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이래저래 피곤한 일을 겪다 보니, 그냥 푸념이나 해볼까 하고 글 남겨봅니다. 흐흐.
오늘 아침.
저희 회사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A 앞으로 한 장의 우편이 도착합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친구인지라 A는 우편을 뜯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우편 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xx법원 지급명령]
……채무자(A)는 채권자(D)에게 별지 청구취지 기재의 금액을 지급하라.
별지 독촉절차비용은 채무자가 부담……
1. 금 2,400,000원 (노트 9 512 BLACK 2대)……
캄보디아어 사전을 꺼내어 열심히 설명해주었더니,
기겁한 A가 회사에서 일하는 또다른 캄보디아인 B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서툰 한국말로 둘이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B는 아이폰 1대를 사려고 했는데, 판매업자가 친구 한 명을 더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B는 A를 데리고 오프라인 매장에 방문, 아이폰 1대를 구입했다.
그런데 아이폰 값이 없어서 주지 못했다.
돈을 주고 아이폰을 샀는데 돈을 주지 못했다고? 아이폰을 샀는데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아이폰 1대를 샀는데 왜 지급명령에는 갤럭시 노트 9 2대라고 되어있는거지?
잠깐, 핸드폰을 산 건 B인데 왜 A한테 지급명령이 날아왔지?
도무지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때 갑자기 등장하신 사장님, 저에게 미션을 주십니다.
“xxx야, 네가 한 번 알아봐라.”
아, 오늘 한가해서 월급루팡짓하려 한 걸 어찌 아시고 이런 미션을…….
우선 지급명령에 나와있는 채권자 연락처로 전화를 해봅니다. 예쁜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습니다.
나 : “A 이름으로 지급명령이 와서 대신 전화드렸는데요. 이 친구들 한국말이 서툴러서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기가 힘들어서요.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채권자 : “저희는 핸드폰 판매 업체인데요. A씨가 물건을 구매하셨는데 3개월째 입금을 안 해주고 계십니다. 블라블라…….”
묘한 위화감이 생기더군요. 채권자 치고 목소리가 너무 편안합니다.
돈 떼먹으려는 놈들도 목소리가 큰 법인데,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 목소리가 너무너무 부드럽습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내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감이 왔습니다.
나 : “혹시 추심업체에요?”
채권자 : “……네.“
이 사람 붙잡고 말해봤자 아무 것도 안 나올 것 같습니다. 직접 통화할테니 채권자 연락처 달라고 했습니다.
추심업체 직원은 채권자에게 직접 전화하게 하겠다고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알겠다고 하고 우선 전화를 끊었습니다. 잠시 후, 채권자 D에게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그거 다른 캄보디아애가 한 건데, 걔가 지금 연락이 안 되요. 걔 오면 연락드리라고 전할께요. 오늘 안에 연락 드릴 수 있을 거에요.”
채권자 D는 필요한 정보는 얘기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캄보디아 사람 타령만 해댑니다.
혹시나 해서 거기 매장이 오프라인 매장인지, 업체 이름이 뭔지 물어보니 순순히 다 대답해줍니다.
검색해보니 실제로 영업하는 매장이더군요.
핸드폰 구매 계약서와 영수증을 팩스 또는 문자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후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나저나, 채권자라는 사람도 마치 남 일 얘기하듯이 말합니다? 아니, 당신 돈 떼인거잖아요!
사실 어떻게 된 건지는 아까부터 감 잡은 상태였습니다.
1. 핸드폰을 샀는데 돈을 못 줬다.
2.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3. 휴대폰 대금 지급명령서.
4. 뜬금없이 등장한 추심업체. 남 일처럼 말하는 채권자.
모든 정황이 딱 한 가지를 가리키더군요. [휴대폰깡]
원래 휴대폰깡이라 하면, 개통까지 해서 보조금까지 받아먹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외국인들이라서 그런지 핸드폰 현금 결제로만 이루어진 듯 합니다.
뭐랄까. 휴대폰깡을 흉내낸 사기...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A와 B를 불러다놓고, 네이버 캄보디아어 사전을 꺼내놓고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얘네들에게 설명하라고 해봤자 어차피 못 제대로 못할테니,
제가 궁금한 부분과 관련된 단어 하나 띄우고 보여주고 네, 아니오 대답만 하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약 1시간의 심문(?) 후,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건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2018년 9월, B는 누군지 모를 젊은 캄보디아 여성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됩니다.
캄보디아 여성은 B에게 대출받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딱히 돈이 필요 없던 B였지만, 어쩐 일인지 B는 이 여성의 꾀임에 넘어가 아이폰 1대값을 대출하기로 결정합니다.
여성은 B에게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 보증인으로 세우라고 했고, B는 별 의심 없이 A를 데리고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합니다.
A는 여성에게 여권을 넘겨주었고, B는 109만원을 대출받아 그 자리에서 아이폰 1대를 구매합니다.
그리고 9월~11월 동안, B는 캄보디아 여성에게 돈 109만원과 이자를 3개월에 걸쳐 모두 갚았습니다.
A와 B 모두 다 끝났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들은 A 이름으로 핸드폰 2대가 결제된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캄보디아 여성은 A 이름으로 핸드폰 2대를 결제하여 꿀꺽 하고 나서 B에게서 109만원까지 뜯어먹은 듯 합니다.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A와 B에게 349만원을 꿀꺽 한 셈이죠.
그리고 3개월 후, 핸드폰 매장 측에서는 A가 핸드폰 2대값을 3개월동안 주지 않았다며 추심업체를 통해 소를 제기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 회사 우편함에 'A는 물품대금을 지급하라.'라는 지급명령이 도착해 있던 거지요.
