면 이 캐릭터는 이렇게 행동하겠지.. 라는 식으로 집필해 나가는. 그런 작가분들은 캐릭터가 '예측 외의 행동을 해서 어디로 튈지 몰라 재밌다'라는 독자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할 수 있는 얘기를 하시더군요. 크크크
13/05/24 11:25
어디로 튈지 몰라 재밌다 하면서 저도 몇번 말해봤는데요.
저는 사실 헛폼이었고요. 하하. 캐랙터는 참 어렵습니다. 공감받는 캐릭터는 참 어려워요
13/05/24 11:02
글장님의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저와 같은 불교를 공부하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네요.
뗏목은 강을 건넌 후에 버려야 하는데,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리신 느낌이 듭니다. 위험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셨는데, 이는 누구보다도 글장님께 위험합니다.
13/05/24 11:12
글로 쓰게되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되어서..
저 역시 평소 뭘 아는 듯한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요. 지금도 모른다고 얘기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묘하네요. 모른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열심히 풀어쓰다보니 제가 평소에 제일 싫어했던 태도를 남에게 보이더라 이말입니다. 그게 뗏목위에서 아둥바둥하면서 뗏못을 버린 척하는 사람으로 힌 코뿔소님께 보인 걸 겁니다.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리게 보인 사람으로 보여도 할 수 없습니다. 뗏목 깔고 아둥바둥하면서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 아니 바보겠습니까. 전 여전히 바보 맞고요. 전 지금 제가 뗏목을 버렸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뗏목에 실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고 해도 그 전체 풍경이 달라지진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했던거에요. 여전히 전 에고의 아둥바둥 기질로 인해 고통스러울 겁니다. 불교로 인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가르침으로 인해 고통스러운게 아니고 제 자신의 에고가 일으키는 문제로요.
13/05/24 12:13
조금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두 분에 비해 일천하지만 이게 좀 알아나가다보니, 이게 제 수준에서 비유하자면 소시적 수학교과서에 있던 무한이니 수렴이니 하는 개념과 비슷한 점이 있더라는 겁니다. 영원히 다가갈 뿐 도착할 순 없다. 그럼에도 계속적으로 다가간다. 도달할 수 없다면 다가가고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돌 수도 있죠. 아니 사실 우리 모두가 엄청나게 빙글빙글 돌고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칼끝같은 깨달음의 추구야 물론 길에서 중요하긴 합니다만 도반들끼리는 역시 엄격함보다는 너그러움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지럽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13/05/24 12:17
뭐든 좋습니다.
저는 지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그냥 보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는 거에요. 그래서 밥맛없어보일 거 같아 죄송하고요.. 도달이란 표현은 부적절합니다. 방편으론 가능합니다만.. 이미 도달해있고 벗어날 길 없고 펼쳐져 있어요.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도달이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가고 오는 자리 아닙니다. 알면 그뿐입니다. 저글링 아빠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참나 안에서 살고 맛보고 즐기고 살고 계세요. 계속 나아가시겠지만 그래도 진실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면전을 보라..모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은 그대로 창입니다.
13/05/24 12:31
지난번에 orbef님이 써주신 글에 이어서
한국말인데 이해하지 못할 글이 또 나왔군요.....크크.... 집에가서 한번 차분하게 다시 정독해봐야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13/05/24 12:37
아무렴 어때요.
제가 불교 공부하시는 분한테는 단어 속에서 개념을 정확히 구분해 쓰시자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게 엄청 방해가 되더라고요. 그 허다한 경의 기준들은 단어 뜻에 갇혀서 본질을 흐리게 될까봐 그렇고요. 그냥 편하게 지내시는 분들은 마음 편하게 즐겁게 사십시요. 제 글 안 읽는 것도 그중 한 방법입니다. 하하
13/05/24 13:14
설정덕후에게 불교만큼 흥미로운 철학세계가 없더군요. 요즘은 유교, 도교 등의 동양철학도 찾아보니 꽤 흥미로웠습니다. 불교는 직관의 사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논리적 사유로는 설명하기 힘들죠. 그럼에도 세계관 만들라면 서양철학의 체계 안에서 동양철학을 설명하게 됩니다. 여튼 가상의 세계관이란 작가가 진리니까요. 남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내용들을 저는 자기만족의 공상으로만 사용하고 있네요. 진심으로 다가가서 얘기한다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긍정적 회의주의자라고 자위해봅니다. 내 머릿속 세계에서 망상하기 바쁜데 현실따위...
그래도 동, 서양 철학을 폭넓게 겉핥기하면서 와닿은 세가지 문구, 책, 인물은 있습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물론 프로타고라스는 제가 받아들인 의미로 얘기한건 아니지만요. 반야심경. 세상에서 가장 돋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체. 어찌보면 나에 대한 궁극의 긍정이 아닐까 싶은 정신나간, 그러나 멋진 아저씨에요. 아, 질문에 대한 답은...모르겠네요. 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상태같은게 아닐지. 크크!
13/05/24 14:01
네 자신만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걸 고쳐보자고 하는 얘기도 아니고요. 저역시 내 머릿 속 세계의 망상에서 늘 살고 있지요. 단 그 망상이 어디서 노는가.. 우리가 책의 글이라면 글이 쓰여 있는 텅빈 여백이 있을 것이고 여백이 있으면 그 것을 보는 사람이 있지요. 글씨- 여백- 보는 사람을 다 각자 구분하는 사람이 있고 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요. 통으로 본다고 해도 당장은 달라지는 것도 없고 개체성을 상실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욕도 먹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삶을 보는 시각과 행동이 바뀌니 얘기안할 수도 없고... 아마도 저도 예전같으면 벌써 이런 얘기는 쑥스러워서 고만두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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