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이켜보면 항상 내가 먼저였다.
중학교를 다닐 땐가? 뜬금 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같은 반 여자 아이는 일주일 후에 갑자기 내 친구를 좋아한다고 그랬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나를 좋아하는 과후배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기분이 오묘했다.
허나 알고 보니 그냥 동아리방에 담배를 보루째 사다놓는 나한테 시시때때로 담배를 빌리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거였다.
어릴 적 그 친구는 내 친구와 연애를 시작했고, 과 후배는 일주일에 한 두갑씩 꼬박꼬박 담배를 빌렸다가 갚았다가 그랬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은 기억을 쥐어짜내도 이 둘이 전부였다.
그 외 나와 연애를 하거나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먼저 좋아했다. 아니, 먼저 좋아하게 됐다. 아니. 별 차이 없는건가.
뭐 하긴, 특별할 것도 없는건가 싶다. 다들 그렇게 살지도 모르잖아. 아무튼 그랬다.
#2
사랑에는 끝이 없지만 어떤 사랑에는 끝이 있다고 했다.
이 단순한 명제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나의 10대와 20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30대를 또렷하게 관통하게 될런지.
숱하게 많은 여자들을 만났던 건 아닌데, 그래도 적지 않은 몇 번의 연애는 꽤나 내 인생에 큰 방점을 찍으며 나를 좌절하거나 성장하게 했다.
지겹지도 않을 만큼 길고 길게 이어지는 사랑에 대한 나의 욕정은 깜빡깜빡 빛이 날 때도 있었고, 시큼한 비린내를 풍기기도 했었고
그 때마다 찾아온 어떤 사랑들이 항상 내게 적시었다가, 혹은 움푹 패였다가, 언제고 끝이 나서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갑자기 비가 오는 오늘 같은 날이면 지난 날의 내 모습을 종종 생각해본다.
나중에 문득 생각났을 때 참 좋은 인연이였지. 하고 말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던 그 순간들을.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았다. 칼에 베였거나, 화상을 입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여타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나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냥 따끔한 이별도 있었지만, 끔찍하고 또 끔찍한 이별도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아팠지. 당연히 난 그게 너무나도 싫었다.
#3
내가 먼저 다가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일까. 잃을 게 많은 사랑을 한 건 항상 내 쪽이였다. 아니, 그걸 선택한게 나였다.
언제나 더 사랑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이 잃어야 하는 것만 같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항상 아찔했다. 기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거라는 비스무리한 말을 했던게 생택쥐페리였나.
아무튼, 우연만큼 사랑을 빛나게 하는 건 없었다. 허나 우연이란 감정을 증명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괴로운 일이였다.
나와 만났던 모두가 그랬던건 아니지만, 대체로는 내 감정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확신을 원했고 나는 부단히도 나를 설명하려 노력했다.
사랑일까, 싶었던 생각의 뿌리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기도 했고, 두 세번쯤 더 살아도 다시는 겪지 못할 빛나는 우연이 있기도 했고
그냥 흔해 빠진, 누구나 겪는 그런, 그치만 나한테 일어났기에 소중한 일들도 있었다.
그런 고백들이 있었다. 물론 승낙을 한 사람도, 거절을 한 사람도 있었다. 승낙은 좋았다. 거절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사랑이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열정이라면, 편지로 전해줄 수 없는 욕망이라면, 일기장에조차 적을 수 없는 괴로움이라면
나는 무엇으로 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해봤지만 매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보통 눈물이 났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감정을 무슨 수로도 상대방에게 전달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게 한없이 무섭고 끔찍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데도, 무력하게 모든 관계가 끝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똑바로 소통할 수 없는게, 사랑 할 수 없는게 무서워서였을까.
#4
작년부터 똑같은 꿈을 꾼다. 어딘지 모를 곳에 정돈된 식탁이 놓여 있고, 꼿꼿이 허리를 편 채로 앉아 있는 걸 깨닫는 게 꿈의 시작이다.
건너편엔 항상 누군가 앉아 있다. 누군가는 엄마일 때도 있었고, 직장 동료일 때도 있었고, 애뜻하고 역겨운 첫사랑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누군가는 달라지지 않는다. 깊게 생각해도 알 수는 없으나, 어느 순간 이후로는 그랬다.
우리는 무언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헤실거린다. 그 아이가 무언가 이야기를 한다.
시덥잖은 소리 같은데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마치 내 일인양 듣고 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보면 어느새 식탁에는 근사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윤기 나는 고기를 한 점 집어들어 밥그릇에 놓고, 고슬고슬한 밥알과 고기를 적당히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 문다.
우리는 내내 웃고 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 같은데도 나는 마냥 즐거워서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렇게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잠에서 깬다.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면, 잠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고, 새벽의 한 가운데일때도, 아침쯤 일때도 있었다.
#5
모든 사랑은 우연인걸까.
나는 많은 우연을 겪으며 이미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사랑인가, 아닌가, 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누구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로 되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 뿐이다.
너와 나를 스쳐지나간 많은 일들과, 웃음과 울음, 건네었던 선물과 마음과, 그리고, 그리고, 그 많은 순간들.
우리 사이에 놓인 시간과 유보한 감정들을 곱씹는다. 왠지 너를 떳떳하게 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이내 부끄러워진다.
그, 고슬고슬 쌀알과 윤기 나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드는 꿈을 꾸는 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쓸만한 이유가 되어줄 수 있을까.
부디 내가 전하게 될 사랑이나,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너에게 아픈 일도, 괴로운 일도 아니였으면 좋겠다.
이 오묘한 순간을 매듭 지어 너에게 전해주는 그 순간에, 나는 올바로 너에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함께 고슬고슬한 흰 쌀 밥에 윤기 나는 고기 한 점 얹으며 그렇게. 그렇게. 그랬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을 나의 사랑이 앞으로도 반짝반짝 빛났으면, 그래서 내가 행복했으면, 부디 그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