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발표를 하는 날이 되었다. 강의실 공기는 싸늘했다. 복도에서 시비가 붙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지만,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단의 지식처럼 내색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잘하고 싶었다. 부족해 보이는 인간들이 모여서 뜻밖의 성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 자체로 멋진 복수가 될 것 같았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화염병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 시켜야만 진짜 이기는 거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실전이 되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최선을 다해 무사히 브리핑을 마쳤다. 이제 피핀과 린이 차례다. 복도에서 준비하고 있던 피핀과 린이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계단식 강의실이라 약간 무대 같은 분위기가 났다. 린이는 새하얀 겉옷에 삼원색 빛깔 띠를 어지럽게 감고 있었다. 피핀은 검은색 겉옷에 까만 천으로 눈을 가렸다. 준비한 스피커에서 장중하면서 기이한 곡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핀은 앉아서 북을 치며 알 수 없는 몽골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린이는 피핀의 주위를 돌면서 이국적인 춤사위를 보였다. 시커먼 거구와 새하얗고 호리호리한 소녀가 기묘한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 냈다. 피핀은 점점 주문에 몰입이 되었고 북 치는 동작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곡성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실전은 연습과 차원이 달랐다. 야만 전사의 기백이라고 할까, 불가해한 힘이 느껴졌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피핀은 검은색 눈가리개를 풀고 벌떡 일어나 린이의 몸동작에 맞춰서 무대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둘의 주고받는 춤사위는 수화 같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마법적인 신비함이 녹아 있었다. 모리츠 에셔의 '만남'이라는 그림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기묘한 만남이었다. 몽골인과 한국인의 만남, 전사와 귀머거리의 만남, 어둠과 빛의 만남. 나중에 혹시 부자가 된다면 이 장면을 청동 부조로 만들어 벽의 한 면을 장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신묘한 힘, 비밀스러운 공기로 그 공간을 채워줄 것이다.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두 손을 합장했다. '린이가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뤄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북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춤사위는 멈췄다.
발표가 끝났을 때 강의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교수는 혼자 감탄한 표정으로 손뼉를 치기 시작했다. 최근에 본 발표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고 칭찬을 해줬다. 이게 바로 미메시스라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난 무대로 뛰어가서 피핀과 린이를 얼싸안았다. 피핀과 린이는 환하게 웃었다. 기쁨과 먹먹함이 같이 찾아왔다. 복수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승리의 여운을 만끽했다. 이대로 지나가기엔 뭔가 아쉬웠다. 저녁에 내가 자취하고 있는 옥탑방에서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학기 초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밤공기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평상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피핀은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했다. 김치나 쌈장도 잘 먹었다. 그러고 보니 피핀 어머니가 한국분이라는 이야길 들은 것 같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린이는 이번 과제를 준비하면서 피핀에게 많이 배웠다고 했다. 무용 배우면서 이 정도까지 몰입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춤에 대해, 예술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진짜 예술가는 피핀인 거 같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피핀은 누워서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서울 하늘에는 왜 별이 없냐고 물었다. 별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핀은 바이칼호 근처의 밤하늘과 광활한 목초지 이야기를 했다. 신비한 동화 속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린이는 눈을 반짝반짝하면서 '신기해 피핀'을 연발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있는 굵은 빛덩어리들과 끝도 보이지 않는 초원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나는 죽기 전에 몽골에 꼭 가볼 것이다. 머릿속으로 그린 이미지와 비슷한지 꼭 확인해볼 작정이다.
