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리뷰] 기생충(2019) - 생환은 관객의 몫이다
봉준호의 세계에서 '수직 공간'에 대한 암시와 집착은 노골적이다.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입주민과 아파트 지하실의 경비원, 노숙자의 공간적/계급적 대비가 선명했던 <플란다스의 개>가 대표적이다. 또한 <괴물>에서는 지상(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서민 가족과 고층 SK빌딩에서 생활하는, 성공한 운동권 선배가 등장하고 한강 하수구 지하공간을 은신처로 삼는 음침한 괴물이 등장한다. 이렇듯 봉준호 감독은 수직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계급 구조를 손쉽게 형상화한다. 심지어 <옥자>에서조차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의 생활공간인 초고층 빌딩 상층부의 환한 햇빛과 옥자가 감금된 지하실험실의 짙푸른 색감이 극명한 시각적 대조를 이룬다.
영화 <기생충> 또한 박사장(이선균) 내외의 저택의 구조 자체가 사회적 계급 구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박사장의 저택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다층적인데, 우선 부유층 가족들이 생활하는 지상 1~2층이 있고, 집사인 문광(이정은)이 주로 드나드는 지하 1층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문광의 남편이 숨어 지내는 지하 벙커가 존재한다. 이른바 '지하의 지하'가 존재하는 격이다. 이는 현실의 계급 구조와도 맞닿아있다. 그리고 이 지하 벙커와 지상을 오가며 두 공간을 잇는 연결고리 같은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집사 문광이다. 지하 벙커에 기생하는 그녀의 남편이 실패한 하층민이라면, 문광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하여 부유층의 경제적 부스러기를 맛보는 성공한 하층민 정도 되겠다. 겉으로 보기엔 박사장네 가족과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자며 함께 생활을 공유하지만 문광은 그들과 근본부터 다르다. 기정(박소담)과 기우(최우식)의 말처럼, 집주인이 안보는 곳에선 안주인처럼 행세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을 흉내 내는 그녀이지만, 영교(조여정)의 말 한마디에 직장을 잃고 쫓겨나는 파리 목숨 같은 존재. 이것이 문광의 처지이자 현실이다.
부유층 가족에게 비현실적인 단체 사기를 치는 기택(송강호)의 가족보다도, 아예 지하 벙커에 숨어살며 집주인을 동경하는 근세(박명훈)보다도, 어쩌면 이 '문광'이란 캐릭터가 가장 현실적인 기생충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파리 목숨 같은 끈을 부여잡고 부양의 의무를 짊어지고 스스로 생존하고 생존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처절히 읍소하고 때로는 맹렬히 겁박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어가는 내 식구 살리자고 모든 걸 다 제쳐두고 비바람 치는 야밤에 주인집 초인종을 수없이 누르던 그녀의 피멍든 얼굴은 어찌 보면 애처롭다. 그전까지 이어지던 작품의 블랙 코미디 분위기를 단번에 스릴러로 바꿔버리는 초인종 화면 속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등장은, 그 순간에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웠지만 이제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안타깝고 애잔하다. 심지어 그녀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기까지 해서 발길질 한방으로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만든 충숙(장혜진)을 좋은 사람이라고 두둔하기까지 한다.
마음 줄 곳 많아 슬픈
영화 <기생충>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마음 줄 곳 많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학창시절 반지하 집에서 살았던 개인적 경험 때문일까,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기택네 가족의 일상이 남일 같지 않았다. 특히 기택의 집 구석에 처박히듯 방치돼있던 엔티크한 흰색 화장대가 인상깊었다. 모든 가족이 직업을 잃어버린, 몰락한 백수 가족이지만 그들도 한때는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던 멀쩡한 사회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이 화장대가 말해주는듯 했다. 꼭 반지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구질구질한 삶의 밑바닥을 직면하고 해쳐내며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택네 가족의 행보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좋은 유괴'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존을 위한 이들의 '착한 사기'는 자못 우스운 블랙 코미디로 포장되어 관객들의 마음속에 이질감 없이 스며든다. 이른바 봉감독 특유의 ‘버스 태우기’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LEE :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연이어 보여주는 프롤로그 이후, ‘괴물’이라는 제목이 뜨고 나서의 첫 쇼트를 잠든 강두의 코믹한 얼굴 클로즈업으로 표현하셨죠. 그 부분에는 배우 송강호씨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와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처음부터 풀어주고 시작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거, 유머러스한 송강호씨가 주인공인 영화니까 심각해질 필요 없이 그냥 즐겁게 보시면 돼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초반에 괴물의 난동을 화끈하게 보여주신 것과 함께 관객의 관람 방식에 대한 감독의 주문 같은 게 담겨 있다고 할까요.
