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 난성(欒城)에는 일찍이 한(韓) 씨 라고 불리우는 일가가 몇 대에 걸쳐 내려오고 있었다. 혹자는 한씨들이 본래 이(李) 씨였다고 하고, 뒤에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조(趙) 씨였다고 했으나,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일족은 예전부터 비밀스럽고 무언가 꿍꿍이에 가득 차 있어, 도무지 정체를 알기 어려운 집단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선조 때부터 백련회(白蓮會)라는 집단을 구성하고 한 명의 교주적 존재가 대를 이어 이를 대물림 했다는 것이다.
이 백련회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뒷날에 자신들을 가리켜 명왕이니 소명왕이니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명교와 미륵교 등 여러 사상을 복합시킨 것 같은데, 그들 일족은 이런 교리를 바탕으로 세력을 모았다. 이미 전대에 조상 중에 한 명은 ‘향을 피우고 대중을 미혹시킨다’(燒香惑眾)는 명분으로 영년(永年) 땅에 유배를 간 적도 있었다. 국가에서 탄압받았으면서도 계속 이어졌으니 비밀결사라고 칭해도 좋다. 지하조직 비슷하게 되었으면서도 명맥은 계속 이어졌으니, 상당한 추종자가 있었을 수 있다.
요사한 사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 일족의 전승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에 한산동(山童)이라는 교주에 이르러, 마침내 직접 유언비어를 만들어 널리 유포하기에 이르렀다.
“천하당대란, 미륵불하생.”(天下當大亂,彌勒佛下生) (1)
천하에 대란이 오니, 미륵불이 하생(下生) 하리라. 하생은 불교 용어로 천상계의 부처, 보살이 하계로 내려온다는 말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닥치자 미륵불이 내려올 테니 그를 믿어 위기를 타파하자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미륵신앙은 어디에서건 흔한 일이지만 한산동은 그 자신이 스스로 이런 말을 지어내 널리 퍼뜨렸다는 것이 이채롭다. 믿는 입장에선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언가 매달릴 끈을 찾아 본 셈이지만 퍼뜨리는 쪽의 입장에선 되려 세상을 더 어지럽게 하기 위한 술책을 벌인 셈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내란선동죄에 해당한다. 명사(明史)에서는 그런 한산동의 유언비어에 대해서,
“요언(妖言)”
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 의도의 사악함을 강조했다.
황하 치수 공사에서 외눈박이 돌사람을 곳곳에 숨겨놓고, 이에 앞서 관련된 동요를 퍼뜨린 것도 그들 일파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다. 혼란한 시대상에 겹쳐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작용했고, 하남과 하남과 강회(江淮)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주워섬기게 되었다. 명사에서는 한산동의 요설에 현혹된 사람들을 가리켜,
“우민(愚民)들”
이라고 명시했다. 어리석은 말은 알아서 걸러들어야지, 무슨 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질질 끌려간다면 그런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들 집단의 교주가 한산동이라면 하면, 행동대장은 영주(潁州) 출신의 유복통(劉福通)이라는 인물이었다. 유복통의 내력에 대해서는 명사 등의 사서에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사실 이 사람이야말로 이들 집단의 머리인 동시에 손발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한산동은 유복통을 매우 신임하여 여러 계책을 물었다.
“농민들이 곧 궐기할 것인데, 그 외에도 글을 읽은 사람이나 벼슬한 사람이 함께 있어야 세력이 더욱 커질 것 같다. 그들이 동조하게 할 방법이 있는가?”
“방법이 있다. 과거에도 여러 봉기에서 조송(趙宋)의 깃발을 내세웠다. 우리 조상은 송나라 사람이니 송을 되찾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간절히 설득하면 글 읽은 사람이나 벼슬한 사람도 우리를 지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송이 망하고 남송의 충신들이 애산에서 순국한지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늙은이들은 송나라를 기억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옛 송나라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던 시대였다. 송나라를 부흥시키자는 명목은 충분히 통할만한 전략이었다. 한산동은 유복통의 계략을 흡족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한산동은 스스로 자신이 송나라 휘종의 8세손이며, 당연히 중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교 집단 무리의 우두머리에서 대송(大宋)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탈바꿈 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상야릇한 종교적 지도자보단 멸망한 나라의 황족이라는 편이 여러모로 먹힐 요소가 많았다. 또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요소를 온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한산동은 스스로를 명왕이라고 칭호를 붙였는데, 이렇게 되어 명교에서 말하는 구원자인 명왕과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한 우국의 황족이라는 두 요소를 모두 취한 셈이 되었다.
다만 기록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한산동이 송나라의 후손이 되려면 그는 조 씨여야만 한다. 하지만 먼저 언급했다시피 기록에는 그들 일족의 본래 성씨가 이 씨라는 주장도 적혀 있다. 명사를 작성한 사관들은 한산동이 스스로 송나라 조 씨의 후예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혹자는 이 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는 한 마디로 이를 부정했다. 소위 춘추의 필법인 셈이다.
