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인물들의 외모는 그림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는데, '역사적 인물' 에 대한 그림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그림은 상상화가 대부분 입니다. 일단 당대 인물이 초상화를 남겼는지 남기지 않았는지도 문제가 되고, 설사 남겼다고 해도 수백년에 걸친 시간 동안 이 그림들이 온전히 보존되기가 또 힘듭니다. '왕' 이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어,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어진' 중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의 어진은 남아 있는게 없습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야 워낙에 예전이니 그렇다 치지만, 다름 아닌 조선시대의 어진조차 남아 있는 것은 몇점 되지 않습니다. 왜란, 호란 등의 난리 떄문에 화를 입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어진을 옮겼다가 하필 대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하지만 화를 피하고 남아서, 당대 왕의 실제 외모를 보여줄 수 있는 어진이 남아 있는데 게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가장 먼저 그려졌을' 태조 이성계의 어진입니다.
이 어진은 이성계의 아들이었던 태종이 이성계 사후, 이성계의 어진이 그려졌던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한 뒤, 여기저기 화를 피해 다니고 모사되고 한뒤에 남아 있는 어진 입니다. 이성계 사후 그렸다곤 하지만 원본을 '모사' 해서 그린거라 약간의 가감은 있다쳐도 실제 생전에 남긴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거니 외모의 파악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성계가 왕이 된 나이가 57세로, 왕이 되고 나서는 50대 후반 ~ 60대 가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채가 위압감이 있습니다. 나이 먹고도 이 정도였으니 젊은 시절에는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사실 당대에 태조 어진은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인 장군 시절의 어진도 있었고 말에 타고 다니던 어진 등도 있어서 이게 다 남아 있었다면 대단히 인상적이었겠지만, 아무튼 저 어진만 봐도 이성계의 생김세나 풍채는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문헌으로 남아 있는 이성계의 외모와 풍채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조는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을 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게 훌륭하였다. 어렸을 때, 함흥과 영흥 사이를 왕래하면서 놀았는데, 매를 구하는 북도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신준(神俊)하기가 이성계 같은 매를 얻었으면……” 하였다. 용맹과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활 쏘는 법이 신묘하였다. 함흥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는데, 여러 사람들이 소 싸움을 말리려고 하였지만 말리지 못했다. 옷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불을 붙여 던지기도 하였지만 말릴 수 없었는데, 태조가 양 손으로 두 소를 나누어 붙드니, 소가 싸우지 못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또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신채(神彩)가 영준하였다. 키는 커서 우뚝하게 곧으며, 귀가 큰 것이 뛰어나게 달랐다. 명 나라 사신 왕태(汪泰) 등이 그의 신채에 탄복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기이하다 귀여, 고금에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다.《용비어천가》
뭐 '한 손에 소 한 큐씩 잡아세웠다' 라는 식의 기록이나, 한고조 유방의 외모 묘사에서도 볼수 있는 '용의 얼굴' 같은 식의 기록은 어느정도 가감을 해야겠지만, '키 크고 체격 좋고 풍채가 훌륭했다' 는 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외모야 태조니 적당히 추켜세워 준다 쳐도, 풍채는 당대에 보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멸치 체격을 가진 사람을 무슨 wwe 바티스타마냥 띄우는 건 한계가 있으니 실제로도 체격은 좋았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또 인상적인 기록이 있는데, 용비어천가에 언급되는 '귀가 크다' 는 점입니다. 명나라 사신도 '신기한 귀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듣고 나서 보니 그런지 몰라도 어진을 보니 확실히 귀가 큰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많았다면 아마도 유비의 귀마냥 이성계 외모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도 있을만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여하간에 이성계는 문헌에서의 묘사로 보나, 어진으로 보나, 그야말로 힘 잘쓰게 생긴 장사 체격 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재미있는 대조를 보이는 인물이 있으니...
이성계와 의형제 사이였다는 이지란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 中
원(元)나라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의 연호 1341~1367년) 연간에 태조가 고광성(古匡城)을 정벌하였다. 어느 날 의비(懿妃) 최씨(崔氏)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말하기를, “개강(价江)에 활을 잘 쏘는 자 패왕(覇王)을 보필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공이 개강(价江) 가에서 활을 쏘아 사슴을 잡았는데 태조가 한번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형제의 의를 맺고 신덕왕비(神德王妃) 강씨(康氏)의 종녀(從女)와 혼인을 맺어 주었다. 출병할 때마다 반드시 공과 상의하고 공을 대동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비로소 공이 북청으로 왔다.
元至正中 太祖從征古匡城 懿妃崔氏夢老人來言价江有射者伯王之輔也會公射鹿价江上 太祖一見大奇」
之結爲兄弟以 神德王妃康氏從女妻之每出師必與公俱公由是始歸北靑辛禑西狩至大寧命武臣射以白金二寸爲之的」
太祖射輒中其的禑甚喜公諷 太祖曰才美何示人多邪 太祖悟益服其智蒙古丞相納哈出率數萬騎入洪肯公引兵踰咸」
혼자 활로 사슴 잡다가 우연찮게 이성계와 만나, '형제의 연' 을 맺어 서로간에 의형제가 되었다는 정말로 기이한 인연이 있는 이지란 입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지란과 이성계의 '의형제'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은데, 이지란신도비에는 해당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지란신도비에는 이지란의 '외모' 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公容貌靚和端麗如婦人及爲將威震四方其大節不可奪
'공의 용모는 단정하고 아름다워 마치 여인과 같았는데, 장수가 되어서는 위세가 사방을 진동시키고 큰 절개를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었다.'
