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흥(郭子興)
시간을 좀 더 뒤로 되돌려보자.
천하가 홍건 군의 붉은색으로 뒤덮이기 수십 년 전, 안휘(安徽) 땅에 곽(郭) 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애당초 제대로 된 이름 같은 것도 없었던 건지, 사람들은 그저 그를 곽공(郭公)이라고만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이 지역에 나타난 외지인인 그의 과거에 대해 자세한건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었고, 다만 본래 조상 대에는 조주(曹州)에서 살았다는 이야기 정도만 드문드문 전해진 편이었다.
그래서 딱히 농사도 짓지 않고 떠돌아다니기만 했던 곽공이 어떻게 먹고살았느냐고 하면, 그는 잡기(雜技)에 좀 재능이 있었다. 개중에서도 특히 점치는 일에 재질이 있어, 이런저런 사람들의 앞날을 들여다보고 이럴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하면 신기하게 그 일이 대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봐주고 명성을 얻다 보니, 자연히 집에 돈은 많고 앞날이 궁금한 사람들은 다투어 곽공을 초빙했다. 곽공은 그런 식으로 정원(定遠) 땅의 여러 사람들 집을 오가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곽공에게 하루는 마을의 유지 한 명이 찾아왔다. 정원 내에서는 나름대로 돈 많다고 소문난 사람이라, 어련히 늘 하는 점치는 일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가 털어놓는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선생, 혹시 결혼할 생각은 없으시오?”
“무슨 결혼이랍니까?”
당황한 곽공이었지만 그 부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얼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자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용모도 크게 추하지 않고 부친인 자신은 돈이 많으니 평소라면 서로 데려가려고 안달이었을 테다. 그런데 딸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던 것이다.
장님인 여자를 데려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딸은 이미 혼기를 꽉 채우고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식이 나이가 있는데도 결혼을 못하고 있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집안의 흠결이 되던 시대다. 돈도 많고 남부러울 것 없던 부자에게는 애가 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혼담을 알아보던 차에, 그 차례가 곽공에까지 오게 되었다.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신세였던 차다. 장기인 점복(占卜)도 언제까지 들어맞을지 모를 일이었으니,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곽공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제안을 승낙했다.
부자의 맹인 딸과 결혼한 이후부터 곽공은 만사가 술술 잘 풀려, 넉넉한 살림을 즐기면서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만 세 사람을 낳았다. 세 명의 아들 중에서도 특히 둘째에겐 묘한 느낌이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낀 곽공은 옛 장기를 살려 둘째 아들의 점을 쳐보았는데, 점괘는 대길(大吉)로 나왔다. 그 둘째 아들의 이름은, 바로 곽자흥(郭子興)이었다. (1)
길한 점괘를 타고난 곽자흥은 시간이 지나며 씩씩하고 용맹무쌍한 호걸로 자라났다. 부유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배포나 담력도 컸고, 크게 한 턱을 내며 정원 땅의 각종 호걸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아왔다. 나이가 차서 집안 살림살이를 물려받게 되자 그는 재물을 아끼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큰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뜻이 맞는 장사들과 결의를 맺기도 했다. 곧 무엇인가 한번 크게 저지를 생각인데, 함께 하자는 결의였다. 곽자흥의 눈에도 곧 천하에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판세 정도는 보이고 있었다.
집안이 부유한 곽자흥이긴 했지만, 그에게도 불만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돈이 많다고 해도 장가를 잘 가 한몫 잡은 벼락부자일 뿐 문벌(門閥)이 너무 낮아 사회적 존경을 받을 요소도 없었고, 돈만 많은 졸부 취급을 받다 보니 관청에서 기부금을 요구한다던지 군대를 동원하면 식량을 대라고 요구한다던지 고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만도 있고, 곽자흥 본인도 참고 있을 성깔이 아닌지라 자연스레 한번 뒤집어엎을 계획을 모의했던 바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복통, 서수휘가 일어서면서 전국이 홍건군으로 들끓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여긴 곽자흥은 그동안 쌓아 올렸던 인맥을 총동원해서 사람을 모았다. 곽자흥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농민을 선동하자, 불만이 넘쳤던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합류해서 숫자가 단숨에 일만을 넘었다. 일만 군대의 대장이 된 곽자흥의 목적은 근처의 호주(濠州) 성이었다.
