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서귀포로 옮겨오면서 당황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갑작스레 더워진 날씨 탓인지, 아니면 서귀포가 따뜻한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제주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파리와 모기가 갑작스레 늘어났다. 공천포 해변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가 파리 십여 마리가 무리를 지어 공중곡예를 벌이고 있는 바람에 당장 뛰쳐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위생적인 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다. 딸아이는 모기 알레르기가 있다. 모기에 한 대만 물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린 곳이 오백 원짜리 동전 두세 개 정도의 크기로 탱탱하게 부어오르며 때로는 고름까지 생긴다. 아내도 정도는 조금 덜할망정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장모님으로부터 아내를 거쳐 딸아이까지, 삼대가 모두 동일한 증상으로 고생 중이다. 유전자란 참으로 무섭다.
그래서 아이는 오늘 아침부터 간지러움과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약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알레르기가 눈 녹듯 스르륵 사라지진 않는다. 아이의 칭얼거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걸 받아주는 아내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녹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의 일정은 평소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천포 해안가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카페 숑]이 추천할 만하다. 와플은 한 끼 식사를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초코 음료는 풍부한 당분으로 정신을 건강하게 해 준다. (물론 육체의 건강에는 해롭다. 두 마리 양을 동시에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곳에서 아침 커피로 정신을 맑게 한 후에 [피규어뮤지엄]으로 향했다. 이곳은 분야를 막론하고 이른바 서브 컬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오타쿠 기질이 있는 사람에게 강력 추천한다.
[오설록 티뮤지엄]은 항상 그렇듯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그 많은 관광객이 어디로 가 있나 했더니 죄다 이쪽으로 온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곳이 마뜩찮다. 그저 유명한 곳이기에 사람이 많고 사람이 많기에 유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설마하니 이 사람들이 모두 차 박물관의 다기를 보러 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왔다고 하면 약간이나마 납득은 가지만. 이렇게 투덜거리는 나는 사실 오설록이 아니라 그 옆에 온 것인데 하필이면 9월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걸 몰랐던 탓에 뜬금없이 이 엄청난 인파에 머릿수를 더하고 말았다.
제주도에서 돼지고기를 먹을 때는 [칠돈가]를 추천한다. 사실 이곳은 딱히 맛집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지역 프랜차이즈 돼지고기집일 뿐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 즐거운 표정으로 맞아 주었고 식탁과 의자는 깔끔했으며 고기를 구워 주는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아마도 QM이 잘 되는 프랜차이즈인 모양이다. 아니면 더 가능성 높은 정답은, 단지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겠지. 하지만 사람은 원래 확증편향의 동물이기에 나는 칠돈가를 항상 즐겨 찾는다.
다소 일찍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 제주를 떠나기 전날 밤에 드디어 천문대를 찾았다. 그간 계속해서 구름 투성이였던 하늘이 드디어 갠 까닭이다.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으로 가는 1115번 도로는 낮에는 정말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데 해가 진 후에는 몹시 으슥하고 겁나는 길이 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망원경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무서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딸아이가 아직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우리 세 가족은 이곳을 방문했다. 아무 생각 없이 왔고, 아무 생각 없이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가 토성의 고리를 직접 관찰한 순간 이곳은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장소가 되었다. 그날 내가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제주도의 날씨란 워낙 변화무쌍해서, 심지어 당일 저녁에조차 그날 천문 관측이 가능할지 아닐지를 확답할 수 없었다. 날이 맑아서 천문대를 방문했다가 그세 구름이 끼는 바람에 헛걸음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주변의 불빛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딸아이와 함께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목동자리 아크투러스와 처녀자리 스피카, 거문고자리 베가를 광학망원경을 통해 직접 보는 건 무척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실로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계절이 맞지 않았는지 토성 관측은 할 수 없었지만 제주도를 떠나기 전에 벼르고 벼르던 천문대에 들를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반쯤 잠들었다. 침대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힌 후, 두 여인이 코를 골고 있는 가운데 이렇게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제 내일이면 배에다 차를 싣고 제주도를 떠난다. 보름이란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가 보려 했지만 가지 못한 곳이 많고, 글로 쓰려 했지만 쓰지 못한 곳도 많다. 하지만 여행을 끝내는 감흥은 내일 다시 정리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글을 마쳐야겠다. 키보드 소리에 아이가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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