BONG : 그 두 장면은 뭐랄까, 관객을 버스에 태우는 행위 같은 거죠. 일단 관객을 태우고 나서 그 이후에는 제가 데려가고 싶은 곳을 향해 맘대로 운전하려는 속셈이라고 할까요.(웃음)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 때는 그런 걸 몰랐던 것 같아요. 관객이 올라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처음부터 맘대로 움직였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中)
그러니까 영화 초반, 적절한 유머가 동반된 이들 가족의 단체 사기 행각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이것이 일종의 '사회 시스템을 향한 정당방위' 쯤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즉, 악인이 아닌 평범한 부유층 가족을 얄팍하게 속이는 이들의 사기 행위가 보는 입장에서 통쾌하진 않아도, '그래, 사회가 이런데 저렇게라도 먹고살아야지.', '현실이 팍팍한 걸 어쩌겠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 달까. 이렇게 주인공 가족의 사기극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던 어느 순간, 문광의 초인종씬 이후 스릴러로 바뀌는 극의 흐름은 장르의 급변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급물살을 탄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문광 내외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되고나서부터는 그들의 입장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기생하려 드는 기생충과 기생충의 처절한 싸움의 와중에 어느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기 어려운 찝찝하고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이들의 다툼이 문광의 죽음과 이로 인한 무차별 살인으로 폭발하는 결말부에 가서는 황당한 죽음을 맞이하는 박사장의 입장에까지 이입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적당히 위선적이고 체면을 따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배려하듯 경멸하는 박사장의 모습은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의 행동양식과도 겹쳐지는 면이 있다. 그러니 박사장 내외의 행동이 마냥 한심하거나 밉지가 않다. 더군다나 ‘따지고 보면 박사장 내외는 무슨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나면 악인은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버린 결말에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그래서 <기생충>은 처음엔 우습다가 중간에는 기괴하고 무서웠다가 결국엔 숙연해지고 씁쓸해지는 그런 작품이다. 비교하자면, 비슷한 류의 계급 투쟁적 시각을 담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고 차가운 '거리두기와 관조'를 유지하며 단 한순간도 관객의 감정이입과 캐릭터에 대한 동화를 허락지 않는 <복수는 나의 것>과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있다. <기생충>은 무섭도록 몰입하게 만들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깊숙하게 명치를 찌른다. 즉, 전쟁에 비유하면 치가 떨리도록 무시무시하고 치열한 난타전이자 근접전이다. 관객을 포탄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몰아넣고 어떤 상처나 트라우마가 생기든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는 식이다. 결국 생환은 관객의 몫이다.
봉준호의 푼크툼(Punctum)
[LEE : 디테일이 뛰어나다고 해서 한때 ‘봉테일’이란 별명으로까지 불리셨잖아요? 워낙 치밀하고 꼼꼼하게 연출을 하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BONG :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감독들은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웃음) 그리고 저라고 해서 언제나 디테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테일에 집착할 때는 그게 핵심에 연결되어 있을 때만 그렇게 해요. 사진 예술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책에 등장하는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모습을 찍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서, 그 사람의 구체적인 표정이나 자세보다 신고 있는 운동화의 끈이 풀려 있는 게 이상하게 가슴에 남을 때가 있다는 거죠. 그 풀려진 운동화의 끈이 사진에서 툭 튀어나와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느낌말입니다. 저는 연출할 때 인위적으로 그런 푼크툼을 만들려고 해요. 그럴 때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거죠. 달력 날짜가 맞는지, 이전 장면에서와 물건의 위치가 동일한지 같은 것은 사실 별로 신경 안 써요. 예를 들어 지금 이기자님이 제 앞에 앉아 계시는데, 저는 안에 받쳐 입으신 면 티셔츠를 보면서 저게 저 사람의 스타일을 말해 준다고 보는 거죠.(웃음) 다시 말하면 저는 디테일이라서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런 디테일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中)
위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기생충>에도 봉준호 특유의 ‘연출적 푼크툼’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그 수많은 장면들 가운데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박힌 조각들은 무엇일까. 우선 근세(문광 남편)의 지하실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혀있던 경찰학, 법학 관련 서적들이다. 기택의 시선으로 빠르게 훑고 지나가며 화면이 전환되는 사소한 장면이지만 그 책꽂이에 빼곡한 서적들에서 이 남자도 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젊은 시절 남들처럼 노량진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경찰 또는 법학도의 꿈을 키웠을 지도 모를 그의 앳된 얼굴이 그 책들 위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듯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두고 엄청 요상하고 특이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선을 긋던 내 마음의 경계를 이 짧은 장면 하나가 허물었다. 두번째 장면은 지하실에서 기우와 근세가 수석을 가지고 서로를 죽이고 피하려 악다구니를 치는 와중에 1층 잔디밭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성악곡을 노래하던 장면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며 이것이 너희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고 현재 우리네 삶이라고, 봉감독이 직접 말해주는듯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푼크툼은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 중반 초인종 화면 속에 등장한 문광의 멍든 얼굴과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다. 비 맞은 생쥐 꼴의 기괴한 표정으로 "제 후임으로 오신 아주머니시구나~ 그죠~?"라며 소름끼치도록 깔깔거리던 검푸른 화면 속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 순간엔 엄청 찜찜하고 무서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죽어가는 남편 목숨 살리려고 어떻게든 살갑게 비벼보려던 한 여자의 안쓰럽고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니, 그 웃음소리는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이기도 하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봉준호 감독이 참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문광 아줌마의 얼굴과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쨌든 작품으로부터 현실로의 생환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