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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법원에서 웬 우편물이 하나 왔다.
법원이나 경찰서 근처에도 가 보지 않으셨던 어머니께서는 한없이 근심스런 말투로 이게 뭐냐고 물어보셨다. 나 역시 드디어 그 동안의 행각에 대한 벌을 받는건가 생각하고 봤는데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선정 통지서였다.
사법기관에 익숙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민참여재판을 들어본 적은 있고, 내가 형사 사건의 유무죄를 판결할 수 있는 배심원으로 선정이 되었다고 하니 뭔가 작은 흥분이 일기도 했다. 미드나 소설에서 보던 일이 일어나다니.. 배심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검은 조직에서 나에게 검은 돈가방을 내밀면 어떡하지? 아니면 신변의 위협?
조금 알아보니 나는 '배심원 후보'로 선정이 되었던 것이다. 배심원 후보로 선정된 사람들 한.. 100명 정도가 법정이 모이고 추첨을 통해 10명의 '정배심원'을 선정한다고 한다. 정배심원으로 선정이 되어야 배심원의 역할을 하는 거고 아니면 그냥 집에 돌아간단다. 결국 배심원이 될 확률은 10퍼센트밖에 없는 거. 어쨌든 마침 재판당일이 쉬는 날이기도 하고,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 50.1% 귀찮은 마음 49.9%의 생각으로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배심원 후보로 선정됐는데 그냥 이유없이 안 가면 과태료 200만원이라더라.
1. 배심원 선정
9시까지 법정에 도착해야 한다. 8시 20분이면 만차가 되어 주차를 할 수 없다는 친절한 안내까지 있어서 나는 아예 8시까지 법원에 도착했다. 전날 새벽 3시까지 친척 어른과 스크린도 치고 술도 마셨지만 뭐 괜찮았다. 어차피 선정될 확률은 적으니까. 추첨에만 안걸리면 오전 10시면 끝난다더라. 끝나고 사우나나 갔다가 뭐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이따 밤에 있는 약속 가야지라고 생각함(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법원 근처 분식집에서 라면 먹고 시간 맞춰 들어가니 법정 방청석(?)에 배심원후보자들이 가득하다. 한.. 80명쯤 되었던 것 같다. 검사, 직원, 변호사들이 착석해 있고 영화에서만 듣던 '재판장님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라는 소리를 실제 듣고 군대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정말.... 정말 정말 인상도 좋으시고 말투도 좋으시고.
배심원들에게 감사인사. 이것저것 안내.
오늘 정배심원으로 선정되면 일찍끝나면 오후 6시 늦게 끝나면 9시도 넘을 수 있다고 하신다.(정말 이런 표현 안되지만 9시 같은 소리하고 앉았다) 오늘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정배심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이 꼭 있겠느냐고 물어보니까 15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하나하나 묻더라. 참여 못하는 사정도 다양하다. 아이 하원. 요가 강사인데 오후 수업 해야함. 지방에 물건 납품해야함. 감기 걸렸음(이거 좀 웃겼음) 등등 그런 사람들 일단 보류하고 추첨에 들어갔고 10명을 뽑았지만 나는 뽑히지 않았다.
그런데 기피 단계라는 게 있었다. 추첨된 10명 배심원 후보자들에게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몇가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따라 검찰측과 변호인측에서 특정 배심원후보를 밴하는 단계였다.
질문은 이런 식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사람이 흘린 지갑을 보고 순간적으로 충동이 들어 지갑에 손을 댔다. 하지만 바로 후회하고 그 지갑을 원위치에 놓았다. 이럴 때 그 사람에게 고의성을 물을 수 있겠는가?" 뭐 이런?
질문의 답변에 따라 5명이나 배제가 되었고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추첨을 했는데 이런.. 내 번호가 불렸다.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물어보더라. 어디선가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을 들어본 나는
"고의성이라는 개념을 법률에서 어떻게 정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상의 의미로서의 고의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미필적 고의도 법률에서 고의로 본다면 고의성을 물을 수 있지 않겠나" 식으로 되게 똑똑해 보이게 대답을 했고, 검사 누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셨다.
변호인의 질문은 훨씬 간단한 거였고 뭐 여튼 배제당하지 않고 정배심원이 되었다.
정배심원되지 않고 그냥 집에 돌아가면 6만원 받는데
정배심원되면 하루를 포기하는 대신 12만원이나 받는단다. 오예. 심지어 6시를 넘기면 4만원 추가 수당을 준단다. 완전 개이득. 그럼 보자... 7시쯤 끝나면 딱이겠군. 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이때는 하고 있엇다.
2. 다음편에..
(길지도 않은거 한번에 올려야 되는데 월급 루팡질 하면서 쓰다보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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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제가 링크한 질문게 글 답변에 있는데 본문 스포가 될 수 있어 여기 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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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군
아마 서류에 불참시 과태료부과에 대한 안내가 있을텐데요..?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무단불참해도 과태료를 잘 부과하지는 않습니다....만 법적으로는 부과할 수 있는 것이고 부과하는게 맞는데
판사들이 민원이 귀찮아서 잘 부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FM판사를 만나면 과태료 부과될 가능성 자체는
있습니다. 적힌 사유에 해당하는 사유는 없더라도 사유서라도 하나 써내시면 과태료부과는 안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