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2/30 12:43:11
Name 해피어른
Subject [일반] 육아의 어려움 (수정됨)
편의상 평어로 기재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어느 주말 저녁 아내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유치원에서 작성한 우리아들 발달 상황표인데 어머님이 주시더라 한 번 읽어봐봐"
아들은 생후 30개월로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유치원에서 정기적으로 발달상황을 체크해서 학부모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피곤하고 귀찮았지만 -_-;;;
대학교 이후 오랜만에 보는 성적표이기에 -_- 거실에 나와 쇼파에서 TV를 보시던 어머니 옆에 앉아 차근차근 읽어봤다
(직장 관계로 저와 와이프는 지방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가 얘를 봐주시는데 주말마다 어머니 집에 갑니다)

처음 본 아이 발달 상황표는 참 낯설었다
발달 상황표은 상 중상 중 중하 하의 5단계로 구분하여 아이의 각종 발달 상황을 체크하였는데
언어발달이야 말이 느린 터라 각오했었지만 역시 중하 였고
대부분의 발달 상황은 중으로 가득차 있었다 -_-
굳이 중상 이상을 찾아본다면 '노래하면서 춤을 출 수 있다'에 상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사실 그동안 살면서 본 성적표는 내 성적표 뿐이었다.
(당연히 인생에서 다른 사람 성적표를 볼 일은 거의 없다 -_-;;)
난 공부를 잘했으므로 -_-;; 그동안 내가 받은 성적표는 대부분 '수'였고(간혹 몇 년에 한 번씩 '우'가 있었을 뿐이었다)
중고등학교때 받은 적성검사에서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위 1% 안에 들었었는데 -0-;;;
진짜 이런 성적표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것이었다 -_-

내 아들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남 몰래 기대는 했었던 것인지 낯설음과 실망감이 들었다
평소 TV를 통해 이럴 때는 실망하는 티를 내면 안된다고 학습하였지만 실망스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0-
국어에서는 꼴찌하고 체육과 음악에서 수를 받은 셈인데 칭찬해야 하나 -0-;;

복잡한 심경 속에 앉자 있는데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해맑은 표정-_-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손자가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역시 상이더라."
그러면서 아이 발달 상황표를 빼앗아 가시더니 읽기 시작하셨다
"두 조각 이상 퍼즐 맞추기를 잘 하는데 이건 왜 중으로 되어 있지?" 혹은
"우리 손자 정말 뜀박질을 잘 하지, 우리 손자 잔정이 많은데 선생님이 역시 잘 보았네" 등으로
잘한 것은 진심이 느껴질 정도로 칭찬하고 -_-;;;;;
잘 안 나온 것은 선생님이 잘 모른다고 탓하거나 -_-;; 아직 어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얘 기죽이지 마 이렇게 잘하는데 칭찬해야지"

사실 어머니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많이 배우고 능력있는 외삼촌, 이모들과는 달리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 딸로서 그닥 치열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_-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에도 소시민스런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와 누나는 친척들 중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고 -_-
능력있는 외삼촌과 이모는 종종 어머니에게
"넌 얘들 속 안썪이는게 얼마나 복인 줄 모른다 내 속 평생 모를 거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아마 그 분들은 별 생각없이 살아 왔고 항상 경제적으로 치이던 막내 여동생의 아들 딸이 왜 공부를 제일 잘하는지 이해가 안되었을 것이다

사실 부모님은 소위 능력있는 분들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 딸로서 생각없이 -_- 살다가
외할버지께서 제발 대학교를 가라며 등록금만 내면 갈 수 있는 학교에 보내주셨으나 중간에 그냥 나왔다
(지금도 어느 대학교를 다녔는지 절대 말씀 안해 주신다 -_-)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평범한 학교를 졸업한 뒤 소시민 답게 아둥바둥 살다가 회사의 정치에 밀려 나왔고 사업을 하다가 역시나 망했다 -_-

그들은 교육학 책을 한 권도 보신 적이 없고 주로 TV에서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를 봤지만 -_-;;;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교육학의 대가였다

어머니는 나나 누나가 잘못한게 있으면 불같이 혼냈지만 항상 나와 누나를 칭찬하고 믿고 지지해 주었다
아버니는 바람을 피고 사업을 말아먹었지만 -_-;;; 내가 학원에서 늦게 끝나면 추운 밖에서 기다렸다가 노점상에서 함께 오뎅을 먹곤 하였다
그들은 항상 자식들을 믿고 사랑해주었으며 부부관계는 어땠을지 몰라도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내가 대학교에 가서 방황하고 오래 고시 공부를 할 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식들을 믿고 지지해 주는 것, 자식들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많은 능력이 필요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도 아버지가 되어보니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다

