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없습니다)
1. 영화 보기 전 제가 가장 염두했던 포인트는 주인공 'P.T 바넘'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그릴 것인가 였습니다. 바넘은 소위 공과 과, 또는 호와 오가 뚜렷한 인물일 수밖에 없어서 이 중심을 잡지 않으면 작품은 한 쪽으로 매도되기 쉽기 때문이죠. 결론만 말하자면
중용의 미덕을 잘 지킨 각본이었습니다. 바넘의 가치관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사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려했다는 노력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관객들은 인물 해석 선택의 자유가 생겼죠. 또한 바넘의 여정이 드라마틱 하기에 그저 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영화의 러닝 타임이 훌쩍 지나갑니다.
2. 영화의 시간을 잡아먹게 해주는 건 비난 바넘의 캐릭터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미칠듯한 속도전'을 한다 겠죠. 오프닝이 열리자마자 이 속도감은 현실 세계의 관객들을 빠른 시간 내에 영화 안으로 끌어드립니다. 변화무쌍한 촬영과 스피디한 편집, 그리고 빠르고 격함에 보다 치중된 안무 편성 등이 이 속도감을 받쳐주고 있죠. 문제는 중반부부터 작품 스스로 한 번씩 자신의 빠르기에 취해 '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하는 면이 있습니다.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휙 넘겨버리거나, 관객에게 만들어준 감정의 향취를 다 맛보기도 전에 '그릇'을 빼앗아 버리기도 합니다.
3. 이렇게 여러 차례 '신호 위반'이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해 건드리는 지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아마 영화라는 매체, 그것도 나름 덩치가 큰 작품에서 취할 수 있는 제일 적절한 관점을 가졌다고 해야할까요. 이것을 뻔하다고 여길 분들도 계실테지만 오랜 세월동안 아주 많은 영화에서 약자를 다루는 태도가 문제화 된 게 비일비재 했던 만큼 절대 쉬운 분야가 아니라고 간주됩니다.
[위대한 쇼맨]은
바람직한 태도를 가진 영화이며 억지스러운 고무 또한 아닙니다. 이건 분명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을 이유가 될 것입니다.
3. 전통적으로 뮤지컬의 핵심은 당연히 음악이겠죠. 전체적으로 대부분 좋은 퀄리티로 나왔습니다. '이건 올해의 노래야 / 뮤지컬 역사의 남을 곡이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킬링 트랙이 있지는 않으나 넘버 전체 중에
버릴 곡 (망곡)은 없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특히 엔딩 곡 "From now on" 과 러브 테마 격인
"Rewrite the stars"가 가장 뇌리에 남습니다. 이중 후자는, 다른 여성 보컬 하이라이트 노래 두 곡이 '힘 들어간 고음 강조' 노래임에 반해 그렇지 않았어서 더 듣기 좋았습니다. 젠다야의 멋진 중저음을 들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4. 가창과 연기는 딱히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미셸 윌리엄스가 지닌 미모와 연기력에 비해 다소 뻔하고 소모적인 '부인' 역할로 나왔고, 서브 스토리 격인 '젠다야 & 잭 에프론'의 이야기가 도식적이며 큰 매력을 갖고 있지 못하여서 크게 연기력을 발휘할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허나 이 작품은 지엽적으로 배우의 모습을 보는 영화라기보다
영화를 통째로 감상하게 만드는 작품이기에 큰 약점으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5. 많은 분들이
[라라랜드]와 비교해서 어떤가 궁금해하십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 넘버 장르, 가창 스타일, 안무 동선, 주제 등 대부분의 면에서 같은 '뮤지컬 장르'라는 점 외엔 유사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즈 루어만의 작품들이 좀 더 떠오릅니다. 한 남자의 야망을 다뤘다는 면은
[위대한 개츠비]가 비슷하고 특히
[물랑루즈]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힙니다. '쇼'를 소재로 하면서 물량공세로써 화려함을 강조했고, 여러 대사 및 공간적 지점에서도 물랑루즈를 오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겹쳐 보입니다. 그렇다고 '따라했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무엇보다 '물랑루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의 정서를 머금은 채 달리는 영화이고 본 작품은 그렇지 않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6. 이것저것 다 떠나서 여러 뮤지컬 중에
[위대한 쇼맨]의 호불호 위치는 어떻게 되냐 궁금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물랑루즈]는 제 인생 최고의 뮤지컬 영화이어서 이걸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라라랜드]와 비교하면
근소한 차이가 나긴 하나 그에 근접한 영화였고요. (제 기준에서) 다른 점은 '라라랜드'가 2시간 내내 고전하다가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 역전 홈런을 친 작품이었다면, '위대한 쇼맨'은 초반에 대량 득점 하고 중반부터 다소 미진한 플레이를 하며 위기가 오다가 다시 후반에 굳히기에 성공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라라랜드'가 근소 우위에 있는 영화지만 재관람 욕구는 전혀 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위대한 쇼맨'은 희한하게 재관람 욕구가 큰 작품입니다. 이 개인적인 미스테리는 실제 재관람을 하면 풀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비극적이거나 비장한 정서로 일관하지 않는 뮤지컬 중에서는 오래 기억될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올해 개봉했던 또 다른 뮤지컬 영화
[미녀와 야수]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대중이 좋아할 영화라고도 생각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