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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7/11/27 18:00:45 |
Name |
현직백수 |
Subject |
[일반]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수정됨) |
열심히 해야지 뭐 방법이 없다고 누군가가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열심히 인생의 좋은 경험 해본 후기를 남겨봅니다.
1.
수능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용돈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
사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 라는 것에 대한 약간의 동경 비스무리한게 있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쓴다니...을매나 기쁘게요~
첫 아르바이트는 동네 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대형 해산물뷔페. 오래전 잠깐 일했던 곳이지만 이름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난다.
수 년여간 수십개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했고 이 첫 단추는 아주 더럽게 잘못 꿰어졌었다.
지금은 망해 없어졌는데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든 생각은 '아직 정의가 살아 숨쉬는구나'
시급이 4000원정도였는데 그 마저도 수습기간동안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근무환경마저 열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도 아르바이트로 잘 써준다는 소문에
아르바이트 지원자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여자들은 홀, 남자들은 주방보조로 많이 빠졌다.
나는 남자다. 여자이고 싶었다.
11시간가량 딱딱한 장화를 신고 서있는 것 부터가 헬이었다.
딱히 일과라고 할 것도없다.
설거지 - 주방청소 - 창고에서 재료 및 냉동식품 가져오기 - 주방 형들 헛소리 웃으면서 들어주는 척하기
무한 반복이다. 가끔 구간반복도 하고 한 곡 재생만 하루 종일 할 때도 있다.
마감하는 날엔 내 키만한 짬통을 구루마에 실어 짬처리장까지 간 후 친구와 함께 욕하며 엎어놓으면 된다.
밀린 설거지를 싹 하고 나면 설거지를 했던 크나큰 싱크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 냉동된 킹크랩을 무더기로 가져와
싱크대에 잠수시켜놓는다. 그리고 적당히 해동이 되면 손님들에게 내보내지는 것이다.
냉동실에서 냉동연어를 꺼내다가 뒤집어져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물로 씻어서 해동시킨 후 손님에게 내보내는 것을 보았을 때.
생각했다. '아..손님도 불쌍한 존재일 수가있구나'
귀하게 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적이 없었다. 막 컸으면 막 컸지.
습기 낭낭하고, 밑창이 얇은, 딱딱한 장화를 신은지 11시간쯤 되면 고통에 몸부림 치다가 문득문득 의문이 생겼다.
' 내가 고생안하고 귀하게 컸나?'
' 이렇게 아픈게 정상인가? 아니면 내가 비정상인가?'
지금 와서 답을 내려보자면 아무래도 비정상 이었던 것 같다.
점심 저녁은 항상 밥에 된장국, 김치찌개 였다. 뷔페음식은 딱 구경만 했던 것 같다.
그딴 것 아무래도 좋았다. 11시간 동안 유일하게 쉴수있는 기적의 40분이었기 때문에.
그만 두던 날.
마지막까지도 장화에 적응하지 못한 발을 부여잡았다.
신발을 신을 자신이 없었기에 신발은 손에들고 눈밭의 고라니마냥 맨발로 집까지 달려갔다.
친구집에 도착해서 서로 쓴웃음을 짓다가 주저앉아버렸다.
아마 2017년이었으면 서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이거 실화냐?"
2.
지독한 경험을 하고도 정신을 못차리던 와중에 친구네 아부지가 운영하시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손님들이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전을 제출하시면 나는 그것을 전산프로그램에 입력했다.
처방전이 필요없는 약 및 건강보조제들을 판매하기도 했다.
손님이 100명 1000명이 와도 자신있었다. 처방전 입력은 너무나 쉬운작업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 싸이월드만 주구장창 했다.
그 때가 투데이와 토탈의 정점을 찍었던 시기였다.
정시출근, 정시퇴근 . 내 노력의 가치에 비해 너무높다고 생각했던 일당.
삼위일체 그 자체였다.
나를 아들처럼 잘 대해주시고 숙식제공까지 해주셨던 친구네 부모님내외의 은덕을 아직도 잊지 못해
얼마전 아주머니 생일날 생일케이크를 보내드렸다. 죄송하지만 아저씨 생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하루하루 마감전 정산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친구가 외국에 거의 살다시피 하는 이유를 깨닫고 끄덕끄덕이게 된다.
그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면 약국부터 찾기 시작했었다.
3.
대학교에 입학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통신비, 식비, 월세
학교앞에 꽤나 괜찮은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서빙하고 테이블만 치우면 되는 일이었고
손님이 많아 바쁘긴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마감을 하고나면 주방형과 누나들이 차려주는 안주와 공짜술은
대학생활의 또 다른 樂 이었다. 덕분에 내 학교생활은 落 이 되었지만.
특이하게 헌팅을 시도하는 남자손님들이 다른 술집에 비해 많았다.
이상하게 자꾸 띵동 벨을 누른 후 나를 불러서 작업을 대신 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창가쪽 테이블 노란머리 여자분 남자친구좀 있냐고 물어봐주세요"
아니 팁이라도 주든가 ;;
그런쪽으로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바시켜서 " 님 남자친구 유?무? " 물어보는건 여자입장에서도 별로였을 것이다.
딱히 나도 내키지 않았지만 알바주제에 손님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미안해서
여성분들 테이블에 가서 여쭤는 봐드렸다
" 저기 모서리 테이블 청자켓 남자가 손님 남친있냐고 물어보시는데, 그냥 가서 있다고 할게요 "
대게 여성분들의 반응은
남자테이블 한번 보고 다시 나를 쳐다 본후 웃으며 "네~~^0^"
일을 재밌게 했고 맥주 500cc 12잔쯤은 거뜬히 나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여름방학과 함께 그 곳을 떠났다.
군 제대 후 다시 찾아갔을 때 모든게 변해있었고, 추억은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하였다.
4.
대학교 첫 여름방학을 맞이해 집에 내려와서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여름방학 내내 몸바쳐 일했던 동대문 어딘가의 디저트 카페
이곳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일만 하면 가게가 사라지는 주호민급 파괴력...무엇..
직접 휘핑크림을 만들고, 신선한 야채로 샐러드를 제조하고,
수입맥주도 팔고... 마동석 팔뚝만한 크레페도 만들고 , 커피도 내리고
정말 인생의 좋은 경험을 했었다.
한 때 오덕기질이 다분해 각종 일본 아니메를 섭렵하던 시절 배워둔 일본어로
무수히 많은 일본인손님들을 상대했다.
코레, 소레, 하잇, 아리가또, 욘센 산뱌끄원 데스~ 정도만 알아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가게를 향해 다가오는 일본인 무리를 보면 미리 사용해야할 일본어를 시뮬레이션 돌려봐야 버벅거리지 않는다.
한 번은 체인사슬을 치렁치렁 감은 남자와 크나큰 인형을 등에 업은 여자 등을 포함한 코스프레 군단이 계산대 앞에 섰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식은땀이 났었는데
큰 인형 업은 여성분이 "이거 얼마에요? 라는 첫 마디를 꺼냈을 때
매니저누나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5.
스무살이 끝나갈 무렵,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멘토링 사업을 진행하며 2학기를 마치고
입대 하기 전에 생각했다.
' 아.. 꽤 훌륭한 20살 이었구나 좋은 경험 많이하고 갑니다! '
제대 하고 나서 그 경험따윈 별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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