1352년 2월 27일. 야밤을 틈타 곽자흥은 수천 명을 이끌고 호주성으로 향했다. 이미 내부에도 호응하는 자가 있어 쉽게 성에 잠입하고는, 신호에 맞춰 한꺼번에 관아로 몰려가 주관(州官)을 때려죽이고 단번에 성을 장악했다. 일단 근거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2)
이때 호주성 수십 리 밖에는 원나라 장수 철리불화(徹里不花)가 이끄는 관병이 있었다. 하지만 철리불화는 곽자흥의 세력에 대뜸 겁을 집어먹고 토벌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지나가는 양민을 붙잡아 머리에 억지로 붉은 두건을 씌우고는 “오늘은 홍건적 몇 명을 포로로 잡았다.” 라고 조정에 공갈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관병이 토벌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자연히 호주성 내의 기세는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그 호주에는 주원장이 있었다.
긴 여정을 마친 후 황각사에서 수년간 머물고 있던 주원장은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자신도 휩쓸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고향이 홍건군에게 장악 당하고, 그 고향 근처에서는 관병이 민간인을 습격해 잡아가고 있는 판이다. 일이 어떻게 되건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게 자명한 이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예 달아나야 하나? 아니면 홍건군에 합류해야만 하나?
막막한 앞 날에 고민하고 있던 주원장에게 하루는 누군가가 말없이 서신을 전하고 갔다. 주원장이 의아해하면서 서신을 열어보니, 다름 아닌 탕화(湯和)가 보낸 글이었다.
탕화는 주원장과는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던 사이였다. 또래들 중에서도 유독 키가 커서 나이가 찼을 무렵에는 7척(210cm)을 넘는 굉장한 거한이었다. 못 먹고살던 주위 형편에서는 당연히 바로 눈에 띄는 체격이라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동네 아이들을 제 부대 내의 병사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서를 정해서 통솔하기도 했었다. 체격이 원체 좋다 보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근처의 말을 얻어 타 말 타는 법 역시 빨리 익혔었다.
그 체격 좋던 탕화는 곽자흥이 자기 동네를 기점으로 봉기를 일으키자 주위 청년 10명과 함께 바로 그에게 귀부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벌써 천호(千戶)가 되었다고 했다. (3) 탕화는 편지에서 그런 사실을 거론하며 혹시 주원장 역시 생각이 있으면 서둘러 합류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탕화의 편지를 받고 처분한 뒤에도 주원장은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주위 사람이 귀띔해주기를 그 서신의 내용이 어떻게 된 건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져서, 곧 관병이 잡으러 올 수 있으니 달아나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주원장은 마을로 내려와서 주덕흥(周德興)을 만났다. 주덕흥 역시 주원장과는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주원장의 말을 들은 주덕흥은 한참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홍군에 합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군. 다만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신에게 길흉을 점쳐 보는 게 낫지 않겠나?”
그 말에 따라 주원장은 다시 절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미 절은 불에 타고 부서져서 초토화된 게 아닌가! 홍군이 늘 미륵불, 아미타불을 외치고 다니니 관병은 절 역시 홍군의 첩자 노릇을 하는 셈이라고 여겨 모조리 불태우고 약탈했던 것이었다.
결국 어떻게 되건 더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원장은 황량한 폐허 속에서도 요행히 망가지지 않고 있었던 가람전(伽藍殿)을 찾아 이 불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점을 쳐보았다.
“내가 피난을 해야 하는가?”
점괘는 흉(凶)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머물러야 하는가?”
점괘는 흉(凶)이었다.
“그렇다면 응당 대사를 일으켜야 하는가?”
마침내 점괘는 길(吉)이 나왔다. 주원장은 드디어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4)
그는 훗날 황릉비에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황각사에) 돌아와 머물기를 3년, 군웅이 날뛰었다. 처음은 여(汝)에서, 다음은 봉양(鳳陽)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얼마 뒤에 성을 함락시켰는데 성벽은 높고 해자는 깊어, 항거하고 지키며 호령이 빛났다. 친구가 편지를 보내와 투항하라고 했으나 걱정되고 두려워 어찌할지를 몰랐다. 옆에서 알아차린 자가 있어 곧 떠들어대려고 했다.”
