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를 계절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무렵은 겨울임이 분명했다. 친구들과 속초에 바다를 보러 갔다. 패배자들의 여행이었다. 반 친구 이름 옆에 써진 ' S대학교 合, K대학교 合' 이런 글씨만 눈에 띄어도 우울해졌고 사람들 웃는 얼굴이 보기 싫어서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사회의 불량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든 만회할 기회가 있을거라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분위기는 쓸쓸했다. 잿빛 바다를 향해 각자 좋아했던 여자애 이름을 정신나간 듯이 부르짖었다.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던 1살 어린 귀여운 여고생 이름을 외쳤다.
'J야, 오빠가 많이 사랑했다ㅠ'
물론 그녀는 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거다.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 부끄럽고 병신같은 일이다.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해 보였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이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 뜨거운 갈채와 시샘어린 질투를 받았다. 난 특별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평범한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자존심의 누각을 세우고 그 위에서 몸집만 잔뜩 부풀렸다. 들보는 물에 젖어 썩어 있었고 기둥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겁에 질려 재수를 결심할 용기조차 없었다.
강의실 복도는 컴컴한 던전처럼 공포스러웠고 시간은 무한히 느리게 흘렀다. 후회와 무기력은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끌어들였다. 학교에 나가질 않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학교 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몇 주만에 출석한 날은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있었다. 문 앞에 붙은 시간표를 네 번, 다섯 번 확인해보아도 시작 시간까지 오는 사람이 없었다. 법원에 단체로 견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아무도 견학 일정을 알려 주지 않았다. 내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언제나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하고 사물의 밝은 면을 보려 했던 인간은 죽어버렸다. 매일 도서관에 쳐박혀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음울한 책을 읽었다. 밤에는 재수하는 친구들 독서실에 찾아가 소주와 막창으로 끝없는 허무와 무기력를 채우려 노력했다. 연기가 자욱한 당구장, 피씨방과 스타크래프트, 옥상 구석의 담배 피우는 곳, 어두침침한 1인실 독서실 같은 이미지들이 대학 1학년 시절을 가득 채웠다. 이런 염세적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즐겁고 인간답게, 귀여운 여고생에게 고백도 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거기 창가쪽에 앉은 학생."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황급히 정신을 소환했다. 온 교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날 부른게 맞는지 확신이 없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까."
"........"
"잠시 일어나봐요."
흩어지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사랑?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머릿 속이 새하얗다.
"사랑은...음...눈물의 씨앗입니다."
순간, 교실 전체가 빵 터졌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우두커니 서서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뭐야? 웃기려고 할땐 아무도 안 웃더니 진지하게 대답하니까 터지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텍사스성 안타에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가 잠시 진정되고 교수가 말했다.
"하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구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랑은 잘 모르지만, 생각할때 마다 가슴이 쓰리고 슬퍼져서요."
"그래요, 앉아도 좋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교수는 빙긋 웃으며 강의를 이어갔다.
"오늘 사랑에 대해서 재미있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표현이 저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예술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닮기' 라는 키워드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랑은 상대방을 닮아가는거지요. 단순히 겉모습을 모방하거나 몸동작을 흉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 몰두하고, 나를 완전히 맡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술의 원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물을 단순히 모사하거나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움직임과 울음 소리를 따라하는 고대 제의, 귀신이나 혼백의 소리를 내뱉는 주술사, 이런 것들이 어쩌면 예술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일 수 있어요. 철학자 아도르노는 '닮기'라는 개념을 미메시스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연인들끼리도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서로 미메시스 해야 된다는거 잊지 마세요.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복도를 지나갈 때면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저 사람 그때 눈물의 씨앗 그 사람 맞지. 킄킄" 조소 어린 뒷담화로 들렸지만 애써 개의치 않았다. 투명인간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삐에로가 되는게 덜 고통스러우니까.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조별 발표수업을 할 예정이니 원하는 사람끼리 팀을 짜라고 했다. 어영부영하는 동안에 한무리씩 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슬슬 바빠졌지만 누군가 불러주는 사람이 있겠지 하고 거짓 여유를 부렸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나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젠장, 삐에로가 아니라 투명인간이었다.
"아직 팀 못짠 사람 있나요?"
나를 제외하고 남자1명, 여자1명이 손을 들었다.
"그럼 그 3명이 한 팀입니다."