핸드폰 매장측과 캄보디아 여성측이 한통속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긴 하지만,
뭐 현재로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속단할 순 없습니다.
캄보디아 여성의 단독 범행일수도 있겠죠.....................?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습니다. 야 이 멍청이들아! 라고 말해주고 싶은 걸 꾹꾹 참았습니다.
그래요. 이 친구들이 좀 많이 순진하긴 해요.
A는 지난번에 돈 필요하다고 이상한 대부업체하고 전화 주고 받다가 부서장한테 걸려서 욕 엄청 먹고 그랬었죠.
B는 별 사고 안 치고 착실하게 돈만 모으는 친구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누군지도 모를 캄보디아 여자에게 홀랑 속아서 이런 사고를 치다니...
타지 생활을 1년 반 넘게 하다보니,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아...
1차 심문을 힘겹게 마치고 난 뒤,
오후 2시쯤 되어 계약서 2장이 추심업체를 통해 문자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죠. 캄보디아어니까요. 번역기를 돌리고 싶지만, 캄보디아어를 키보드로 칠 줄 모릅니다.
또다시 A를 불러 네이버 사전 켜놓고 2차 심문(?)을 시작합니다.
계약서라고는 하는데, 그냥 연습장 찢어서 이름, 주소, 연락처 쓰고 싸인한 겁니다.
계약서 그 어디에도 아이폰, 갤럭시 노트 9 같은 물품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800,000 X 3개월) 이라는 내용만 써있을 뿐, 이 돈이 무엇을 위한 돈인지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계약서라기보다는 차용증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계약서에 240만원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거 확인 안 했어?” 라고 물어보니,
A,B 말로는 자기들이 계약서에 직접 싸인 안 했답니다. 이 계약서는 본 적도 없다네요.
이건 뭐 확인해봐야겠죠. 이 친구들 말도 100%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증빙자료라는게 이 별 내용 없는 허접한 계약서 2부 뿐이라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열심히 계약서 해석 작업을 마친 후, A를 다시 일터로 돌려보냈습니다.
오후 5시. 슬슬 퇴근각 보는 시간.
캄보디아 여자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구매영수증, 구매내역서 등을 보내주겠다던 채권자 D 역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역시 예상대로군.'이란 생각이 듭니다.
A와 B가 또다시 사무실 앞을 기웃거리길래, 불러들여서 3차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들이 왜 기웃거렸나 했더니, 한국말 잘하는 다른 캄보디아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통역을 부탁했더군요.
A와 B를 앉혀놓고 전화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그 캄보디아 여자에게 돈 갚았다는 증거라면서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 내용을 보여줍니다.
...캄보디아 글자네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게 증거라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그나저나 그 캄보디아 여자의 메신저 이름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사진은 캄보디아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한아름'입니다.
'한국인과 결혼한 여성일까, 아니면 업체에 고용된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영화 '서치'를 따라해보고 싶어졌지만, 퇴근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이렇게 몇 시간에 걸친 심문 아닌 심문이 끝났습니다.
말이 안 통하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답답한 심문이었습니다...
이젠 슬슬 앞으로의 처우에 대해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 우선 이의 신청을 한 후, 경찰서에 신고한다.
-> 가장 먼저 떠올린 방법입니다만, 좀 주저하게 됩니다.
이 한국말 거의 못하는 두 친구들을 데리고 각종 절차를 진행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깜깜합니다.
오늘이야 잉여인력이여서 이러고 있습니다만, 저도 회사에서 해야 할 ‘업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2. 우선 이의 신청을 한 후, 채권자와 딜을 한다.
-> 채권자에게 좀 봐달라, 캄보디아 여자가 중간에서 장난친거 아니냐 등등 이런저런 말을 해서 좀 깎아라도 보자는 방법입니다.
다만, 이거 내 일도 아닌데 왜 내가 구차하게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제가 상황을 100% 파악한 게 아닌지라, 제 추측만으로 떠들었다가 일이 더 꼬여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3. 그냥 돈 주라고 말하고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라.’라고 말한다.
-> 솔직히 가장 끌리는 방법입니다. 저로 보나 회사로 보나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지요.
다만, A와 B 사이에 큰 다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일로 인해 피해를 볼 사람은 A 혼자입니다.
지급명령서에도 B의 이름은 없습니다. 핸드폰 계약은 A 이름으로 했으니, 지급명령은 당연히 A 앞으로 와 있습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B는 아이폰 하나 사고 끝이지만 A는 큰 손해를 볼 겁니다.
그냥 같이 따라간 죄 밖에 없는데, B 때문에 다 뒤집어쓴 셈이죠.
도의적으로 B가 A 앞으로 떨어진 240만원을 다 해결해주는 게 정답입니다만, 그게 그리 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부터 ‘돈 안 내고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요?’하고 여기저기 묻고 다니는 게 보입니다.
외국인 근로자에게 240만원은 정말 정말 큰 돈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까, 문득 제 스스로가 엄청 치사하게 느껴집니다.
A,B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덜 귀찮을지에 대해 더 고민하고 있음이 그저 치사할 뿐입니다.
마음은 이미 경찰서로 향하고 있지만, 이성이 제 몸을 꽁꽁 묶어 사무실 의자에 곱게 접어놓고 있습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A,B를 위해 법원에 이의신청을 도와주는 순간, 이 일에 좀 더 몸을 담그게 될 겁니다.
이의신청 도와주지 않고 그냥 모른척하면 제 한 몸은 편하겠죠.
이의신청만 도와주고 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몸 빼기가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고민만 깊어지네요.
그냥 푸념하고 싶어서 끄적거려봅니다.
집에 도착하면, 고민 따위 집어치우고 치킨이나 뜯어야겠어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