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머리요정입니다.
거의 보름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레전드 스타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아! 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이 참 많습니다.
최동원, 선동열, 박철순, 이종범, 양준혁 등등....
시즌을 지배했거나, 시대를 지배했거나, 전체 커리어를 지배했거나....
대부분의 슈퍼스타들은 이렇게 스타가 되었고, 지금도 널리 기억이 됩니다.
한용덕,
흔히 말하는 슈퍼스타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최고의 최고는 아니었지만, 끝내 최고가 된 선수'
투수판 연습생 신화를 써내려간 한용덕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했습니다.
원래 고향은 대구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인해서, 8살 때 대전으로 이사.
가난한 유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6살 위의 형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도 어린 시절 겪습니다.
대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유격수 포지션을 맡으면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특출난 실력자도 아니었고, 체격도 좋은 편이 아니라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북일고를 거쳐, 동아대 야구부에 진학.
대학 진학 이후 체격이 좋아졌지만, 중학교 시절 부상을 당했던 왼쪽 무릎의 관절염 재발로 인해서,
야구를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1년만에 자퇴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특출난 재능이 있던 선수도 아니었고, 야구에 대한 집념이 그리 크지 않았던 터라,
군에서 제대한 이후, 트럭 운전, 임시 회선 설비 등,
야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임시직들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 중에도 야구를 완전히 잊지는 못해서, 사회인 야구를 틈틈히 나가 경기를 뛰었다고....
86년 시즌이 끝난 이후, 빙그레 이글스에 김영덕 감독이 부임을 했고,
야구장을 꾸준히 찾던 한용덕은 북일고 시절 은사였던 김영덕 감독에게,
'배팅볼 투수라도 시켜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김영덕 감독은 구단에 의뢰한 이후,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을 허락했고,
배팅볼 투수라는 포지션으로 입단하게 됩니다.
배팅볼을 던지면서 제구를 익히고, 한용덕 특유의 투구폼 역시,
상체만을 이용해서 배팅볼을 던지면 팔이 아프니, 오래던지려는 긴 연구 끝에,
하체를 활용하는 투구폼을 스스로 익혀, 배팅볼을 던지는데 적용시켜 폼을 완성시킵니다.
이후, 한용덕은 88년 7월 1일, 첫 1군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됩니다.
- 배팅볼을 직구만 던지다보니, 직구의 구위가 상당히 좋았다고 합니다.
직구를 잘 던지는 투수. 하지만 그 외엔 없는 투수였던 한용덕은,
90년 전지훈련을 기점으로 야구에 눈을 뜨게 됩니다.
당시 사토라는 일본인 인스트럭터로부터, 변화구를 전수받게 되죠.
그 변화구는 훗날 한용덕의 상징이 되는 슬라이더 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3승을 거두며,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91년에도 17승을 거두며, 한일 슈퍼게임 대표선수로도 선발되어,
4차전에 등판하여 승리투수가 되는 영광도 함께 얻게 됩니다.
배팅볼 투수 시절 단련한 견실한 어깨와, 순간 눈을 뜨게된 변화구까지.
그동안 다져온 잠재력이 모두 폭발하여, 주축투수로 진입하게 된 것이죠.
94년까지 한용덕의 전성기는 계속 됐습니다.
용덕이 후회하는 단 1번의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16승을 따내며 해태 조계현과 다승왕을 다투던 1994년,
쌍방울전에서 8회까지 0-0으로 맞서다 9회 아무 이유 없이 교체를 하게 됩니다..
‘팀이 나를 안 도와 준다’는 반항심에 스스로 2군행을 자청을 했고,
그 시기에 온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 교통 사고로 본인이 큰 부상을 당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아내는 한쪽 다리를 절단을 결정해야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었고, 아들은 대퇴부에 심각한 손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한용덕은 2년간 고생을 합니다..
야구보다 아내 병간호가 더 중요했으니 경기에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다른 부상은 모두 괜찮았지만, 왼팔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고 합니다.
팀에 사실대로 말하면 야구를 그만 두라고 할까봐, 멀쩡한 척 연기하며 경기에 계속해서 등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아직도 왼팔이 정상적이지 않다. 일종의 장애죠"
그의 투구폼에 대해 남들이 ‘힘 안 들이고 슬렁슬렁 던지는 것 같다’고
평가했던 이유도 사실은 왼팔을 전혀 쓸 수 없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왼팔 장애가 아니었다면 더 잘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아요.
투수는 전신의 힘을 다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좀 더 어른스럽고 성숙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죠.
하지만 덕분에 이제는 선수들이 어떤 잘못을 해도 다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페넌트레이스의 최강자로 불리웠던 이글스는 95년을 시작으로, 98년까지
2번의 6위와, 1번의 7위로 최강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정민철, 송진우를 필두로 한 선발진과, 구대성이라는 특급 마무리.
