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맘때였지 싶다.
그 가슴 아린 사건(?)이 일어난 계절이 말이다.
한여름으로 넘어가기 전, 보리를 타작하고 모내기를 준비하던....그 시기.
당시 시골 중학교 교사 2년 차(방년 25세)였던 나는,
하루하루를 가열차게 보내는 중이었다...아니,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고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를 치르던 시절에 3학년 5반 담임이었으니까.
주 6시간 보충수업과 4시간 야간수업을 포함하여, 주 40시간 수업.
그야말로 강행군의 나날이었다.
의욕만 앞선 불량교사.
오리발에 모터를 달아논 듯... 짧은 다리에 미칠듯한 스피드로
하숙집에서 학교로.. 교무실에서 교실로 오가며
영양가 없이 에너지만 뿜어대었던 나날들.
실력없는 교사가 흔히 그러하듯.. 낭창거리는 대뿌리 회초리도 늘 휴대했었다.
그 때에나 지금이나 내가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기사 저 철없던 시절에 좋은 선생님이라니....
떠올리기 부끄러운 일은 내가 기억하는 것, 그 몇 가지 뿐이기를 ... 바랄 뿐이다.
그 날도 나는,
선생님들이 대부분 퇴근하시고난 교무실에 혼자 남아
다음 주 야간수업에 교재로 쓸 1,2학년 복습용 문제를 출제하고 있었다....라기 보다,
문제집에서 문제를 가려뽑고 있었다.
그 때, 연구부 주임이자 대학 선배이자 3학년 3반 담임인 허선생님이 교무실로 들어왔다.
도움 안 되는 선배이긴해도 사람은 양반이다.
허선생 : 아이고~ 뭘 그리 애쓰요. 대충 가르쳐. 다아 소용 읍써요. 할 놈은 지가 알아서 해여.
나 : 그래도요....
허선생 : 근데... 이선생.... 사실.. 물어볼 말이 있으요. 이 시간에 혼자 있지 싶어서 다시 나왔지.
나 : 예에? 무슨 ?
허선생 : 아아니이... (머뭇거리다가) ..그냥 단도직업적으로 (직입인데..) 말하지. 사귀는 사람 있쓰요?
나 : 예에?? 호호호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습니꺼.
허선생 : 아아니니... 이선생 알다시피 여기가 내 고향 곳 아니요. 그래서 내한테 부탁을 하더라고.
나 : ???
허선생 : 지난 주 주번교사가 이선생이었제 ?
나 : 예에.. 근데 왜요?
허선생 : 그래, 인상착의가 이선생이더라고..... 주번학생들에게 교문 앞 청소 지도를 하는 이선생을 본 모양이요.
나 : 누가요?
허선생 : 누군 누구야. 총각이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선생을 봤는데, 첫눈에 반한 모냥이더라꼬.
나 : (풉 !! ) 깔깔... 뭘... 첫눈에 반합니꺼. 스치는 차창 밖으로 뭘 제대로 봤다고요?
허선생 : 아니라니까. 문중 사람이 우리집꺼정 찾아와서 부탁을 하더라니깐. 그간 그 총각이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처녀가 없었대요오~
그래서 지금 문중 어른들이 교장선생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 우짜나.. 의논이 많다더라고.
나 : (솔깃) 그리 대단한 총각인가요 ?
허선생 : 아, 나는 그리 생각해 근데.....(주저주저) 이선생이 미리 알아야할 사항이 네 가지나 있는 게 문젠데...
나 : (호기심) 일단 알고 봅시다.
허선생 : 쓰읍.... 그게.... 총각이 무학無學...아니 학교 졸업장이 업써. 즈그 할배....아니, 그 어르신이 손자를 아예 학교에 안 보냈거든.
나 : (황당) 아니, 국민학교도 졸업 못 했단 말입니까. 요새 그런 사람이 있어요?
허선생 : 아아니이... 그래도 사서삼경 통달하고 우주 천문학까지....