여하간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싶자 한산동은 자신들 무리를 이끌고 백록장(白鹿莊)이라는 곳에 모였다. 옛날 유비와 관우, 장비 같은 영웅호걸들이 큰일을 시작하며 그랬다는 것처럼, 백마와 흑우(黑牛)를 죽여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다. 그 무리가 무려 3,000명이나 되었으니 상당한 장관이었다. 제단 앞에 기립한 삼천 추종자들의 앞에 선 한산동은 이미 대업을 이루기라도 한 것 마냥 엄숙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송나라 황제의 후손인 제가 꼭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은 유복통의 차례였다. 한산동이 송휘종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꾸민 것처럼, 유복통은 옛 송나라 명장 유광세(劉光世)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나마 제 주군처럼 성씨를 아예 갈지는 않고 비슷한 사람을 골라잡았으니 이를 보고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고 해도 될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여간 하늘에 대한 제를 지낸 그들은 사람을 사방에 보내 일제히 궐기하고, 홍건(紅巾)을 자신들의 호칭으로 삼아 거병하기로 했다. (3)
하지만 축배를 너무 일찍 터뜨린 게 화근이었을까? 제사를 지내고 출정에 앞서 서로가 고기와 술을 나눠 먹으며 축하 분위기에 여념이 없었을 그 무렵, 이미 백록장의 외곽에서는 적지 않은 숫자의 원나라 병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렇게나 거창하게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니 자연히 꼬리가 밟힐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소리 죽여 기회를 엿보던 관병은 이윽고 사방을 포위한 채 불화살을 날리며 공격을 감행했다.
“역적을 모두 죽여라!” 와 “관병이 쳐들어왔다!” 같은 고함 소리가 떠들썩하고, 타오르는 불길과 눈을 어지럽히는 연기 속에 차려놓은 술상이 모두 엎어진다. 그리고 그 위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간다. 원나라 병사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백록장의 사람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무참하게 도륙 당했다. 심지어 맹주인 명왕 한산동 역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살해되고 말았으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만 셈이었다.
그러나 대혼란 속에서 살겁(殺劫)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조직의 2인자이던 유복통, 그는 용케도 그 살육의 한바탕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부리나케 자신의 고향인 영주(潁州)로 도주했다. 재간둥이였던 그는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꺼져가던 반란의 불길을 다시 되살리게 된다.
본래 그런 전략이었는지 단순히 운 좋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반란군의 첫 공격 목표는 바로 주고(硃皋) 였다. 그리고 그 주고는 다름 아닌 원나라의 식량 저장고로, 반군은 주고에서 얻은 쌀로 근처의 백성을 현혹했다. ‘싸워서 죽으나 굶어서 죽으나 매한가지 아닌가. 우리 편에서 싸운다면 적어도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굶주려 나자빠진 빈민들은 그 쌀 한 톨을 위해 앙상한 손으로 죽창을 잡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동원해 근처를 공격해 함락시키자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더욱더 불어난 병력으로 주변을 공략하자 이전의 갑절은 되는 사람들이 또다시 몰려든다. 싸워서 이기면 이길수록 병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금세 반군의 숫자는 10만 칭할 정도가 되었으니, 본인들조차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유복통의 반군은 기세를 살려 나산(羅山), 상채(上蔡), 진양(真陽), 확산(確山), 범엽(犯葉), 무양(舞陽), 여녕(汝寧) 등을 순식간에 초토화했다. 그야말로 승리가 승리를 부르는 질풍노도의 기세였다.
계속된 승리를 거두어 여유가 생긴 유복통은 사람을 풀어 한산동의 처자식을 수색했다. 일단 지금은 자신이 대규모 반군을 이끌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명성이든 송나라 황족이라는 핏줄로서의 명분이든 한산동의 유산이 분명 필요해질 것이다. 듣자 하니 한산동의 어린 아들인 한림아(韓林兒)와 그 어머니 양(楊) 씨가 관병을 피해 무안산(武安山)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했다.
반군의 기세가 절정이던 당시, 민간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하늘이 마군(魔軍)을 내려보내 불평(不平 : 불공평한 사람)을 죽이고, 불평인(不平人 :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사람)도 불평인(불공평한 사람)을 죽이네. 불평인(不平人 :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사람)이 불평자(불공평한 사람)를 죽이네. 불평(不平)을 모조리 죽여야만 태평이 찾아오리.” (4)
유복통의 난을 비롯한 민간 봉기에는 명교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명교는 달리 마교(魔敎)라 불렸는데, 마교의 군대니 자연히 마군이라고 칭해진 셈이다. 아마 명교가 마교라 불린 것에는 당초엔 비하의 의미가 있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비난하는 사람도 거기에 소속된 사람도 스스로 마군이라고 일컫는 상황이 되었다. 유사 이래 전례가 없는 자칭타칭 ‘마(魔)의 부대’ 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정말 사방팔방에서 일어난 붉은 마귀의 군대로 보였을 것이다.
