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2/03 06:50:57
Name
Subject [일반] 스페인에서 온 편지 (수정됨)
안녕!
나는 지금 안달루시아의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좁은 2차선 도로 위에 있어. 한시간을 넘게 달렸는데도 키가 작은 올리브 나무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계속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바람은 여전히 막 구운 토스트처럼 따뜻하고 바삭해. 우리 가족은 평원의 조각 구름같이 느릿느릿 여행 하고 있어. 눈 앞에 반짝이는 모든 것들을 찬찬히 담고, 매 순간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포옹하면서, 웃고 울고 떠들며 다녀. 우리는 도시를 둘러볼때 말고는 각자 시간을 보내. 나는 경치 좋은 곳에서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 짧은 시간에 마음의 여백이 제법 생겼어.

지난 며칠은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랑 게야 시에라라는 작은 산간 마을에 머물렀어. 만년설이 덮힌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공기도 청량하고 경치도 아주 근사해.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이슬람 세력이 남아있었던 곳이야. 이슬람 건물들을 파괴하지 않고 유럽식으로 덧대어 사용해서, 그때 유적들이 대부분 남아있어. 이슬람식 궁전 앞 바로크식 종탑 그 너머로 알프스 같은 설산. 특히 알람브라 궁전 망루에서 보는 도시 전경은 그림같아. 저녁에는 집시들이 모여산다는 언덕에 매일 찾아가. 조금 위험하지만 궁전이 마주보이는 야경이 아주 훌륭하거든. 그런곳에 있을때면 나는 역사의 우연이나 옛 사람들의 삶 같은걸 상상하게돼. 왕의 삶과 집시의 삶, 카톨릭과 무슬림의 삶 그리고 그들이 봤을 같은 도시 안 다른 세상.

어제는 한참 앉아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알리칸테 농장에서의 철 없던 시절이나 순례길을 걷던 스페인에서의 시간들을 생각했어. 어쩌면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았을 몇개의 선택들도. 그럴때면 나는 그동안 삶의 선택들을 만들어왔던 두개의 모순된 모습을 봐. 나는 온 도시를 발 아래 두고 세상을 바꾸는 왕이고 싶었고 또 자유롭게 거리를 떠도는 음유시인이고 싶었어. 하지만 여기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으려고해. 그냥 눈 앞에 찬란한 풍경으로 하루를 채울 뿐이야.

일주일이 정신없이 가버렸어. 벌써 한참 지난 것 같아. 한국은 이제 오늘부터 연휴 시작이지? 눈이 많이 왔다고 들었어. 소식 들려줘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사나없이사나마나
19/02/03 09:43
수정 아이콘
이 편지는 스페인의 큰 평원 어느 도로 위에서 시작되어...
Zoya Yaschenko
19/02/03 09:50
수정 아이콘
비오는데 하...토스트 만들 식빵사러 가야겠네요.
내가뭐랬
19/02/03 12:34
수정 아이콘
좋겠다..나두 데려가줘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985 [일반] 병원 당직중입니다(그리고 간단한 의료상식) [68] 걸스데이민아14259 19/02/03 14259 35
79984 [일반] 남녀 임금격차에 대한 짧은 생각 [116] 삭제됨15066 19/02/03 15066 2
79983 [일반] 버닝썬측 공식 입장 발표에 따른 삭제 [169] 준벙이26771 19/02/03 26771 21
79982 [일반] 스페인에서 온 편지 [3] 7586 19/02/03 7586 8
79981 [일반] 성범죄 통계를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24] 라임트레비12676 19/02/02 12676 30
79980 [일반] 세계 첫 출산율 0명대...정부 "출산율은 더 이상 목표아니다" [360] 군디츠마라28870 19/02/02 28870 9
79979 [일반] 어떤 증거를 찾아야 성범죄 무죄가 나올수 있나요? [113] lexial16318 19/02/02 16318 30
79978 [일반]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생각해 본 sky 캐슬의 진주인공 [24] 위버멘쉬10150 19/02/02 10150 23
79977 [일반] 눈 보고 싶어 다시 간 주문진 여행 - 꾹저구탕과 도깨비해변과 커피 [19] mumuban7804 19/02/02 7804 5
79976 [일반] 슈퍼볼 53(Super Bowl LIII) 프리뷰 (약스압) [63] Danial12466 19/02/02 12466 28
79975 [일반] 스카이 캐슬 20회 감상. [77] 펠릭스30세(무직)14402 19/02/02 14402 18
79974 [일반] 수소차에 대한 글을 쓸려다 팟케스트 추천글 [33] Bulbasaur8410 19/02/02 8410 1
79973 [일반] 오늘부터 전 장병이 일과후 (제한적)외출 및 폰 사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166] 졸린 꿈15167 19/02/01 15167 24
79972 [일반] 강경파가 득세하고 온건파가 몰락하는 경향 [18] 삭제됨10648 19/02/01 10648 36
79971 [일반] 넷플릭스 킹덤 후기 - 노스포 [27] Jun91111136 19/02/01 11136 3
79967 [일반] 안희정 무죄 뒤집어졌다···2심서 징역 3년6월 구속 [316] 고통은없나25302 19/02/01 25302 4
79966 [일반] 정말 재밌는 중동의 '삼인지' : 소설 "사마르칸트" [32] Farce9100 19/02/01 9100 20
79965 [일반] 20살의 내가 느꼈던, 그리고 30대가 되고 달라진 내 정치관과 생각들. [74] 삭제됨9805 19/02/01 9805 22
79964 [일반] 김경수 도지사의 옥중서신 [53] 어강됴리12423 19/02/01 12423 10
79963 [일반] 미국 주요 대도시 인종비율 [26] attark19443 19/02/01 19443 3
79962 [일반] 새해복많이받으세요 [데이타주의] [29] 전직백수7202 19/02/01 7202 12
79960 [일반] 북한 관련 뉴스 몇개 [4] LunaseA10858 19/02/01 10858 1
79959 [일반] 20살의 내가 느꼈던, 그리고 33살의 지금의 내 달라진 가치관과 생각들의 혼란스러움/부록 87년생 김철수 [115] 뮤지컬사랑해12403 19/02/01 12403 6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