장종훈의 홈런 신화도 팀의 하락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 기간에도 한용덕은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고,
지는 경기나 이기는 경기나 의식하지 않으며, 투구했습니다.
확실히 많이 떨어진 구위와, 경기를 하면 할수록 승리보다 많이 누적되는 패전.
그럼에도 한용덕은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매년 소화합니다.
이 때의 모습은 마치, 기록이나 타이틀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미련을 갖지도 않으며,
특별히 감독이나 코치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온전히, 팀의 성적이 더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희생함으로 후배가 조금이라도 더 쉴 수있게 하기 위해서,
온전히 그런 마음으로 등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용덕의 투구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했고, 소박했습니다.
어린시절 당한 부상으로 인해서,
그 부상이 다시 안좋은 시기에 재발함으로 인해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야구.
그리고 그 야구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서,
연습생으로, 배팅볼 투수로 시작한 그의 야구 인생.
직구만 던지는 배팅볼 투수에서, 정식 선수로 등록되기까지,
운명적인 변화구 전수로, A급 투수로 성장하기까지....
안타까운 교통사고로 인해, 꺾여버린 그의 야구인생은....
단 1개의 타이틀 없이, 팀의 우승만 1번을 기록했을 뿐,
그렇게 흘러가다가, 끝까지 자신이 가진 기량대로 묵묵히 던지다가,
마침내 2004년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현역 시절 그의 등번호는 40번이었습니다.
40번이라는 등번호를 선택한 이유는, 40승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라는 것과,
40세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은 마음. 2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2004년에 은퇴를 했으니, 40세까지 현역으로 뛰겠다라는 소망을 이루었고,
40승이라는 소망 역시, 40승을 너머, 3배에 해당하는 120승을 거두고 은퇴를 하게 됩니다.
88년부터 04년까지, 17년간 올린 그의 성적은,
통산 472경기. 2080이닝 120승 118패 24세이브. 방어율 3.52. 통산 1341탈삼진.
(-> 정말 특이하게도 120승 가운데 사직구장에서 거둔 승리가 1승도 없다고 합니다.)
이정도의 성적이라면, 충분히 레전드 반열에 꼭 있어야할 선수가 맞지만,
같은 팀 소속의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탓도 있고,
확실하게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던 그의 커리어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거기에 비인기팀 한화의 소속이었기 때문에...
코치가 된 이후, 한용덕 코치의 능력은 더욱 빛을 냈습니다.
07년 1군 코치를 맡아, 팀 선발투수 방어율 1위를 만들어낸 것은 물론,
이후 2군에서 코칭을 하며, 팀이 어려울 때 주축을 잡아줄 수 있는 투수를 꾸준히 발굴해냈습니다.
그리고 2011년, 07년 이후 처음으로 1군 투수코치에 임명되어,
전년도에 대비해, 팀 방어율을 급 낮추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다른 투수코치들에 비해서, 한용덕 코치의 코칭이 특이한 점은,
엘리트 출신의 투수코치들이 즐비한 가운데, 한용덕 코치는 연습생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재능으로 뛰었던 현역 시절이 아닌,
자신이 개발하고, 자신이 노력했던 인고의 세월을 토대로 코칭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투수에 따라서 구위, 제구, 구속을 따로 중시하는 코칭법으로,
한용덕 코치의 투수조련은 이미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리고 투수코치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는 모습은 참 인상깊습니다.
-> 심지어, 수석코치가 된 이후, 감독 대행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죠.
한대화 감독이 경질된 이후,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을 때,
시즌이 끝날 때까지 감독의자에 앉지 않았던 그의 자세를 통해서,
그의 성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인생사.
그 풍파는 한용덕에게 온화함과 포용력이라는 큰 재산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작은 부상도 견디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구위가 빼어나지도 않았고 팔도 아팠던 제가 ‘정신력’ 하나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제자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조금씩 해주면서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네가 못 하냐’고 해요.
우리 선수들은 후회 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제 바람이에요.”
최고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를 재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최고라 말합니다.
송진우나 정민철, 구대성같이 뛰어난 재능으로부터 출발한 선수도 아니었고,
장종훈처럼 연습생 신분으로 같이 출발했지만,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지 못한 그에게,
오늘날 다시, 최고라는 호칭으로 다시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작년 시즌, 감독대행을 맡게 되면서부터,
전임 감독에 대한 예우로 감독의자에 단 한번도 앉지 않던 그의 자세.
그리고, 후반기 한화에게 쉽게 지지 않고, 무기력한 야구를 한차례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에게,
다시 한번 최고라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한화에 돌아와,
한화이글스의 비상을 위해서, 함께 뛰는 모습을 다시 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