눈치를 슬슬 보다가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한국말을 못알아 들었다. 띠용?? 몽골에서 온 교환 학생이라고 한다. 같은 동양인이어도 중국 학생은 중국인 같이 생겼고 일본 학생은 일본인 같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몽골인은 진짜 한국인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몽골 씨름이라도 하고 왔는지 몸이 거의 디아블로의 야만용사 수준이다. 절대 얘 앞에서 나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시골 청년처럼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손이 솥뚜껑만했다.
여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수업시간에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보호색이 강의실 색 그 자체인듯 배경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름와 학번을 소개 했는데 별 반응이 없었다. 차림새도 기묘했다. 커다란 헤어 집게로 머리를 대충 집었고, 입고 있는 티셔츠는 목이 늘어나 있었다. 화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수능이 몇일 남지 않은 고3 수험생 같은 느낌이들었다. 동공은 갈 곳을 잃었고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사회의 불량품으로 낙인 찍힌 사람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눈가에 붙어 있는 짙은 불안과 피로가 그 증거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번호를 서로 교환했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학교 후문 쪽에 있는 노점에 갔다. 정식 이름은 없고 통칭 후문 베이커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주력 메뉴가 야채빵인데 나름 먹을만 했다. 이름은 야채빵이지만 소시지와 케첩 맛으로 먹는다. 점심을 여기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12시에서 1시 30분 사이는 식당 출입 불가 시간이었으니까. 아싸 포스 풀풀 풍기는 동지들 사이에서 허겁지겁 야채빵을 먹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수업 시간에 같은 조가 된 그 여자가 복잡한 눈빛을 보내며 지나간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당당한 척 먼 산을 바라봤다. 혼자 먹는게 어때서. 시발ㅠ
며칠 후 첫 모임을 가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조장이 되어 있었다. 몽골 성님은 한국어를 단어만 나열하는 수준이었고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대화가 매끄럽지 않았다. 여자는 말할 때마다 우리 얼굴만 번갈아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긴 하는데 알아먹은건지 알 수가 없다. 대화 도중에 계속 시선이 다른쪽으로 가 있었다. 짜증이 나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요, 집중 좀 해주세요."
반응이 없었다.
"집중 좀 하시라구요."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이었다.
"미앙해요. 제가 귀가 안들려여."
"아...그...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 시발. 진작 말하지ㅠ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어쩐지 말할 때 카셋 테이프 늘어난 것 같은 소리가 나더라니. 그냥 총체적으로 답이 안나오는 조합이었다. 한명은 몽골인이고 한명는 귀가 안들리고.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망해있었다. 몽골 성님은 눈치 없이 무슨 일이냐고 자꾸 캐물었다.
"쉬. 캔트. 히어."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고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을 보니 알아들은 눈치였다. 몽골 성님은 그녀를 보고 뭔가 알수 없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손짓으로 화답을 했다. 수화인 모양이었다. 곰 같이 생겨가지고 별 재주가 다 있네. 여자는 나에게 입술을 보고 읽을 수 있으니 편하게 말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영어로 하기 어려운 말은 자기가 수화로 통역해 주겠다고 했다. 사지육신 멀정한 사람 사이에서 귀가 불편한 소녀가 통역을 하다니 기묘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이서 웃으며 수화를 주고 받았다. 나만 겉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소외된 조에서까지 소외되긴 싫었다.
"저도 수화 할 줄 알아요. 산(山)을 표현한 수화."
중간 손가락을 내밀었다. 둘다 키득키득 웃었다. 처음보다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아서 기뻤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잠깐 나누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몽골 성님은 몽골에서도 변두리인 바이칼 호 근처가 원래 고향이라고 한다. 나이가 동갑이라 친구를 먹기로 했다. 생긴게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피핀하고 똑같이 생겼다. 몸은 우락부락하고 작은 눈은 항상 웃고 있었다. 너 피핀 닮았어 그러니까 피핀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진을 보여주면 때릴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터키 지방에서 활약했던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군이라고 둘러댔다. 표정이 흐뭇해 보였다. 몽골식 이름이 워낙 길고 어려워서 그냥 피핀으로 부르기로 했다. 피핀도 자기 닉네임이 만족스런 눈치였다.
귀가 안들리는 소녀는 이름이 린이라고 했다. 백린. "백.이.니에여" 하길래 "인희? 이름 예쁘다" 약간 상투적으로 칭찬했는데, 아니라고 해서 머쓱해졌다. 무용과에 다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목덜미도 가늘고 팔다리가 길어 보였다. 순백색 속옷을 고집할 것 같은 타입이다. 난 이런 사람이 싫었다. 슬쩍 다가가기만 해도 "냄새나니까 저리 꺼져!"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것 같았다. 배우 이은주처럼 가녀리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는데, 특정 발음마다 낮게 늘어지는 소리가 나와서 깜짝 깜짝 놀랐다. 이야기를 할수록 엄청 온순하고 착한게 느껴진다.