나 : (말 끊고 쏘아보며) 그 다음 알아야할 사항은 뭐지요?
허선생 : (당황) 그라고... 나..나이가 좀 많아요. 서른 셋인가...넷인가... 그래서 지금 문중이 난리났지.
총각 입에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은 처녀가 있다 캤시니..
나 :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며) 혹시.... 종손인가요?
허선생 : 아, 맞아 맞아, 종손이야. 그래서 제사가 좀 많지.
나 : (이 작자가 미쳤나 걸칬나아.....분노를 억누르며) 또 뭐를 알아야 합니까. 뭐가 더 남았죠?
허선생 : 혀..현재 마땅한 직업은 없어... 그래도 46칸 고택에다가... 부산 서면에 빌딩이 있...
나 : (분노 폭발 직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선배고 나발이고 퍼붓고 싶지만 가까스로 참고)
무학에!! 무직에!! 그래도 어찌 주거부정은 아닌지 !!
(주섬주섬 챙겨서 교무실을 나서며) 가서 전하세욧 !! 언감생심 !! 어따 대고!!
허선생 : 아니 아니 이선생, 이선새앵 ~~ 해줄 말이 더 있는데 .... 이기 더 중요한데....
하숙집이 학교 앞이었기 망정이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어찌 돌아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방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부들부들 거렸다.
왜 너같은 좌식이 나한테 감히 반하냐며... 그 이유로 그 종손놈을 공개적으로 조질 수는 엄꼬,
여튼 꽃답지는 않아도 방년 25세 처녀였던 나는, 짓밟힌 자존심으로인해 며칠을 분노로 떨었었다.
그 날 이후 당연히 허선생님을 외면했다. 책상이 마주 보고 있는데도.
불편한 가운데 그러구러 ...시간이 보름쯤 흘렀나...
토요일 오후
다른 여선생님들은 모두 오후 2시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혼자 6시 버스를 타기 위해 상록수 다방 앞에서 기다리는데.... 문득 옆을 보니 허선생님이 서 있었다.
허선생 : 우예됐건... 미안하구먼. 이선생 입장을 미처 생각 못했어. 내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모 뭐 하노...
(그러다가 새마을 구판장 쪽을 보다가)
어 !!! 성래가, 성래가 저기 오네. 이선생한테 차이서 그런가... 수척해 보이네.
아...아... 그를 본 순간, 시간도 공간도 멈추는 듯했다.
연한 옥색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그가 이쪽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옛사람의 글이나 기록을 접할 때마다 막연히 그려보던 옛 선비의 모습, 바로 그 모습과 그 분위기와 그 풍채였다.
전생 전전생 그 어디메 한 번쯤은 인연으로 맺어졌지 싶은, 저 낯익은 준수함.
지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잠시 나를 일별하던 그 시선.
서 있기가 힘들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 땅 밑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데 허선생님이 버스 왔다고 일러주었다.
자리를 잡고 차창밖을 보니 그는 이미 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이후 그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우연히 단 한 번만이라도 마주치기를 그토록 열망했건만,
잔인하게 내쳐버린 인연의 끈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한 정보는 원치 않아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고택의 서가를 둘러본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그러셨다나...
그 젊은이 학문이 상당히 깊더군...
근데, 무학이라니.. 무학이라니... 무학이라니이이 ~~~
나는 분노로 부들거렸던 그 며칠의 수십 배에 달하는 나날을, 가슴을 치며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막판엔 꼭 허선생님을 원망했다.
표현을 꼭 그리 할 수밖에 없었는가. 제대로 좀 전해주지. 그리 전달력이 없는가...등등.
2학기가 시작되고 바람결이 차가워질 때쯤에야
나는 비로소 그 비껴간 인연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긴 되었다.
그럼에도 ..
그 이후 40년 가까이....
연한 옥색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오던 그의 그 한 컷은,
문득 문득... 수도 없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심히 감상적인 글이 되고 말았군요.
오늘에야 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미 7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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