얼근하게 취기가 올랐다. 피핀에게 아까 불렀던 몽골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피핀은 뜬금없이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노래를 잘한다고 한다. 린이는 어떡하냐고 린이를 쳐다봤다.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어렸을 때 어린이 합창단 같은 것도 했었단다. 술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학교 근처로 갔다. 노래방에 들어가면서 참 엉뚱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핀은 아는 팝송이 많았다. 라디오 헤드부터 브루노 마스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굵고 입자가 풍부한 저음이었다. 귀가 편안했다. 나는 얇은 음성이라 성시경이나 김연우 노래를 불렀다. 린이에게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다. 그냥 진동 정도만 느껴지겠지? 마이크가 몇 바퀴 돌고 린이도 한곡 하고 싶다고 마이크를 가져갔다. 거위의 꿈을 선곡했다.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지만, 박자는 전혀 맞지 않았고 음은 뭉개져서 예쁜 소리가 아니었다.
고음 부분에서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본인도 답답한지 어눌한 말투로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으앙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가슴이 뭉클했다. 씩씩한 척 했지만 여린 아이였다. 나는 김경호 형님 노래를 선택해서 린이를 무대로 불렀다. 린이에게 마이크를 들고 입만 벙긋거리라고 시키고, 뒤에 숨어서 노래는 내가 불렀다. 린이는 눈에 물기가 가득한 채로 헤드뱅잉을 했다. 피핀이 핸드폰으로 그 장면을 찍어줬다. 나중에 같이 영상을 돌려보면서 엄청 웃었다.
다음 수업부터 아무도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린이와 나란히 앉아서 수업 내내 필담을 주고받으며 놀았다. 별 시답잖은 내용이었지만 시간이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린이에게 주말에 같이 놀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가족과 롯데월드에 간 적이 있었다. 신밧드의 모험이라는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것만 네다섯 번 내리 탔다. 아직 남아 있을까. 초등학생 이후로는 놀이공원에 가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뭔가 그리운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말에 같이 놀이공원에 갈래?'라고 쓰고 린이에게 보여줬다. 린이는 눈을 좌우로 굴리면서 고민하는 눈치였다. 너무 부담스럽게 들이댄 건가 걱정이 됐다. 문득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구보씨가 찻집 아가씨에게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하는데 아가씨는 잠시 머뭇거린다. 구보씨는 수첩에 OX로 답을 해달라고,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 읽어보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나는 노트를 빼앗아서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 확인하지 않을 테니 OX로 표시해달라고 적었다. 린이는 싱긋 웃더니 노트를 찢어서 한 손으로 가리고 뭔가 끄적끄적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번 접어서 나에게 줬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걸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냐고! 약속을 어기고 종이를 살짝 펴보려고 했다. 린이가 등짝을 때리면서 쪽지를 뺏으려고 팔을 뻗었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하고 종이를 쫙 폈는데 대문짝만하게 X라고 적혀 있었다. 하, 시발. 이럴줄 알았다. 구보씨도 X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진심 충격먹었다. 난 그냥 혼자 놀아야할 운명인가보다하고 받아들이려는데, X표시 아래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귀가 어지러워서 놀이기구는 못타요ㅠ 동물원에 가요^^' 난 음소거를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미칠듯이 기뻤다. 린이는 '병신^^' 이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귀여운 술책을 부리다니. 린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20분 정도 일찍 나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하늘은 깨끗했다. 너무 설레서 잠을 제대로 못잤지만 몸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린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온갖 망상이 떠올랐다. 항상 화장기 없는 얼굴에 면티나 후드집업 같은걸 입고 다녀서 다른 모습이 잘 상상이 안됐다. 예전에 '너 화장하면 예뻐질 것 같아' 라고 하니까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건 엄청 못생긴 화장을 하고 있는거 같아요' 라고 답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늘은 어떤 모습이든 엄청 예쁘다고 칭찬을 해줘야겠다.
