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가쟈사라씨는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악마의 후손들은 그들끼리 살아야만 했다. 외부에 마을을 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곳의 규칙이었으므로, 마을 밖을 떠나는 것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더욱이 그가 살던 곳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작은 마을은 외지 사람이나 산짐승이 침입할 수 없도록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외부로 통하는 단 하나의 문은 밤에는 굳게 닫히고, 마을 어른들이 그 앞에서 돌아가면서 보초를 섰다. 낮에 그 문을 나가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17살을 넘긴 성인들만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게다가 가쟈사라씨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묘한 일이었다. 언젠가 자신을 죽일 사람들과 매일 생활하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을것만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7살, 8살, 9살.... 해가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정다웠고 부모는 자신을 사랑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단지 장난이 아니었을까, 혹은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실제로 사람이 한명씩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17살이 되기전에 '그 의식'은 두 번 일어났다고 했다. 아이들은 보는 것이 금지된 의식이었다. 의식이 일어난 다음날에 그는 자신이 알던 형과 누나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16살이 되자 이제는 초조해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운명에 순응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타인을 위해 죽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사는 바람에 마을사람들이 저주를 받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처음엔 그런 생각이 양심을 찔러왔지만 금방 양심은 무뎌졌다.
그를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척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담? 그 마을에서는 도망치다 잡히면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만약 운좋게 탈출에 성공해도 험준한 산을 넘어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또, 정말 자신이 잘못 듣거나 착각한게 아니란 말인가? 어린 시절에 꾸곤 하는 황당무계한 꿈에 속은것은 아닐까?
이런 여러가지 고민과 의혹 때문에 망설이는 동안에도 세월은 흐르고, 마침내 그 밤이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더니, 가자샤라씨는 아 이제 땀 좀 뺀거 같으니 사우나를 나가자고 했더랬다.
하기는 나도 이제는 뜨거워서 못참겠다 싶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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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를 나와 우리는 항아리 모양의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는 바나나 우유를 사서 마셨다. 빨대를 꽂아서 먹는 것이 제맛이라고 알려줬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놀라는 척 하면서, 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남자 둘이서 나무로 된 평상에 앉아서 바나나 우유만 빨고 있으려니,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싶었는데 가쟈사라씨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침묵을 지켰다. 그래 나는 궁금증을 못이기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냐고 묻게 되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못이기는 척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쟈사라씨는 결국 열여섯살의 생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살았고 마침내 열일곱살 생일이 되기 전날이 되었다. 그날 낮도 아무런 특별한 일 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그는 남에게 자신의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무슨 낌새를 미리 알아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내 등 뒤 그림자가 나보다 길게 늘어지는 시간 지나 해가 지고 따끈하게 데워졌던 지면이 식어갈 무렵 초승달이 산의 어깨를 타고 고개를 내밀때 얼마 전 먹은 저녁밥이 뱃속에서 삭아갈 때 어머니 아버지는 가자샤라씨에게 조용히 너는 오늘 죽을 것이라 말하였고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고 아버지는 목이 매이셨으나 자식을 살리려는 의지는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깊은 체념과 슬픔을 동반했으나 두분의 눈은 확신으로 빛났다고 했다 너는 오늘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
가자샤라는 심장이 터질것 같았으나 애써 침착하고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두분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와 잠시 기도를 한다고 두 손을 모았다가 온 힘을 다해서 아버지의 턱을 올려치고 달려드는 어머니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마을의 유일한 출입구로 뛰었다. 등 뒤로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던가 어쨌던가....
한 명이 드나들 정도 크기의 나무로 된 문 앞에는 익숙한 마을 어른이 지키고 서 있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 날은 초승달 모양이었다. 평소 그렇게 인자하던 분이 그날은 저승사자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가자샤라를 보자마자 한눈에 모든 상황을 눈치챈듯 신중하게 가쟈사라에게 접근하였는데 가자샤라씨로써는 그날 하루종일 주머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손에 꽉 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살려고 발악하는 들짐승처럼 가쟈사라씨는 문을 향해 돌진했고 문지기는 창을 휘둘렀는데 창 날이 배를 스쳤다.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가쟈사라씨는 자신이 산채로 회쳐질 위기에 놓인, 도마위에서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고 했다. 끔찍하게 선뜩한 느낌이 났지만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도 모른채 가자샤라씨는 문지기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칼로 여러번 찔렀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칼에 손을 베었다고 했다.
간신히 문지기를 제압한 그는 거의 굴러내려가듯이 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운좋게 여행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서 바나나우유도 못 먹었을거라고 했다.
끔찍한 이야기를 쉬지않고 뱉어낸 가자샤라씨는 그 후의 삶은 극적인 부분이 별로 없으니 얘기는 그만 하자고 했다. 착잡한 것인지 시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자고 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달라보였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었지만 어쩐지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나는 겁이 많아서 무서운 사람과는 친하게 못지낸다. 아 이제 이사람과도 멀어지겠구나, 하는 예감을 하면서도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 마을에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도망친 몇 년 후, 그 지역에 커다란 산불이 있었다고 했다. 방화로 추정되는데,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산이 한달동안 불탔다고 한다. 그래 가쟈사라씨가 그 큰 불이 끝나고 궁금해서 가보니 고향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부모는 어떻게 됐는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함께 사우나를 나오며, 가쟈사라씨는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는데 한마디를 더 보태주었다. 자신의 본명은 가쟈사라가 아니라는 거였다. 가쟈사라는 스스로 지은 한국식 별명이라고 했다. '가짜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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