“이때 절박한 나머지 지자(知者)와 상의해 보기로 하고 그에게 손을 묶고 처분만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팔을 걷어붙이고 싸워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자는 나를 위해 계책을 내기를, 음상(音像)으로써 묵도하도록 하였다.”
“그의 말대로 돌아가서, 떠나기와 남기 가운데 어느 것이 상서로운가를 점을 쳤다. 도망을 놓고 점을 쳐도, 남아 있는 것을 놓고 점을 쳐도 모두 불길(不吉)로 나왔으니, 혹여 이제 다른 선택을 해서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신이 계시를 내려 주원장의 앞날을 경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날의 일은 오직 주원장 본인의 기억일 뿐이다. 어쩌면 자신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프레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원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의 계시건 본인의 선택이었건 간에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천하로 향해 가는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때는 1352년 윤삼월. 주원장의 나이는 25살이었다. 천하의 동란을 비웃듯, 맑은 봄철의 날씨에서 꽃 피는 길을 지나 그는 호주의 성문에 도착했다. 호주의 성벽은 높고 성벽 주변의 해자도 깊어 대단히 견고해 보였다. 이미 마음을 먹은 주원장은 그 성문을 지나 호주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런 주원장을 조용히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호주 성문 앞을 지키며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하던 문지기는 이 기묘한 손님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입고 있는 것은 승복인데 행색을 보면 진짜 승려인 것 같지도 않고, 생김새도 기괴한데 비하여 기골은 장대하고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여러모로 보더라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5)
잠시 주원장을 두고 보던 문지기는 그를 엿보다가 아무래도 그냥 넘기기엔 수상하다고 여겨 바로 사로잡았다. 적의 첩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주원장을 꽁꽁 포박해서 묶은 문지기는 곽자흥에게 수상한 자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정말 적의 첩자라면 고문을 해서라도 정보를 캘 필요가 있다. 보고를 받은 곽자흥은 바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주원장을 만난 그는, 그 첫인상에서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먼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주원장의 기이한 모습이었다. 어찌나 인상 깊었는지, 명사 태조본기에서도 곽자흥이 주원장에 인상을 받은 이유로 기(奇)한 상모(狀貌 : 생김새)에 끌렸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 꾀죄죄한 동시에 장대하고 웅장한 기골. 묘하게 생긴 얼굴. 그리고 숱한 고생을 겪으며, 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추함, 악함을 모두 응축시켜 속에 조용하게 담은 듯한 그 눈빛. 그 눈빛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지 감히 함부로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6)
주원장의 그런 모습에서 이미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곽자흥이지만, 일단 그런 속내는 숨기고 주원장을 심문했다.
“넌 첩자인가?”
“아니, 난 첩자가 아니다.”
“그럼 무엇 하러 왔는가?”
“귀순하러 온 것이다.”
곽자흥과 주원장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눈 끝에 주원장은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켰다. 이미 탕화처럼 곽자흥의 군대에 투신한 지인도 있었으니, 신분 확인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끝낼 무렵이 되었을 때는, 이미 곽자흥은 주원장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게 된 상태였다. 그는 주원장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가 원한대로 병사가 되게 해주었다. (7)
승려의 옷을 벗고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쓰고, 손에는 창칼을 들고 낡은 갑옷을 주워 입은 말단 병사 주원장은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못 먹고살았던 것치고는 체격도 나쁘지 않았고, 그래도 황각사에서 오고 가며 주워들은 게 있는지라 무식한 다른 병졸들과는 다르게 머리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용기 있고 계략도 있고 결단력도 있어 작전에 나갈 때마다 공을 세우니 주원장은 금세 부대 내에서 주목받는 위치가 되었다. 3살 연상이자 어린 시절 골목대장이었던 탕화 등도 주원장을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했을 정도다. (8)
이채로운 만남도 있었다. 곽자흥의 부하로 있던 주원장은 자신처럼 홍군에 투신한 젊은이들 중 키가 크고 광대뼈가 넒은 한 병사를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농사를 짓다가 홍군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성격도 대범하고 무엇보다 무예도 뛰어나고 용감해서 어지간한 장정 두셋이 달라붙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청년은 자신의 이름이 서달(徐達)이라고 했다.