"뭐이? 이 간나 애미가 뭐이가 어드래?"
여인과 같은 용모라니,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싸나이 의형제 이지란의 이미지는 어디로 가고 커피 프린스 윤은혜가...
물론 '여자 같은 외모였다' 라고 해도 그렇게 무슨 서브컬쳐에 나오는 '여장남자' 급의 외모라고 보기에는, 실제 이지란의 초상화가 남아 있어서 이를 보면 알 수 있듯 무리입니다. 이 초상화는 본래 전신상이었던 초상화를 모사한 것으로 워낙에 드문 조선 전기 초상화(본래는 전신이었던것을 반신만 옮긴게 남은 것이긴 하지만)라 가치가 있다고 평가 됩니다.
다만, 1331년 생이었던 이지란이 고려에 처음 귀의한 시기가 40세였고, 고려에서 무장으로 활동할때는 40대 중반에서 50대는 훌쩍 되었을 나이며, 조선 건국 때는 이미 60세를 넘겼던 노령이었습니다.
이지란이 초상을 남겼다고 하면 40대 이후에야 남겼을텐데, 이성계와 처음 만나고 같이 활동할때는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의 연호 1341~1367년)이었으니,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20대 쯤이었을 겁니다. 저 초상화도 최소 40대 중반대 무렵에 50대 즈음에 그린 그림이라고 치면, 젊었을때는 '한 외모' 했을 것도 같습니다.
그림은 원한의 거리님.
거의 드립이지만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이성계가 '황산 전투' 에서 적의 대장 아지발도를 만났을 때 반응이 있습니다.
(아지발도가)보기에는 나이가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그 급박한 전투 와중에 스무살도 안되어 보이는 잘생긴 미소년이 용맹을 떨치고 있자 그 와중에 "적이지만 죽이긴 아쉽다, 어떻게 사로 잡을 수 없을까." 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 이성계. 조조가 유부녀 킬러면 이성계는 미소년 킬러인지...
"야, 날도 좋고 사슴이나 잡아 볼까!"
"이야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 참 화살 잘쏘네"
"누구세요?"
"나랑 의형제나 하자!"
"네?"
"내 마누라 종녀從女가 아직 결혼 안했는데 결혼이나 하세!"
"????!!"
"헉헉, 적들의 군세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아, 그 놈 참 잘 생겼네."
"네?"
"아지발도 저거 나이도 어린데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네 저거."
"아니 지금 전투가 급박한데 무슨..."
"쟤 어떻게 안 죽이고 살려서 잡을 수 없을까?"
"(황당)아니 지금 군대가 끝장나거나 말거나 하는 판인데 뭔 소리?"
아무튼 그렇게 젊을때 한외모, 아니 한'미모' 하신 이지란은 나이가 중년이 되어 뜬금없는 새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당시 판서(判書)를 지내다 죽은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尹氏)가 여러 해 동안 과부로 있으면서 행실이 매우 추잡했다. 그 어미가 윤씨를 전 홍주목사(洪州牧使) 서의(徐義)에게 개가시켰는데 겨우 며칠 만에 윤씨가 서의를 싫어하여 내쫓았다. 헌사가 탄핵하고 군졸을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자 이인임 등이 윤씨에게서 많은 뇌물을 받고는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이두란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고 추키며 윤씨를 그의 처로 삼게 했다. - 고려사 이두란 전
고려사절요 1383년 9월 기사中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이성계의 밑에서 무용을 떨치며 명성을 날리던 이지란에게 한 다리 걸쳐놓으면 나쁠 게 없다고 여겼는지, 다름 아닌 당시 고려의 실력자 '이인임' 은 자신이 직접 이지란의 부인으로 '윤씨' 라는 사람을 찾아서 연결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윤씨라는 사람이 음란하기로 유명했던 여자라, 본래 남편이 죽은 뒤 과부로 살면서 여러가지 의미로 명성을 떨쳤고, 어머니가 딸이 새로 시집이나 가서 정신 차리라고 결혼 시키니 남편이 마음에 안들어서 남편이 마누라를 내쫒은게 아니라 마누라가 남편을 내쫒은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기록을 보면 중하고 간통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인임에게 많은 뇌물을 줘서 처벌을 면했다거나, 남편이 마음에 안 드니까 내쫒아버렸다거나, 사언부가 처벌을 하려고 했지만 세력이 강해서 죄를 면했다거나 등등 집안은 상당히 권세가 있었던 집안이었나 봅니다. 여하간에 두 사람이 결혼한 후 윤씨가 이지란을 쫓아냈다거나 혹은 같이 살아보니 싫어서 떠났다거나 하는 말 없는 거 보면, 이 누님은 새로 얻은 잘생긴 남편이 마음에 들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