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 사이트에 예전에 제가 올린 글을 작성자인 저의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
* 다시 보니 이게 작년(2017년) 겨울에 작성된 글이라 시점이 조금 다르네요. 뭐 적당히 익스큐즈 해 주십사...헤헤
지금의 아내는 내 첫 여자친구의 베프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베짱으로 그랬을까 싶지만,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당시엔 발신번호가 뜨지도 않던 시절이라, 전화가 와서 받자마자 정말 논스톱으로 아웃사이더급 폭풍 디스랩을 날리고서 마지막에
'나가 뒤져라 이 개X끼야!!!!'
를 일갈하고 끊어버린 걸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 그게 벌써 14년 전 이야기니까, 나도 어지간히 속이 좁다.
아무튼, 그 첫 여자친구랑은 그러나 워낙 교제 기간도 길었고, 헤어진 다음에도 이래저래 연락이 계속 닿고 뭐가 계속 이어지고 하다보니
다른 친구들과도 어찌저찌 계속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었다. 그 첫 여친은 내가 빈에서 한국 올 때쯤 그라츠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귀국 전에 잠깐 그라츠 가서 본 뒤로 아직 못 보고 있다. 얼마전에 드디어 기나긴 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것 같던데, 수도권쪽에 거주중이라는 거 보니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 듯 하다. 근데 만나보고 싶긴 하다. 나랑 지금의 아내랑 결혼한다고 할 때 그 친구가 지금의 내 아내에게 내 온갖 흑역사를 다 폭로하며 '저런 놈과는 만나지 말아라' 라고 진정으로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 조언해줬던 것 또한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두지 않을테다 부들부들...
아무튼 한국 돌아와서 지금의 아내와 우연히 연락이 다시 닿았고, 원체 잘 맞던 친구라 금새 다시 친해지게 되었다. 그래도 그 때만 해도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야, 너네 1년 뒤 요맘 때 쯤 결혼한다?' 했다면 '미친놈 달나라에서 훌라후프 돌리다가 공전주기 망치는 헛소리 하고 자빠졌네' 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아무튼 어째저째 매우 해괴한 우연들과 상황들과 사건 사고들이 겹치면서 우리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급작스럽게 연인이 되었고, 나이가 있는 커플들이 으레 그렇듯이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혼도 참 뭔가 미스테리하게 빠르게 진행되어 버렸다. 결혼식 날짜는 내년쯤... 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에서 예약해둔 커플이 파혼하게 됬다던가 해서 정말 좋은 날이 갑자기 비게 되었고, 기왕 할 거 빨리 시켜 버립시다 라는 양가 부모님들의 빠른 재고처리 본능이 일치하셨고, 그렇게 우리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갑자기 당겨진 결혼식 때문에 네팔 현지조사 가기로 예정되있던 누님께서 결혼식 보고 간다고 이틀 뒤로 현지 합류시점을 늦췄는데 내 결혼식을 했던 날이던가 다음날인가 네팔에서 대지진 나서 누나가 큰 화를 피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역시 세상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주변에 늘 '십 몇년을 알고 지냈다보니 둘 다 척하면 딱이요 아무 문제가 없다' 라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아내랑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막상 실제 결혼해서 같이 살고 보니 안 맞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초반에는 정말 정말 많이 싸웠고, 지금도 한 성깔 하고 굽히기 싫어하는 우리 부부의 성격상 매우 자주 다툰다. 당장 지난주에도 와이프 생일이라 옷 사준다고 시외에 아울렛 매장 가는 길에 내 운전 X같다고 와이프가 계속 옆에서 구박하고 나는 그걸 수긍해야 할만큼 형편없는 운전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욱해서 맞받아 못됬게 말하다가 운전하면서 결국 고성 지르고 싸우고 했었다. 물론 쇼핑몰 도착해서 옷 보러 다니면서 언제 그랬냐는듯 풀어지고 옷도 잘 사고 돼지처럼 처묵처묵 잘 하고 오긴 했지만.