멀리서 린이가 오는게 보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용을 전공한 사람 특유의 팔자 걸음이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얀색 테니스 스커트에 분홍색 반팔티를 입었다. 머리는 버섯 모양처럼 끝이 귀엽게 부풀려 있었다. 티셔츠 색이랑 맞추려고 했는지 볼에 가볍게 터치를 했고 눈을 깜박거릴때 마다 연한 살구색 아이쉐도가 보였다. 과즙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린이야 오늘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왔어" 하고 인사를 건넸다. 린이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린이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귀를 간지럽히는 새소리에도 감사했고 공기에는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꽃밭에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린이가 제일 예뻐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 천사의 은총을 표식하는 깃털이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반듯한 눈썹, 차분하게 내뱉는 숨소리까지 모든게 다 좋았다. 핑크빛 포자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입은 귀에 걸렸고 눈은 하트모양으로 변했다. 사랑의 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린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정신없이 나를 끌고 다녔다. 얼룩말도 보고 코뿔소도 보고 캥거루도 보고 공작도 봤다. 오후의 볕은 후끈후끈했다.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린이의 목은 땀에 젖어서 촉촉했다. 머릿카락이 몇 가닥 엉겨 붙어 있었다. 흰색 손수건을 꺼내서 땀을 닦았다. 뭔가 린이스러운 모습이어서 엄청 귀여웠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린이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제 어디갈까 했더니 돌고래 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공연장으로 이동해 제일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련하시는 분들이 나와서 돌고래를 한마리씩 소개했다. 손짓에 따라 재주를 넘기도 하고 후프를 던지면 그걸 주둥아리에 걸어서 돌리기도 했다. 조련사가 뭔가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날카로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린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개 박수를 쳤다. 나는 린이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는게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휘리릭 지나갔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린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린이 :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나 : 난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었어 크크
린이 : 크크 돌고래 꼭 보고 싶었거든요.
나 : 돌고래 엄청 좋아하는구나
린이 : 네 너무 귀여워요
린이 : 돌고래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 영역으로 대화를 한대요. 신기하죠?
갑자기 뭔가 떠오르는게 있었다. 린이 카카오 계정의 의미가 이해가 됐다.
나 : 근데 너 혹시 카카오 아이디랑 그거랑 관련 있는거야?
답장이 없었다. 2분 정도 지난 후에 답장이 왔다.
린이 : 그건 비밀 ^-^(이모티콘)
린이 : 잘자요!
날이 점점 더워졌다. 사람들은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강의실에는 에어컨이 돌아갔다. 연락이 다소 뜸하다가 린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학교 안에 카페에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린이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찍 왔네. 왠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오빠. 6월 6일 생일이져. 왜 이야기 안했어요."
"아 그러네. 나도 잊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생일이 몇일 안남았다. 생일날 문자라도 보내주는 사람은 아웃백하고 XX미용실 이런데 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자취방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혼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린이는 배시시 웃으며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예쁘게 포장된 네모난 꾸러미였다.
"선물!"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가 그날 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 나올 것 같아서요. 미리 축하드리는거에요"
"너무 고마워. 나 여자한테 이런거 처음 받아봐"
린이는 '그럴줄 알았어 병신아 ^^' 이런 표정으로 웃었다. 괜히 말했나보다.
"지금 뜯어봐도 돼?"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두 권으로 된 양장본 책이었다. '양을 쫒는 모험'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하루키 소설을 여러권 읽었지만 이건 처음보는 제목이었다.
"와우, 너 책 읽는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책 엄청 좋아하는데. 하루키 말고 또 누구 좋아해?"
"음...기욤 뮈소 소설 좋아해요."
"아 큐트 스마일. 재밌는거 많지."
린이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무슨 뜻인지 깨달은듯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린이는 이런 개그 좋아하는구나.
"아무튼 잘 읽을게. 고마워. 그리고 수업 빠지지 말고. 교수님이 다음 수업 시간에 자화상 그려서 제출한다고 하니까 그날은 꼭 나와."
"네."
