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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0/05 10:50:45
Name 나이스데이
Subject [일반] [현대]홍길동전 (수정됨)

현실이 얼마나 고달프길래 당신의 핏줄인 나에게 그딴 저급한 얘기를 당당하게 건네시는 건가요.

심지어 독촉까지 하시는 건가요. 쓰디 쓴 아침 공기가 당신을 아프게 하나요. 자식에게 돈 얘기 꺼내며 나를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다니요.

당신은 왜 나를 돈 먹는 하마로 생각하시나요. 나는 이제서야 당신을 겨우 아버지로 보기 시작했는데.

내 어린 시절, 저는 당신이 살아계신지 조차 몰랐단 말입니다. 연락조차 닿질 않으시는 분은 제가 대학생이 되어도 신경조차 쓰질 않으셨죠.

그덕분에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경제적 궁핍은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답니다. 왜 저는 고등학교를 일하면서까지 다녀야 했을까요. 매일 새벽, 그 누구도 찾지 않을 시간에 50개가 넘는 교실문을 열어야만 했을까요. 왜 저는 수백명이 먹다 흘린 음식물을 치워야만 했을까요. 왜 저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희미한 불빛만이 쓸쓸히 남겨진 학교를 마지막으로 나가야만 했을까요.

17살이 버티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삶이었고, 내 손에 들렸던 행주와 바구니는 가난의 증표마냥 부끄러웠습니다. 식당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연민보다 능멸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힘드냐고, 괜찮으냐고 한번이라도 다독여 주지 못했던 당신은 대체 어디계셨었나요.

현실을 회피하고 계셨나요? 계모를 앞에두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통곡하시던 당신, 그때의 저는 당신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구요? 저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세상에 그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태어날 때부터 버리시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도, 안부를 묻지도, 사랑한다고도 한마디 안할 수 있나요.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던 첫학기. 기숙사 통금 시간을 까먹을만큼 공부에 몰두한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았지요. 그때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제 성적표와 재학증명서를 요구하셨죠. 어디 다른 곳에서도 제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으셨나본데,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어요?

제가 군대갈 때도 무덤덤 하시던 분이, 삼성 계열사에 서류와 인적성을 통과하고 면접을 본다고 하니 뭐 그리도 신이 나셨나요. 자식이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 이룰 것 같아서인가요? 아니면 제가 받게될 월급이 그리도 좋으셨나요?

결국 취업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6개월간 쉬는동안, 제게 수고했다 한 마디라도 하신적 있으셨나요?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하니 왜 그리 실망하신 목소리셨나요? 난 당신이 위로라도 해줄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쉬어도 된다는 그 한 마디라도..

대학원을 진학한 지금, 저는 당신에게 돈을 받고 있습니다. 그게 그리도 억울하신가요? 자식을 낳아놓고 24년동안 팬티 한장 안 사주셨으면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아니 생각만 하지 그러셨어요. 왜 저를 앞에 두시고 저를 그런 취급하시나요. 돈만 안들어가면 된다니요. 무슨 말인지 알겠냐니요..

나는 그나마 당신에게 돈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도 통화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록 나를 20년이 넘도록 버렸더라도, 평범한 이들처럼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좋았단 말입니다.

그런 당신이!!! 왜 아직도 저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는건가요. 왜 내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느꼈던 행복한 순간을 무너뜨리냐 말입니다.

돈 따위가 얼마나 당신을 삶을 괴롭히고 있는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대체 얼마나 힘드시면 자기 핏줄에게까지 돈으로 말하고 돈으로 들으시는지요.

당신의 의중을 아직은 모르겠다만, 적어도 당신이 나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하나만큼은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저도 언제까지 당신을 아버지로 간직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제게 한푼도 안 쓰는 날이 오면 호적이라도 파드리겠습니다.


p.s 명절이랍시고 모여 나눈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보시고 가족에 대한 작은 조언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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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thrace
17/10/05 11:27
수정 아이콘
전에는 너무 무책임하게 애를 막 낳고 그랬죠.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물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아이들은 없지만... 낳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부모들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윌로우
17/10/05 12:10
수정 아이콘
반쯤은 제 얘기처럼 읽었지만 추신은 너무 어려운 부탁이시네요. 용서하자 당신을. 나를 용서하자 많이도 다짐했지요. 진정 용서하면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믿어요.
김피탕맛이쪙
17/10/05 14:59
수정 아이콘
스스로의 평화를 이루시길 빕니다.
17/10/05 18:09
수정 아이콘
항상 느끼는거지만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문제해결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채로 있는 그대로의 대화를하면 대부분 타협안이 나오고 그 대화로도 해결못할 문제라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원치않아도 계속 이어가든지 아니면 관계를 끊던지 둘중하나인거 같습니다.
Thursday
17/10/06 16:08
수정 아이콘
남으로 대하면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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