내 아이는 나와 와이프 덕분에 적어도 내 어릴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고 있다
먹고 싶은 것들을 먹고 입고 싶은 것들을 입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잘 살고 있다

그렇다고 나와 내 와이프가 내 부모님보다 더 좋은 부모일까?
얘 성적표를 보았을 때 나처럼 실망감을 애써 억누르는 부모보다는
잘한 점을 칭찬해주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격려를 해주는 부모가 더 낫지 않을까?
지금처럼 주말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돈을 적게 벌더라도 항상 함께 있는 부모를 더 원하지 않을까?

자녀에게 헌신하는 삶이 바람직한 삶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부모님처럼 아이에게 헌신하거나 믿거나 지지해 줄 자신이 없다

정말 부모가 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패마패마
18/12/30 12:55
수정 아이콘
발달표는 크게 뒤쳐지거나 크게 앞서가지 않는다면 그리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크크
18/12/30 12:56
수정 아이콘
추천 박고 갑니다.
모든 부모님은 위대합니다. 존경받아 마땅하고요. 화이팅입니다.
너에게닿고은
18/12/30 13:03
수정 아이콘
좋은 부모님이 되시는걸 고민하신다는 거 자체가 이미 좋은 부모님이라고 생각됩니다.
날씨가더워요
18/12/30 13:14
수정 아이콘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이 생각나네요. 아직은 현재진행형인 고민이지만 해피한 결말이 나길 바랍니다. 화이팅!!
ioi(아이오아이)
18/12/30 13:17
수정 아이콘
해피어른님이 좋은 자식이기 때문에 좋은 부모가 된거라고 봅니다.
공부를 잘해서, 능력이 좋아서 아니라 아버지가 바람을 펴도 쿨하게 말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서요.


그런 아량은 육아에 필요한 능력치라서 님도 충분히 좋은 부모가 될 껍니다.
18/12/30 13:18
수정 아이콘
육아는 해본적 없고 육아받은 기억만 있는 입장에서..

저도 말 늦게 터져서 부모님이 걱정 많이 했는데, 정작 수능때까지 공부안해도 점수 잘 채워주는 효자종목은 언어영역이었죠. 너무 어릴때 성적표는 그렇게 신경쓸필요는 없고, 기본인성쪽으로만 신경쓰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육아가 어려운건 드라마나 소설속에 나오는 자녀에게 공부스트레스만 주는 부모만 잘못인게 아니라, 그냥 잘한다 잘한다 하는 부모도 잘못이 되기 쉽기 때문이겠죠. 저도 고등학교때 부모님이 조금만 더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었다면?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하거든요.

