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08년.
서로마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트족은 제국 국경 이내로 들어왔고, 심지어 제국의 수도까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라벤나에 기거하면서 상황을 방치했고
제국을 구하고자 했던 유일한 위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 야만족 출신의 장군 스틸리코였습니다.
그런데 영웅과 악당들, 왕과 장군들의 이야기보다 그러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갔던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습니다.
발레리우스 피니아누스(381년생)와 발레리아 멜라니아(383년생)의 이야기입니다.
서기 408년 당시 이들은 각각 27, 25세였습니다. 이들은 젊었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부유했습니다.
특히 멜라니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먼 후손으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전통있는 귀족가문이었습니다. 이 부부가 소유한 저택은 로마에서 제일가는 고급저택이었고, 이 부부가 소유한 토지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스페인, 심지어 브리타니아(영국)까지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파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하겠다고 선언하고,
로마라는 속세와 이별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로마의 귀족사회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들은 젊은 부부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재산을 처분하는 것을 막고자했습니다.
심지어 귀족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느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멜라니아는 당시 황제와 직통 핫라인이 있었던 세레나를 찾아가
재산을 처분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이야기했고
마찬가지로 독실한 기독교였던 세레나는 이를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리하여 이 부부는 전재산을 처분하고 아프리카를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시기도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불과 2년 후 고트족이 로마를 침입해 약탈했는데, 이들은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아프리카에서
[신국론]과
[고백론]으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노를 만났고
그를 위해 막대한 기부를 하였습니다. 또 가는 곳마다 성당과 수도회를 지었고,
자선사업에 동참하였으며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을 위해서도 엄청난 돈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검소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재산이 다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진정 신앙 때문에 그렇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한 학자는 그 증거로, 예루살렘에서 검소하게 지내면서도 예루살렘 교회에 막대한 기증을 하고 또 자선단체에도 기부했다는 사실을 들더군요.
여기서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이 있습니다. 수도 로마가 위기에 빠졌을 때 다른 귀족들은 로마 노바,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제일 가는 귀족들이면서도 왜 예루살렘으로 향했는가...처분한 재산을 가지고 동로마에 갔으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왜 스스로 고생길을 택했는가...
어쩌면 이들은 로마가 진정 타락한 사회이며, 국가나 가문의 영광보다 내세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긴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실제로 아우구스티노는 그 자신이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타락과 죄악을 비판했고, 로마의 정복전쟁이나 야만족들의 로마침략이나 하등 다를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인이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죄악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영광과 야망은 모두 덧없는 것이고 신 앞에서의 순결함과 고결함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발레리우스 부부, 이들은 과연 구원을 얻었을까요?
역사의 조연도 안되는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흥미로운 일화입니다.
PS. 여담이지만, 스페인과 영국 땅에 위치한 토지는 로마 현지에서 어떻게 처분하고 현금화시켰는지 궁금하네요.
그만큼 뭔가 신용제도가 발달해있었던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