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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29 02:33
흐흐.. 재미있는 의견이네요. 어느 정도는 동감합니다.
그 시절 지휘통제 능력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할아버지라도 별 수 있을라나 싶기도 하고요.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의 전술 의도를 잘 이해하고 실행해줄 수 있는 지휘관과 부대를 양성하는게 진정한 지휘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18/11/29 02:36
나폴레옹 시절에 전투를 보면 타이밍 싸움이더군요. 병과에 따라 상성이 뚜렷해서 어떤 병과가 언제 앞으로 나설지를 결정해야 하더군요. 포병은 언제 타격하고, 보병은 언제 타격하며, 기병은 언제 출발할지 말이죠. 워털루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패배는 나폴레옹이 건강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을때, 잘못된 명령하달로 기병대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달려나가 적 포병대를 부수지도 못하고 전멸하면서 무너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걸보면 지휘관의 능력과 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이 당시 건강이 좋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기병대가 달려나갈 타이밍을 제대로 잡았을 수도 있겠죠.
18/11/29 02:38
그런데 의외로 고대 전쟁사에서 수십만 대군이 동시에 싸운 전투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회전에서는요.
동원이 수십만이 되는 규모는 흔하지만 실재 전투에서 그 병력이 투입되는건 한쪽 멕시멈이 5만이 최대이지 않나 싶습니다.
18/11/29 03:47
실제 전투에서 수십만을 한번에 동원한 경우에는 동원한쪽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몰락해버리는 경우도 많더군요
중국에서의 팽성전투나 비수대전은 수십만 , 적벽대전이나 페르시아의 이소스전투 같은경우 십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다가 잘 통제되는 상대적 소수의 병력에 그대로 무너져버렸죠. 팽성전투야 상대방의 실정으로 추후 극복이 가능했지만 적벽이나 비수대전은 통일직전에 모든게 무위로 돌아가버린전투고. 이소스전투와 가우가멜라전투의 경우에는 그 여파로 강대국이였던 고대 페르시아가 그대로 망해버렸으니..
18/11/29 02:49
칸나에 전투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양군 합쳐 대충 12~3만은 된걸로 아는데, 알려지기로는 거의 완벽한 작전지휘가 이뤄지지 않았던가 싶네요. 그렇게 치면 역시 나폴레옹 VS 한니발은 한니발? 후후~
18/11/29 02:54
2차가공된 사료를 통해서 보긴 하지만 실재로 로마시대 당시의 회전의 양상은 대부분 미리 합을 짜 놓고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중간에 포진을 바꾸거나 이런 기록이 잘 안보이더군요. 그냥 망하는거지.
18/11/29 09:40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통 뛰어난 지휘관이 다룰 수 있는 병력의 최대치를 5만 정도로 본다더군요. 당시 한니발군이 5만 또는 그 이하였고요.
18/11/29 11:41
아마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로 생각됩니다. 누가 봐도 명장이 확실한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이 거의그수준의 군대를 이끌었으니까요
18/11/29 05:48
거꾸로 생각해보면,
"정예부대가 먹히지 않게된 현대전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단적으로 유명한 사단 이름을 대라고 하면 아무말도 못하는 1차 세계대전 같은 경우에는, 고르고 고른 정예 군 (군단도 아니고!)이 마른에서 막히고, 솜에서 쓰러지고, 베르됭에서 다 사라지는 살풍경이 펼쳐지니까요. 한 부대만 찝어서, 바이에른 1 (근위)사단 같은 경우에도 보불전쟁에서부터 명망있는 부대인데, 그 이후 상비사단이 아니라 동원사단의 형태로 전쟁발발 이후 뮌헨지역 청년들을 중심으로 동원되었고, 베르됭 이후에는 누더기 편제 상태로 참호에 박혀있다가 종전을 맞았으니까요.. 