린이와 카페를 나왔을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장마가 시작되려나. 흙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미세한 물 분자가 피부를 시원하게 적셔주는 것 같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린이와 남방을 뒤집어 쓰고 강의실까지 뛰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카페로 다시 돌아왔을때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6월 뱃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비가 그칠때까지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집에 와서 가장 편한 자세로 선물받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어느날 일본 정계를 주무르는 거물 정치인의 대리인이 주인공을 찾아온다. 행방불명된 동업자 네즈미가 잡지에 어떤 사진을 게재했는데 그 사진 속의 양을 찾아오라는 의뢰였다.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광고업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주인공은 북해도의 양 박사를 찾아가고 현지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 호텔 이름이 돌핀 호텔이었다.
주인공의 여자친구도 북해도까지 따라간다. 이 여자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여자친구 직업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귀 사진만 찍는 '귀 전문 모델'이다. 전체적으로 신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몰입해서 단번에 읽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거기에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다. '1201은 제 생일이에요^^' 그렇구나.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아니, 그러고 보니 소설 말미에 여자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다. 사실 관계를 굉장히 모호하게 서술해 놓아서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았다. 린이에게 카톡을 쳐보기로 했다.
나 : 린이야 니가 준 책 다 읽었어 엄청 재밌다 크크
린이 : 벌써 다 읽으신거에요 대박
나 :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 여자친구는 어떻게 된거야? 이해가 안돼ㅠ
린이 : 여자친구는 사라져요 ^-^(이모티콘)
나 :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린이 : 그냥 사라져버려요
나 : 응...그렇구나 알았어 암튼 고마워 수업시간에 보자
린이 : 네!
교양 미술 마지막 과제는 자화상을 그려서 제출하는 거였다. 종이나 재료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미술 전공한 사람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평소에 그림을 끄적끄적 해본 편이라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8절 도화지에 샤프로 얼굴을 그렸다. 린이는 수업 시간 내내 거울로 자기 얼굴만 관찰했고 피핀은 알 수 없는 괴생명체를 그리고 있었다. 생각 외로 잘 그리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깨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그렸다. 교수가 왜 이렇게 그렸냐고 물으니 분열된 자아가 잘 드러난 것 같아서 그대로 그렸다고 했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리는걸 보니 마음에 든 눈치다. 옆을 슬쩍 보니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자신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교수가 지나가다가 내 그림을 보고 물었다.
"귀에 붕대를 감았네요. 본인이 고흐라고 생각한겁니까?"
"그런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그렸어요?"
"음...예전에 어떤 광고에서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반 친구들이 전부 머리를 깎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뭔가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제가 아끼는 친구중에 귀가 안들리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려봤습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우우' 하고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멋있다'라고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 닥쳐왔고 우리는 전공 공부를 하느라 각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나고 몇일이 지났을 때 피핀에게서 연락이 왔다. 교환 프로그램이 끝나서 몽골로 돌아간다는 메시지였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시 보자고 했다. 카페에 갔더니 린이도 와 있었다. 한 학기가 진짜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피핀과 린이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고 백안시 했었는데. 만약 인격에도 향기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사프란이나 용연 향이 날 것이고 내쪽은 상해버린 우유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피핀은 내쪽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수화를 배워'라고 말하고는 린이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내 손을 잡고 '굿바이 브로' 라고 했다.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형제처럼 느껴졌다. '피핀이 누군지 검색해봤어' 라고 말하고 헤드락을 걸었다. 죽는줄 알았다. 그렇게 피핀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메일을 가끔 주고 받았다. 몇년간 연락이 없다가 하와이쪽에 있는 대학으로 박사 과정을 하러 간다고 메일이 왔다. 해변에서 뭔가 알로하스러운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멋지다 피핀. 나의 형제여.