조원들이 마음에 들었다. 난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상반된 사람이 좋았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얼굴에 백치 같은 말투, 맨손으로 소도 잡을 것 같은 몸집에 순박한 웃음, 조로아스터교 교의와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탐독하면서도 핸드폰에는 짱구는 못말려 애니가 있는 사람. 어쩐지 인간적이지 않은가. 양면성이 드러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진실한 사람이다.
발표의 테마는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예술' 이었다. 그리스 미술 위주, 한국의 경우 무영탑 설화 같이 식상한 아이디어만 떠올라서 답답했다. 독특하고 눈길을 끌만한 주제를 찾고 싶었다. 피핀을 보고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향에서 들어본 전설중에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없냐고 물어봤다. 피핀이 살던 곳이 시베리아에 가까운 지역이라 샤먼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마을의 평온을 기원하는 제의가 있는데 그걸 재현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원들 눈빛이 번뜩였다. 피핀은 벌떡 일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운율에 맞춰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피핀 이자식. 어제는 쓸모없다고 치워놓은 잡동사니가 황금으로 변해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서 샤먼 풍습을 다룬 영상을 같이 돌려봤다. 한국어로 된 다큐도 몇 편 있었다.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주술사는 화살로 몸을 찔러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장면도 담겨 있었다.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면서 현대의 기계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험해 볼 수 없는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PPT 자료를 만들어 간략히 설명을 하고 피핀과 린이가 퍼포먼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주술사와 비슷한 의상을 준비하고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북도 빌려오기로 했다. 린이에게 안무를 좀 깔끔하게 다듬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엄지와 검지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뭔가 일이 착착 준비되어 가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종종 모여서 연습을 하고, 끝나면 차를 마시기도 했다. 아싸와 몽골인과 귀머거리 소녀. 기묘한 동행이었다. 같은 수업 듣는 사람들은 우리 모임을 외계 생명체 보듯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런 시선이 강의실 공기를 찔릴듯 날카롭게 만들었다. 린이의 표정은 불안했고 눈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화가 나면서도, 린이가 나랑 같이 다니는게 창피해서 그런가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린이는 예전에 알던 사람과 마주쳐서 그렇다고 말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웠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조별 과제 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학교 화장실에 앉아서 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린이 생각이 났다. 카톡 아이디가 특이했다. 난 아이디에 어떤식으로든 그 사람의 내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dolphinhotel1201. 돌핀호텔? 숫자는 1201호를 말하는 건가? 호텔이라는 어감이 뭔가 꺼림칙하다. 남자친구와 관련있는 단어일수도.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교활한 책략이 떠올랐다. 발표 자료 검토를 핑계로 카톡을 날려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떠보는거다. 역시 JQ(잔대가리 지수) 하나는 상비군급이다.
나 : 린이야 머해
린이 : 저 학교 다와가요. 왜요
나 : 발표 자료 완성했는데 한번 읽어보라고 크크
(자료.ppt)
린이 : 수고하셨어요 오빠!
나 : 에이. 뭘 크크 근데 점심은 먹었어?
린이 : 네 ^-^(이모티콘) 오빠는 점심 드셨어여?
나 : 난 좀 있다 먹으려고 크크 학교 오면 강의실로 바로 와. 피핀도 이리로 오기로 했어
린이 : 네!!
젠장. 철벽이다. 변비에 걸린 것 같았다. 한참을 앉아서 스포츠 기사만 보다가 일어서려고 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가고 나면 나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소심병 환자들의 특징이다. 내 의도와 상관 없이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근데 걔네들 졸라 노답 아니냐. 덩치 큰애는 몽골인이래. 크크"
"걔 여자애 나랑 같은 고등학교였잔아."
"진짜?"
"응. 걔 생긴건 예쁘장하게 생겼잔아. 한 학년 위에 노는 선배가 고백했거든. 귀가 안들려서 그냥 쌩까버렸대. 그거 소문나서 엄청 괴롭힘 받았어. 그 선배 쫒아다니던 여자들 찾아와서 소각장에 막 끌려가구. 그때부터 친구 하나도 없고 졸라 불쌍했는데"
"진짜야? 크크 근데 그 찐따같이 생긴놈이랑 썸타는 분위긴거 같지 안냐."