영국 원정군의 초기 구성에 큰 힘을 했던 "키치너의 군대"로 불리는 전쟁 초기 대규모 모병의 경우에도, 나폴레옹 시대와 보불전쟁 시대의 '전리품과 입신양명'을 꿈꾸던 젊은 지역사회가 솜에 끌려가서 증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바로 지원율이 팍팍 떨어져서 1년 뒤에 징병제가 강제된 것을 보면 "인간이 값싼 총알에서 평등해진 것은 대재앙"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 전쟁에서는 5번 전투와 드잡이질에서 살아 남으면 장군은 못 시켜줘도 삼국지로 치자면 교위 자리 중에서 낮은 것이라도 줄텐데, 현대전에서는 5번 살아남았다고 대대장 자리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노르망디 상륙부터 종전 직전 아르덴 숲의 바스토뉴까지 공병의 폭파임무를 공수부대 따라다니면서 낙하산 타고 하던 "13명의 지독한 녀석들 (Filthy Thirteen)" (선전물에 쓰여서 별명이 생겼을 뿐이지, 특수부대보다는 '파견나온 공병 아저씨들'에 가까운 인원)의 제이크 맥니스 상사 같은 경우에 '아 현지임관 의미없어서 안 한다니까? 내가 소위따라지로 보이냐?'라고 국방일보에 해당하는 Stars and Strips의 선전기사에서 대놓고 말할 정도였으니... 정말 과거의 전쟁에는 당사자도 없으니 영광이니, 명예니 거려도. 현대전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게 분명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대해 정확한 사료나 분석이 아니라 '창작물'인 혼블라워나 데메테르 같은 것의 막연한 이미지로 생각하다보니, '와아 발미 전투 이후로 국가의 총동원이 시작! 그런데 혁명과 새로운 전장의 시대라 무지렁이도 제국의 원수가 되네! 이게 낭만주의지!'라는 얄팍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네요. 이후의 (근)현대전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개인의 인지범위를 벗어난 국가단위 폭력의 총집합'이 스물스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불확실성 이야기를 이런 시대에 꺼내는 것을 보고 '낭만적인 시대다운, 제갈량의 추풍오장원에 아쉬움과 비슷한 감성적 분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런 불확실성 또한 당대의 현실이었던 것이군요.
18/11/29 07:37
전근대의 대규모 전쟁은 전투 자체가 아니라 위생과 보급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결정하는 부분이 큽니다.
10만명을 한 공간에 몰아넣을 때 그 식수와 음식, 똥오줌만 생각해봐도 끔직하죠. 개인의 무력이란 건 소규모 전투 상황이 아닌 이상 무의미하다고 봐야 합니다.
18/11/29 09:23
일단 전투의 난전 속에 휘말리게 되면 지휘관 개인의 역량 따위는 대개 소용 없었을 거고 ..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건 쪽수와 평소의 훈련 상태, 나아가 아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수송과 병참이었겠죠. 전투에서 죽은 전상자가 병걸리고 굶어죽은 비전투 사상자를 처음으로 추월하게 된게 러일전쟁 때라 캅니다.그전까지는 전쟁나가면 그저 행군하고 텐트치고 하다가 적은 구경도 못하고 전쟁 끝났다고 듣고 집에 가는게 (아니면 보급이 끊어져 도망가거나) 수천년간 지속된 일상이었겠죠. 나폴레옹이나 로마군대가 보여준것도 사실은 병사를 모으고 전장까지 행군시키고 안굶기고 보급하는 능력면에서 독보적인 차이라고 생각되네요. 이걸 근본적으로 바꾼건 바로 철도입니다. 동원령을 내리자마자 며칠만에 전국에서 대군이 편성되어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보내진다는건 전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습니다. 철도야 말로 국가 총력전을 가능하게 하고 전에는 적 얼굴 보기도 어려웠던 병사들을 전부 기관총 앞으로 데려다 준 주연이라서 1차대전이 발발하고 비극으로 끝난 원인을 비약적으로 향상된 수송 능력으로 지목하고 기차 시간표의 전쟁이었다라고 이야기한 역사가도 있었죠.
18/11/29 15:47
딱 본문에 있는 시대 즈음이 전투지휘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하기가 본격적으로 어려워진 시대가 아닐까요? 통신과 기동의 발전은 더디다 못해 과거보다 못한데 병력의 수와 살상력은 비약적으로 올라갔죠 이것의 끝이 일차대전일테고요
18/11/29 15:56
실제로 전에 올려주신 지휘관 얘기하고 지금 얘기도 어떻게 보면 고대,중세에서 흔히 등장하는 "머릿수가 훨씬 적은 진영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 그림을 설명하는 방편들이 아닐까 합니다.
18/11/29 22:30
그래서 백인대장급 정도에 해당하는 중간머리들과 총지휘관이 연계가 잘 돼야 하는게 아닐까요. 사실 병사들을 지휘하는 건 총지휘관이 아니라 소대장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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