린이는 졸업이 가까워서인지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준비하는 시험에 전념하기 위해 2학기는 휴학을 신청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달에 한 두번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나는 도서관과 자취방만을 오가며 시험에 집중했다. 자기 전에는 틈틈이 수화를 연습했다. 슬슬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는 2월 쯤이나 수화를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린이에게 연락이 왔다. 린이 생일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린이는 뜻밖에 대담한 제안을 했다. 파도 소리가 듣고 싶다면서 당일치기로 바다에 다녀오자고 했다. 난 숨도 쉬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지루한 수험 생활이 몇 달간 지속되다보니 뭔가 탁 트인 공간에 가고 싶어졌다. 린이와 함께라면 어딘들 좋지 않겠는가. 나는 친구에게 간청해서 하루 동안 차를 빌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수화도 연습했다. 사람은 항상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 법이다.
순식간에 여행 가는 날이 다가왔다. 린이를 태우고 속초로 향했다. 쌩쌩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밀린 일상 이야기를 했다.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눈내리는날 개처럼 백사장을 뛰어갔다. 끝없는 수평선이 보였다. 주위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았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린이의 머리카락이 세찬 바닷바람에 나부꼈다. 오랜만에 본 린이는 전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옷차림이나 외모를 말하는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치근거림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뭔가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이 보였다.
"파도소리 들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좋아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좋다고 말하면 린이가 서운해 할 것 같았다.
"그냥...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지 뭐. 크크. 그냥 쏴아 쏴아 하네."
린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멀리 흰 방파제와 테트라포드가 보이고 끄트머리에는 붉은색 등대가 서 있었다. 5년전 그대로였다. 다만, 바다색은 전혀 달랐다. 그때는 분명 '해변의 수도승'에 나오는 바다처럼 시커먼 잿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짙푸른 암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인도 철학의 가르침이 맞았다. 세상은 거대한 정신에서 탄생한 모양이다. 땅의 밑바닥을 거북이가 받치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액체 위에 땅이 있고, 대륙이 움직인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애초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다.
린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모래바닥에 뭔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뭐라고 적은건가 궁금해서 다가갔을 때, 파도가 밀려와 글씨가 사라져버렸다. 린이는 빙긋 웃었다.
"파도 소리 들어보실래여?"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됐지만 그냥 보고있는게 좋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린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묘사하는게 아니었다.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고 백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모습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예술적 상상력이란건가.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린이의 몸짓에서 진짜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린이에게 목소리와 숨소리, 들뜬 발소리를 들려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린이 곁으로 다가가 린이를 덥석 껴안아 버렸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팔을 풀어주지 않자 포기한 듯 그냥 안겨 있었다. 알싸한 가글액 냄새가 났다. 여전히 깔끔쟁이구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저 할말 있어여."
린이가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내 눈을 봤다.
"나도 할말 있어."
나는 머릿속으로 사랑한다는 수화를 상기했다.
"저 유학가여."
"................."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린이의 눈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너무 잘됐다, 축하해. 넌 어디서든 잘 해낼거야."
린이는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고마어여."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하아, 그때 그런 소원을 비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린이의 장애가, 린이의 결함이 우리를 더 끈끈하게 이어줄거라고 믿었다. 세상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지만, 린이라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그런 행복한 착각을 했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 바람이 세지?"
나는 린이 뒤로 돌아가 코트를 열고 린이를 품속에 안았다. 린이의 숨결, 린이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대로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던 린이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까 무슨말 하려고 했어여?"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린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보며 보챘다.
"말해주세요."
"그럼... 한번만 말할테니까 잘 들어야해."
린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나는 린이의 등 뒤에서 어깨를 껴안고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린이야! 오빠가 많이 사랑했다!"
12월의 바닷 바람이 선뜩하게 옆구리를 찔렀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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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소설을 완결했습니다. 엄청 뿌듯하네요ㅠ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길 쓰자고 시작했는데 너무 혼자만 몰입해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부족한 점이나 고쳤으면 하는 점 댓글로 조언 부탁드릴게요.
설정이 엉망이라든가, 쓸데없이 어렵게 썼다든가, 어디 본듯한 이야기라든가, 개그가 노잼이라든가
뭐든 감사히 듣겠습니다 신랄한 비평도 좋아요^^
결론은....여자를 멀리합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임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