가사일 같은 경우도 대표적으로 둘의 스타일이 정말 충돌하는 부분인데, 정말 더럽게 오질라게 지독하게 청소를 안 하고 집안일을 안 하는 대신 한 번 하면 아주 대청소급에 가구 뒤편 저 어두운 미지의 영역의 더러움까지 청소해버리는 아내의 스타일과, 매일매일 빨래청소설겆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신 전체적인 청소 자체의 완성도라던가, 크게 대청소를 해야 되면 빅픽처를 보는 눈이 비타민 A가 완전결핍된 고도난시환자의 암흑속 길찾기 같은 시야가 되어버리는 저랑 더럽게 안맞아서 청소할 때도 꽤나 잦은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에버랜드 데이트가 캔슬된 이번 주도 간만에 부부가 쉬는데 뭐할지 정하지 않고 보내버리는 아까운 주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의식의 흐름처럼 따로 옆길로 새는 이야기를 하자면, 둘이 같이 쉬는 날을 만들기도 정말 힘들고 당장 내일 일정을 장담할 수 없는 우리 부부에게 같이 쉴 수 있는 휴일이란 그야말로 디아 3 시즌 초반 저단 대균을 돌면서 고대 전설이나 원시 고대 전설을 덜컥 초반에 먹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확률의 희박함을 자랑하는데, 막상 그러다보니 늘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날짜가 막판에 정해진 다음에야 부랴부랴 계획을 짜다가 막상 이러저러한 문제로 결국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날려먹거나 집에서 무료하게 뒹굴거리면서 '그래 체력 떨어졌으니 휴일엔 쉬어줘야 해' 와 같은 정신승리 멘트만 읊어대다 보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전국의 불규칙한 연장근무와 주말근무가 넘쳐나는 월급쟁이들아 우리존재 화이팅이다 ㅠㅠ
아무튼, 그래서 집에서 뒹굴거리며 토요일을 보내고, 저녁에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가서 영화를 보고, 다시 집에 왔다가 내가 너무 추근덕대서 '작작 해라 가족끼리 이러는거 아니다!' 를 시전하신 아내느님과 덕분에 시무룩하게 쪼그라든 나와 둘 다 잠이 확 깨버려서 새벽 세 시 쯤에 잠깼는데 할건 없고, 밀린 이불빨래 하러 빨래방에 가자는 데에 의견이 합치되기에 이르렀다. 우리집 세탁기는 매우 작고 성능이 구리기 이루 말할 데 없었는데, 작년 연말쯤 생긴 빨래방은 우리 부부에게는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차를 끌고 가는 김에 묵은 이불에다 부피 큰 빨래까지 몽땅 들고온 우리는, 몇 대의 대형 세탁기에 세탁물을 나눠 담고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백에서 주섬주섬 뭘 꺼낸다. 얼핏 보고 트럼프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지난번에 갖고싶다 해서 사준 토토로 직소퍼즐이었다.
할 거 없으면 이거나 하자면서 들고 왔더라. 열심히 퍼즐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쎄해서 보니까 아니나다를까 맞추기 편하고 재미있는 부분은 지가 다 가져가고 있고 나는 아무 무늬도 그림도 없는 흰색 직쏘 조각들만 내 앞으로 와 있다. 그래 이래야 내 아내답지. 웃고 있는데 눈가가 촉촉해진다. 나도 사실 직소퍼즐하면서 재밌는 부분 맞춰보고 싶은데...
아무튼 심드렁하게 직소퍼즐 맞추고 있는데 중간에 허리랑 어깨가 아파서 으드드드드드 와 같은 해괴한 소리를 뼈와 입에서 동시에 내면서 일어날 때 쯤 빨래가 다 됬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비척비척 일어나서 건조기로 옮겨 담고 건조기를 작동시키고 나니까 내가 앉아있던 자리 앞에 뭐 빨갛고 귀여운 뭔가가 놓여져 있더라.
'이기 뭐꼬?'
'뭐긴 뭐야 눈깔이 삐었나? 딸기다'
'니 아까 빽만 들고 털레털레 왔잖아 딸기는 어디서 났노?'
'니 딸기 좋아하잖아. 그거 다 옮겨담는데 한참 걸릴거 같아서 요 옆에 문 안닫은 마트 있길래 쪼매 사왔다'
그러고보니 이제 겨울이라 딸기의 계절이 온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인 건 맞는데, 아마 내가 딸기를 좋아하는 것 보다
아내가 추운 날씨를 싫어하는게 한 38만5천 배는 더 심할거다. 그러고보니 아내의 코끝이 루돌프처럼 빨갛다.
너무 좋아하는 딸기가 갑자기 눈앞에 뙇 하고 나타나니까 기분 좋은 척을 안하려고 해도 아마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한테 아마 강아지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이 순간 내가 아무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해도 맹렬하게 흔들어대는 꼬리 때문에 들켰으리라. 눈치는 빨라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걸 보더니 지도 실실 쪼갠다. 아무래도 이번에 아울렛에서 예쁜 옷 사준 게 좀 먹혔나보다. 아니 생각해보니 요새 지 빨래 해야되는것도 다 해놓고 출장갔다 오자마자 바닥 청소도 해놓고 점수 딸 기회가 몇 번 있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딸기라니. 흑흑. 고마움이 사무친다.
'무글때 단디 무그라. 딸기 물 퍼즐에 튀면 패지기뿐다'
아 이 곱디고운 말투를 보니 다른 사람이 놓고 간 건 아닌 것 같다. 우리 아내가 확실하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그래도 나는 아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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