첫 만남일 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평생 죽마고우나 되는 것처럼 기막히게 말이 잘 통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하게 되었다. (9) 두 사람의 나이를 따져보면 서달이 주원장보다 어렸지만, 주원장은 서달을 늘 “서형(徐兄)” 이라고 호칭하며 대우해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하루는 곽자흥이 휘하 부대를 순시하던 중이었다. 부대원을 살펴보던 곽자흥의 눈에 문득 주원장이 눈에 띄게 된다. 몇 달 전의 만남이 문득 떠오른 곽자흥은 부대장을 불러 물어보았다.
“저 자는 잘하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부대장은 주원장의 이런저런 공적을 열거하며 그를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곽자흥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면 십부장(十夫長)으로 삼고, 앞으로 내 원수부에서 일하도록 하게.” (10)
곽자흥의 눈에 제대로 뛴 주원장은 그 이후로도 맹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전투에 나서면 계속해서 공을 세웠고, 싸움을 하면 늘 이겼다. 부대 내에서 주원장은 이미 유명인사였고 곽자흥 역시 그를 크게 아꼈다. 자신의 곁에 두고 이런저런 조언을 말하게 하고 필요한 일이 있어 지시하면 바로바로 이를 해결하니 만족스러운 부하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곽자흥의 둘째 마누라, 소장부인(小張夫人)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저 사람, 참말로 재주가 신통한 사람입니다그려.” (11)
시키면 하는 일이 똘똘하기 그지없고, 자신의 부인까지 옆에서 거들어 칭찬하자 곽자흥은 주원장을 참 쓸만한 사람이라고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그는 소장부인과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의논했다. 주원장을 마음에 들어 하던 부인 역시 곽자흥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곽자흥을 만난 주원장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자네, 아직 홀몸인데 결혼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결혼 말입니까?”
혼약. 평생 부랑아에 가족조차 잃고 홀로 떠돌던 주원장에게 있어선, 입에서 꺼내는 것만으로도 참 어색하고 머나먼 단어였다. 상대가 누구냐고 묻자, 마(馬) 씨라는 대답이 있었다.
태조효자고황후(太祖孝慈高皇后) 마씨, 곧 훗날의 마황후(馬皇后)와 주원장의 만남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1) 명사(明史) 권 122 곽자흥 열전
(2) 전겸익, 국초군웅사략
(3) 명사(明史) 권 126 탕화 열전
(4) 기록회편(紀錄匯編) 권 11 황조본기(皇朝本紀)
(5) 명사기사본말, “(주원장이) 성문에 이르자, 문지기가 이를 의심하고 염탐한 후에 사로잡아 곽자흥에게 바쳤다.” (抵門,門者疑為諜)
(6) 명사 태조본기 “(주원장이) 자라나니, 자태가 웅장하고 뛰어났으며 기골이 장대했다. 뜻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姿貌雄傑,奇骨貫頂。志意廓然,人莫能測) "곽자흥은 (주원장의)기이한 모습에 그를 친병으로 삼았다." (子興奇其狀貌,留為親兵)
(7) 명사기사본말, “(곽자흥이) 이야기를 나눈 끝에, 크게 기뻐하며, (주원장을) 친병으로 삼았다” (與語,大悅之,取為親兵)
(8) 명사 권 126 탕화 열전 “탕화는 태조보다 3살이 많았지만 약속을 받들어 심히 삼가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였다.” (和長太祖三歲,獨奉約束甚謹,太祖甚悅之)
(9) 명사 권 125 서달 열전 “서달의 나이가 22살일때, (주원장에게) 가서 그를 따르니, 한번 만나보자 바로 서로의 말이 같았다.” (達時年二十二,往從之,一見語合)
(10) 어제기몽, 명태조실록 권1 황조본기
(11) 명사 권 122 곽자흥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