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건1 ** 사건2 )
계절에 맞춰 옷을 입는다는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질만큼, 오늘은 참담하게 무기력한 날이었어요.
여기는 인천입니다. 오늘의 달을 보셨나요? 유난히 붉고 선명한.
매 시간 추락하는 느낌으로 며칠씩을 보내고 있노라면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이 있습니다.
책을 몇 자 읽다가는 지겨워 질때 즈음 과거 두서없는 예전 기억을 지금의 자신과 퍼즐맞추듯 늘어놓아 보는거죠.
* 서울의 S동으로 이사를 왔을때는 초등학교 6학년 학기 초 였어요. 전학을 간지 일주일이 채 안된 어느날 미술시간에 저는 한 친구에게 가위를 빌려 쓰고있었는데, 자꾸만 그 친구가 빨리 돌려달라고 보채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종이를 자르고 있는 와중이었어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재차 요구하는 그 친구의 머리 위 조금 높은 쪽으로 가위를 집어던졌죠. 교실 벽 페인트에 작은 홈이 패이고 저는 다시 할일을 시작했습니다. 반응이 이상했어요.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얼어붙은 채로 절 바라보는 겁니다. 흥미진진한 눈빛은 없었어요. 이상했습니다. 당장 맞서라는 부추김도 없다는게 이해가 안갔어요. 전에 살던 C동에서는 이런 반응이 아닐텐데. 나와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들. 깨끗한 복장. 정돈된 머리스타일. 그 때 왠지모르게 들었던 엉뚱한 생각이 기억에 아직도 남아요.
'이 새끼들.. 나빼고 전부 똑같은 샴푸 쓸것같다.'
** 뭐랄까- 불현듯 치미는. 말도 안되는 직감이 드는 그런 밤이었다고 할까요.
잠든 그녀의 등 뒤에서 잠이 오지않아 혼자 뒤척이다가 핸드폰을 열어보았는데 3년 넘게 없던 락이 걸려있었습니다.
제가 사서 개통해준 핸드폰이니 간단하게 구글계정으로 해제하고 카톡을 열어보았죠. 앞의 내용은 다 삭제된 채로, 마지막에 나눈 굿나잇 인사들. 다음 날 아침이면 한 때 나의 여자였던 이가 해주기로 약속된 은밀한 모닝콜에 대한 내용들. 세탁기 속에 던져진. 제가 선물해준 속옷에 남겨진 질내사정의 흔적들. 9월. 한강의 C대교 아래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은채 일주일을 보냈었습니다.
* 전학오기 전의 죽고 못살던 친구들은 단 한명조차 중학교 졸업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던 친구들이 멀고. 무섭게 느껴질때 즈음 싸이월드에 남겨진 방명록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친구가 동급생 여학우의 머리를 소주병인지 맥주병인지로 내려 찍어 뇌진탕 증세로 실려갔다구요. 등교길이었고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그랬답니다.
그 친구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어요. 돌아가신건 아니고, 그냥 '없다'는 인지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니까요.
가끔 고모가 돌보아 주시고 일주일에 한번인가 사회복지사가 방문했던걸로 기억합니다. 홍등가 밀집지역 건물 다락방 같은 곳에 살았었어요.
더럽고 가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큰 개집 느낌이 나던 곳이었어요. 주말에 가끔씩 야한만화책을 그 곳에서 돌려보곤 했었죠.
그 친구는 아래층에 '누나들'이 많이 산다고 그런 얘기를 했었던거 같아요. 이건 다른 친구에게 들었는데 기억보정일 수 있습니다.
그 '누나들'이 나중에 중학교 입학하는 날. 남자 다된거라고 총각 떼준다. 혹은 떼줬다. 고 뭐 그런말들이 돌아서 소문이 났었어요. 저는 이사를 간 뒤라 싸이월드 쪽지 같은 걸로 들었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친구에게 묘한 감정이 일고.. 뭐 그랬었던 기억이 납니다.
** 그런 이별을 뒤로하고 2년을 멘탈이 박살난 채로 보내던 중 작년 9월 현재의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리고. 예쁘고. 저에게 잘해줬죠.
관계를 시작하고. 쌓아올리는 것에 대해 엄청난 피로도를 느끼는 제가. 열렬히 빠져들었습니다.
* 소년원을 갔다더라- 빵에 갔다더라 말만 무성했지 결국 확인해본 친구는 없었습니다. 어렸으니까요. 아무도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그 사건 일 년 뒤에 C동의 친구들과 술을 먹었습니다. 늦은 밤. 학교 운동장. 종이컵에 말도안되는 비율로 섞어버린 소맥들. 모르는 친구들이 자꾸자꾸 합류하고 먹지도 못할만큼 과자 봉지는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조용한 골목 노래방으로 사라지는 남녀친구들. 뭐 그런거요.