"몰라. 한번 줬을 수도 있고. 킥킥."
소변기에 물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깔이 뒤집힐 것 같았다. 벨트를 잠그고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 저쪽으로 남자들이 히히덕 거리면서 걸어가는게 보였다.
"야이 개XX들아. 다시 한번 말해봐. 다시 말해보라고."
아무나 한놈 멱살을 잡고 몰아부쳤다.
"남자새끼들이 모여서 몸 불편한애 놀리니까 재밌냐 X새들아"
그놈은 눈을 크게 뜨고 놓으라고 팔을 뿌리쳤다. 또라이 새끼라고 욕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일단 놓으라고 나를 잡아당겼다. 아구창을 아작내버리고 싶었다. 풀무질을 하듯 거친 숨만 씩씩 내뱉았다. 그놈들은 미쳤냐고 밀치면서 나를 위협했다. 칠테면 쳐봐라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때 뭔가 거대하고 검은 물체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피핀이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몽골어로 소리를 질렀다. 엄청난 기세에 질려버린듯 그 새끼들은 뒷걸음질 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육두문자를 뱉으면서 멀찍이 쫒겨가버렸다. 나는 바바리안의 함성 스킬을 받은 것처럼 사기가 잔뜩 올라서 욕지꺼리를 내뱉았다. 피핀이 진정하라는듯 나를 껴안고 토닥였다. 피핀 이새끼, 여포의 백만대군보다 더 든든했다.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강의실쪽으로 몸을 돌렸다. 린이가 겁에 질려 서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무슨 상황인지 대충 눈치를 깐 모양이다.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시커멓게 멍든 린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울지말라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린이는 손에 구깃구깃한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붕어빵 넣어주는 그런 흰색 종이 봉투였다. 나한테 그걸 내밀었다. 열어보니 후문 베이커리 야채빵이 들어 있었다. 까닭 모를 울컥함이 올라와 코 끝이 시큰해졌다.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모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다음으로 미뤘다. 피핀은 우리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린이랑 잔디밭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야채빵을 하나씩 나눠먹었다. 꿀맛이었다. 니가 사주니까 약 487만배 정도 더 맛있다고 말했다. 린이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두잔 진하게 타달라고 했다. 그리고 학교 근처 백양나무 거리를 함께 걸었다. 수직으로 쭉 뻗은 나무 사이로 봄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거나 맨손 운동을 하는 동네 주민들이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이었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미터쯤 거리를 두고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걸었다. 커피를 한잔 다 비울 때쯤 린이의 눈은 불안의 기색이 어느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옆에서 걸어 줄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여자 아이와 함께 걷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오늘 고마어여."
아,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기분 좋은 소리다.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힘들었던 때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여드름 투성이 졸업사진을 꺼내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다. 린이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말이 편하게 나왔다. 예전에 저질렀던 병신같은 일들, 괴롭고 후회되는 일들, 오래된 가족사까지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린이는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린이는 내 말이 언제나 외국어처럼 느껴질 것이고, 우리는 말이 서툰 외국인들처럼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듣는법을 배우는 것 같았다.
린이도 자기 이야기를 해줬다. 중학생 때 뇌수막염을 심하게 앓고 귀가 서서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할 수 없게 돼서 많이 방황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사소한 오해가 화근이 되어 엄청 괴롭힘을 받았다고 했다. 린이는 청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세상의 소리에서 멀어져갔다. 이야기의 전말이 대충 보였다. 린이는 병으로 청력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비겁하고 파렴치하고 신성모독적인 인간들에 의해 중상모략을 당하고 박해를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잔인하게 짓밟고 소리를 강탈했다. 그것도 모자라 간잽이가 고등에 뱃속에 소금을 뿌리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려댄 것이다. 나쁜 새끼들.
무엇이든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졸업하면 무슨일이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나중에 국립 무용단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졸업 후에 유학을 고민중인데 혼자가려니 무섭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넌 어디서든 잘할 수 있을거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편해졌다.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린이는 후련해 보였다.
"근데 궁금한거 있어요. 예전에 수업시간에 뭐라고 하신거에요?"
아, 린이는 들을 수가 없었지. 앞니를 잔뜩 빼서 나훈아 형님 표정을 모사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 말하겠어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다. '어휴, 병신' 이런 표정으로 킥킥 웃었다. 세상의 풍파도 그녀를 거칠게 마모시키지 못했다. 맑은 개울물에 다듬어진 돌멩이처럼 반들반들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