단순히 공부해라 공부해라 압박만 주는것, 그냥 잘하리라 믿고 말없이 지원만 해주는것. 이거는 둘다 비교적 쉬운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어려운건 균형을 맞추는거고 가장 바람직한것도 자녀의 개인성향에 맞춰서 균형을 맞춰서 통제하는거죠. 말그대로 말로만 쉬운일이겠죠 크크
처음과마지막
18/12/30 13:26
수정 아이콘
유치원 성적표 가지고 너무 호들갑은 아닐까요?
18/12/30 13:41
수정 아이콘
호들갑 맞습니다
근데, 알면서도 잘 안되요 크크
아스날
18/12/30 13:34
수정 아이콘
가급적이면 육아는 부모가 하는게 좋더군요..부모님이나 처가집에서 애 잠깐봐주는데 확 티가 납니다.
어쨋든 육아는 어렵습니다.
케갈량
18/12/30 14:34
수정 아이콘
어릴때일수록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무조건 많아야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데...
치열하게
18/12/30 13:49
수정 아이콘
상황 묘사에서 받은 느낌을 말씀드리면 어머님과 글쓴이분의 차이는 개인 성향도 있겠으나 '아이를 얼마나 아느냐'와 '안다고 확신하느냐'도 작용하는 거 같습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차이로 들어오는 정보량도 다르니 기초 정보 (아이와 부모는 닮는다) 외에 추가 정보 (아이의 성격 등)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이럴 거 같았는데 다르네'와 '우리 손주가 이랬는데 역시나'로 반응이 갈린 거 같습니다. 아이에 대한 정보량이 많으셨다면 의외란 느낌이 크게 안 드셨을지도요.
시설관리짱
18/12/30 14:07
수정 아이콘
8개월인데 죽것네요. 유치원만가도 소원이없겠다는...
18/12/30 15:53
수정 아이콘
250일 막 넘긴 아들아빠입니다.
말귀만 알아들어도 소원이 없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ㅠㅠ
18/12/30 14:08
수정 아이콘
자식들을 믿고 지지하는 것은 커다란 인내심과 깊고 넓은 혜안, 그리고 (선대로부터 받았든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했든간에)충분하며 건강한 자기애가 모두 갖춰져야 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요건은 거의 福에 가까운 거라 영리한 사람이라도 갖추기가 쉽지 않죠… 딴에는 머리 좋다는 사람들도 부모로서는 잘못하는 경우를 참 많이 봐왔는데, 진정으로 자식을 믿고 지지하며 헌신하신 분(과 그 성과라 할 수 있는 자식)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존경의 눈으로 우러러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장모님을 존경합니다. 빌드업 완료.
이른취침
18/12/30 16:52
수정 아이콘
아니 여기서 생존각을 보시네.. 허허 참
18/12/30 14:48
수정 아이콘
알아서 잘하니까 믿고 지지하게된걸수도 있습니다^^;;
18/12/30 17:14
수정 아이콘
T T
프로그레시브
18/12/31 12:59
수정 아이콘
지금(유년기)의 성적표에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561 [일반] 서울 대형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를 찔러죽인 환자 [29] 치느13836 19/01/01 13836 0
79559 [일반] 2번째 통풍발작후기 [16] 읍읍10796 19/01/01 10796 0
79558 [일반] 올해의 목표... 다들 얼마나 이루어지셨나요? [29] Goodspeed6429 18/12/31 6429 4
79557 [일반] 운영위원회는 왜 열었는지 모르겠네요 [72] Jun91112222 18/12/31 12222 15
79556 [일반] 민주당 vs 자한당 역대 여성부 장관들의 출신 해부 분석. [128] 마재11396 18/12/31 11396 19
79555 [일반] 한국(KOREA)에서의 생존법 [16] 성상우8289 18/12/31 8289 4
79554 [일반] 2018 히어로 영화 및 작품들 소감 [14] 잠이온다6574 18/12/31 6574 1
79552 [일반] 무심코 뽑아본 2018년에 즐겨 들은 음악 [5] KOZE4996 18/12/31 4996 4
79551 [일반] 과연 성차별문제 해결을 위해 중년층이 대가를 치뤄야 할까? [85] 유소필위9198 18/12/31 9198 1
79549 [일반] 올해의 영화는 무엇인가요? [64] 작고슬픈나무7671 18/12/31 7671 1
79548 [일반] 2019년 개통 예정인 수도권 전철역 [24] 光海10077 18/12/31 10077 6
79547 비밀글입니다 차오루17134 18/12/31 17134 32
79546 [일반] 일본이 레이더 갈등 홍보영상을 영문판으로 제작해서 유튜브에 홍보했습니다. [48] retrieval10119 18/12/31 10119 4
79545 [일반] 미스터션샤인-동경에 대하여 [16] Asterflos6475 18/12/31 6475 1
79544 [일반] 표창원 의원에게 문자를 보냈고, 답장을 받았습니다. [313] 마재19385 18/12/31 19385 53
79543 [일반] (원글)신재민 전 사무관이 기재부를 그만둔 이유 [170] 내일은해가뜬다22057 18/12/31 22057 36
79542 [일반] 레이더 사건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가 나왔습니다. [10] 츠라빈스카야7366 18/12/31 7366 0
79541 [일반] 내일부터 마트/슈퍼에서 비닐봉지가 전면 금지랍니다. [53] 홍승식11148 18/12/31 11148 1
79538 [일반] 일본에서 요양원 케어소홀로 사건이 있었습니다. [22] 짐승먹이8124 18/12/31 8124 1
79537 [일반] 운수 좋은 해 [61] 39년모솔탈출7332 18/12/31 7332 23
79535 [일반] 군대인가 학원인가…병사는 병사 다워야 정상 [220] 홍승식20549 18/12/30 20549 26
79534 [일반] 물증 없이 진술만으로 성폭력 유죄 선고 [169] 라임트레비19389 18/12/30 19389 14
79533 [일반] 육아의 어려움 [18] 해피어른8648 18/12/30 8648 3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