거기서 들었어요. 사고를 쳤던 친구의 사정을 가장 잘 알던 친구에게 직접들었죠.
아래층 누나들은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일때는 아주 잘해줬다고 했어요. 과자며 아이스크림이며 있으면 쥐어주고 심부름시키면 오백원 천원씩 용돈도 주고 그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그 누나들을 보고 그것을 세우자 달라졌던 거겠죠. 술을 먹고 올라와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밀치거나, 발기시켜서 딱밤을 때리거나 옷을 벗겨 자위를 시키고 깔깔거리고 못하면 또 때리고. 그런일이 있었다고요.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여자애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같은 초등학교고 다 같은 친구들이어서 누군지 알고있었죠. 가장 예쁘고 인기많은 애 축에 속했었습니다. 일찍 브래지어를 한 애라고 소문도 있었고 그래서 남자애들은 그 애 옷뒤로 속옷끈을 잡아 당기기도 하고 짖궂은 장난을 쳐서 울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그 여자애 얘기가 나왔을때 누가 그랬거든요.
'하.. 걔 존나 섹시했는데. x발'
애들은 다 그랬어요. 무용담 얘기하듯이 아무 이유없이 찍어버리더라고.. '워 그 미친새끼가 그 때 진짜..'
** 현재의 여자친구와는 장거리였어요. 만나기 힘들었죠. 그런 와중에 누가 다가왔어요.
분명 성큼성큼 빠르게 오는데, 은근하게. 그런데 몸매는 은근하지 않았죠. 같이 다니면 쏟아지는 시선들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저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색기있는 여자. 나쁘지 않잖아요. 그래서 즐겼나. 아..즐겼나..?
그 애도 남자친구가 따로 있었어요. 심지어 그 남자는 제가 사는 집에서 아주 가까웠습니다. 궁금했어요.
그냥 제가 궁금했어요. 과거의 나. 상처입은 나. 나에게 상처준 사람들의 기분. 상처주는 그 기분. 얼마나 흥분될까. 으아아아 그런거요.
마음만 절반넘게 훔쳐보자 뭐 이런 마인드 였던거 같아요. 하지만 금방 관계까지 애원하는 그 애를 보면서 원래 목적도.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삽입 직전에 일을 고사하고 돌아서서 나와버리니 그 애는 남자친구와 정리를 하고 다시 연락했습니다. 너도 정리하라고.
'내가? 내가 왜? 싫은데?'
* 누가 미친새끼죠..? 사회죠? 책임도 못지면서 애낳고 도망간 부모죠? 엄한데서 맞고 화풀이하는 창녀죠? 맞죠?
** 그렇게 뭐가 뭔지 자꾸 모르는 상황에서 오키나와 여행을 갔어요. 다른 여자와 몰래요. D컵 가슴에 한껏 멋부리고 비키니를 입고있는 여자를 보고있는데. 얼마든지 원하면 품을 수 있는데. 재미가 없었습니다. 묵묵히 운전을 하고 가야할 포인트를 찍고. 밥먹고. 이게 뭐하는거지 싶었습니다. 이틀 앞두고 여자친구에게 혼자 오키나와 밤거리를 걸으며 카톡을 보냈어요.
'혼자 여행은 이제 싫다. 너랑 올걸. 오지말걸. 후회된다. 보고싶다.' 뭐 이런내용이었죠. 지금 돌아보니 구역질 납니다. 네.
안하던 짓을 하니 의심을 사고. 그렇게 마지막 날 앞두고 여자친구가 모든 걸 알게 되어버렸습니다.
줄담배를 태우며 밤을 새고. 멍한 정신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가서 빌었습니다. 일단 용서는 구하자.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빌자.
사실 무슨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멍했습니다. 여자친구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어요. 미친사람 처럼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받아줬어요. 저를. 9월. 일년의 연애.
* 그 친구가 보고싶어 졌어요. 묻고싶어요. 누구 탓인지. 누구를 탓하고 있을런지. 혹은 아닌지.
저에게 묻고있었어요. 누구 탓인지. 그룹섹스를 하며 속옷을 뒤집고 입어 들어오던 아버지때문인지, 내 모든걸 망가트리고 날 버린 그 여자 때문인지. 아니면 19살. 20살. 21살의 지나간 어떤 여자들 때문인지 뭔지.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던 필연적 이유와 사건과 환경 무언가 하나는 있을거라고. 납득한 만한 이유가 눈앞에서 흔들거려야만 했어요. 그런게 없다면 불안했습니다. 내가 왜 이따위로 사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누가. 미친새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