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년간 가내두루 우환이 어마무시하게 겹쳐서 힘들게 보낸 이후 책을 읽은다고 해도 그렇게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 이후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 공부를 손에 놓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고 해도 너무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을 뿐더러,
밥을 벌어먹고 살려면 올해 후반부터는 다시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올해부터 나는 초서(草書)공부를 다시하기로 맘먹었다. 하루에 간찰 2장씩.
해석하고 초서를 그대로 따라 쓴다. 붓펜으로도 따라 쓴다.
이렇게 하니 조금씩 감이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초서가 아른아른 보일 정도.
역사 공부를 할 때 1차 사료를 읽기 위해서는 한문해독력이 필수다. 아무리 요즘 조선왕조실록이나 여러 사료들이 한국고전연구원이나 다른 연구원, 센터에 의해서 한역이 잘 되어있어 한문을 잘 몰라도 쉽게 접근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본질적인 1차 사료들은 정말 라면처럼 꼬불꼬불 씌여 있는 초서로 의해 작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초서는 요즘으로 보면 속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정말 붓의 궤적(軌跡)에 따라 막 흘려 쓴 것이기 때문에 읽기가 굉장히 이상하다.
대학원을 막 들어갔는데 선배라는 인간이 나보고 다짜고짜 수업 당일 아침에 오늘 수업에 할 것이라고 고문서 한 장을 던져주고 이것을 해석을 하라고 했다. 그것은 ‘명문(明文)’으로 지금으로 보면 ‘부동산 계약서’다. 하지만 대학원을 막 들어가서 한자도 겨우 읽을 수 있던 내게 그런 암호보다 더 복잡한 꼬불 글씨로 된 명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니, 차라리 불어를 그 자리에서 읽으라 하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그때 그걸 읽으라고 했던 선배라고 말하기도 싫은 인간의 이야기까지 나오면 더 빡칠 것 같으니 여기에서 이만...)
하지만 그 때는 몰랐다. 명문은 정말 고문서에서 초초급 수준으로 읽기도, 해석하기도 쉬운 문서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자면 명문은 보통 서식을 맞춰쓰기 때문에 몇 장만 읽으면 감이 잡혀서 대충 무슨 내용인지 읽을 수 있다. 그 몇 장이 한 10장 정도는 빡시게 읽어봐야해서 문제인거지..)
초서 중에 정말 최최최고난이도는 바로 ‘간찰’이다.
간찰이란 우리가 말하는 편지인데 이놈의 편지라는 것이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서식이 잡혀있어 몇 번 읽어보면 통밥으로라도 무슨 내용인지 굴려서 알 수 있는 명문이나, 관에 올리는 소지류(所志類)에 비하면 이건 통밥으로라도 굴릴 수가 없고, 감을 잡아서 이게 무슨 내용이구나 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초서 간찰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첫 번째, 개인적인 내용이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내용이기 때문에 정자(正字)로 또박또박 쓴 편지가 굉장히 드물다. 역사 인물 중에 유명한 사람들도 다른 글에는 정자로 예쁘게 썼다하면 간찰에는 아주 날려씀이 예술이다. 그냥 보면 이 사람이 붓을 조종했던 것인지, 붓이 이 사람을 조종했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솔직히 생각하면 우리도 중요한 곳에서는 또박또박 쓰다가 지인들에게 편지나 쪽지를 쓸 때에 날려 쓴 것을 생각하면 그들도 우리랑 똑같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개개인의 글씨체는 다르기 때문에 그것도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점 하나가 전혀 다른 한자일 확률이 많다. 일본어의 히라가나는 초서에서 많이 따왔기 때문에 초서를 읽다보면 히라가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히라가나 중에 ‘あ(아)’라는 글자는 한자 ‘安(안)’에서 나왔다. 초서 중에 아자와 비슷한 한자가 나오면 그것은 100% 安이 맞다. 하지만 저기 아 가운데 점 하나를 찍는다면? 그것은 그럼 ‘每(매)’가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한자가 되니 정말 초서는 많이 읽고 많이 보는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보내고 받는 지칭이 정말 다양하다. 과거에는 字(자)도 썼고 號(호)도 썼기 때문에 이 사람을 지칭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거기다가 존대하는 표현으로 阿兄, 仁兄, 貴兄 등등이 호칭도 굉장히 많이 쓴다. 이 사람들의 자와 호, 각자 표현을 알지 못하면 이 사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거기다가 제3자로 언급된 사람도 자나 호로 표현해버리면.... 답이 없다. 그러니까 편지 고문서들이 나오면 그 가문의 족보를 보며 가계도부터 그리면서 비교하며 봐야한다. 그래서 내가 남의 가계도 그리는 것에 도가 텄다.
네 번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유학(儒學)이 기반이 되어 있으니까 사서삼경은 기본이오, 여러 유학 이론들을 주고받는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이건 꼭 간찰 뿐 아니라 당시 그들의 일기나 문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서간찰을 읽으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후손들이 선별해서 수록하는 문집들과 달리 정말 당시의 생활상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당시 누가 아팠는지, 누가 돌아가셨는지, 누가 시집장가를 갔는지 등등의 생로병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누구를 통해서 보냈는지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직접 갈 수가 없어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직접 갔으면 왜 간찰을 주고받았겠는가? 직접 얼굴보고 말하지.) 꼭 거기에 ‘누구누구를 통하여 대신 보낸다.’ 혹은 ‘우리 집안 가노(家奴)가 대신 가니까 보낸다.’ 등을 꼭 써 보낸다. 그리고 어떤 물품을 얼마나 보냈는지도 꼭 쓴다. 중간에 누가 가로챌까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들은 받으면 성의표시나 돌려보내기도 잘한다. 편지 처음에 ‘承(승)’이라는 말이 있으면 그 전에 편지를 받아서 답장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늦었으면 왜 늦었는지, 이유까지 상세히 적어서 보낸다. 그 전의 편지에서 아프다는 글귀가 있었으면 약도 몇 첩 지어 보내고, 추우니까 버선(襪)도 보내고, 더위에 고생할까봐 부채(扇)도 보낸다. 참 선조들은 어쩜 이렇게 정들이 넘쳐났는지. 사람 사는 것은 시대불문하고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10년 1월에 성남에 있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주 동안 고문서강의를 들으면서 초서연구에 30년 넘게 하신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가 당신은 지금까지 초서공부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도 고문서로 박사논문까지 따시고 고문서로 강의를 하신 분이시지만 가끔 헛갈리고 몇 번은 더 들여다봐야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하신 분들께서 이리 말씀을 하시니 지금까지도 나는 초서는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공부들이 오랜 시간동안 알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초서는 더 많은 시간동안 종류불문하고 여러 고문서를 읽어나가면서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아, 나는 생각해보면 정말 어려운 길을 자초하며 걷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