그동안 원나라에 반란이 없지는 않았다. 한산동과 유복통 이전에도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지만, 원이라는 거대 제국이 손을 한번 휘두르기만 해도 두꺼운 책에 짜부라진 벌레처럼 터져 죽어나갔다. 그러나 가시 바늘 같은 확률을 뚫고 유복통의 반란이 성공했고, 일단 한번 반군을 토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너나 할 것 없이 각지에서 호응하는 자가 잇따랐다. 포삼왕(布王三)는 상주에서, 맹해마(孟海馬)는 한주에서, 지삼리(芝蔴李)는 풍(豐), 패(沛)에서 일어나는 식이었다.
벌레 한두 마리는 손으로 일일이 눌러 죽일 수 있지만, 벌레가 집안의 기둥뿌리까지 전부 갉아먹으며 침투한다면 그곳에서는 더 살 수 없다. 반군을 진압하려고 해도 어디부터 진압군을 보내야 할지 막막한 수준이었다.
한편, 장강 중류에서는 또 다른 세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백련교 비밀결사의 교주로 한산동이 있었다면, 미륵교 지도자로 팽형옥이라는 기인이 있었다. 팽형옥은 이미 몇 년 전에도 반란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도주한 적 있었던, 말하자면 이미 진작에 관청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위험인물이자 상습 반란범으로 분류된 괴인이었다.
당연히 지방 관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고 했을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현지 주민들의 비호 때문이었다. 주민들이 그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 씨 일족이 대대로 내려온 비밀 집단이라면, 팽형옥은 일인 수도승이었다. 명사에서는 팽형옥이 요술(妖術)을 부려 사람을 모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는 사람이 요술을 부릴 수는 없으니, 그만큼 팽형옥의 친화력이 좋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앙심도 두터운 데다 박력도 있고 말솜씨도 좋아서, 돌아다니면서 한번 포교에 나서면 여기에 빨려 드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일개 농민들 입장에서 같이 대화하고 괴로움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 지금도 여러 민간전승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관청에서는 팽형옥의 신출귀몰함이 요술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팽형옥은 무려 14년간 지하조직을 만들고 이끌며 때를 준비했다. 주원장과 명교, 미륵교의 종교적 연관성을 찾는 경우도 있는데, 주원장이 3년간 떠돌던 무렵 활보하던 곳은 팽형옥의 조직이 뿌리를 내린 곳과 일치하다. 그가 이 시절 무언가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면 팽형옥의 사람들과 접촉해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4년을 조용히 숨죽이며 추종자를 모으던 팽형옥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여겨지자 마성(麻城) 사람 추보승(鄒普勝), 면양(沔陽) 출신 예문준(倪文俊)과 함께 봉기 군을 일으켰다.
기인 팽형옥 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의 배경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추보승은 의리를 중요시하고 강호에 친구가 많은 호걸로서 당시에 상당한 명망이 있었다. 예문준의 경우는 본래가 어부 출신이었다. 지방 관청에서 어업세 외에 기타 잡세를 너무나도 많이 걷어가 살림이 곤궁해져 동료 어부들과 조세를 내지 않는 저항을 했고, 관병이 이를 진압하러 오자 역으로 관병을 두들겨 팬 끝에 결국 봉기에 가담한 것이다. (5)
그러나 이들 집단의 우두머리는 팽형옥도, 추보승도, 예문준도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서수휘(徐壽輝)라는 인물이었다.
서수휘는 달리 진일(真一)이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당초에 나전(羅田)의 옷 장사꾼이었다. 장사하는 사람이니 입담이 좋고 친화력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외모를 가졌다. 평범한 시절에는 그저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팔며 주목이나 끌 때 도움이 될 용모였겠지만, 난세를 만나 그 잘생긴 외모는 또 다른 방면으로 서수휘 본인에게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초 봉기군을 이끌던 팽형옥은 서수휘의 얼굴을 보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로 그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오랜 시절 농민들과 어울리며 전도에 여념이 없던 그는 분명 대외선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팽형옥이 판단하기에 서수휘의 외모는 조직의 대장으로서 필요한 ‘옷걸이’ 에 제격이었던 셈이다.
내친김에 팽형옥 등은 기수(蘄水)를 도읍으로 삼아 서수휘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천완(天完)이라 하고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하여 숫제 나라를 건설해버렸다. 그야말로 원나라 조정에 대한 선전포고로, 국가를 세운 무렵으로 따지면 유복통이 이끌던 홍건군보다도 훨씬 빠른 시기였다.
이들 ‘천완국’ 의 세력 역시 한산동처럼 홍건(紅巾)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아마도 먼저 기의한 한산동, 유복통의 홍건 군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인지도 측면에서 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같은 홍군으로 묶이긴 하지만, 실상 두 세력은 성격이 많이 다른 조직이었다.
서수휘의 홍건군을 서계홍건군(西系紅巾軍)으로 부르고, 한산동 계 세력은 반대로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으로 불린다. 동계의 명분은 옛 송나라 조 씨 황가의 복원이고 반대로 서계는 천완국을 세우고 서수휘가 황제에 올랐으니, 두 세력은 누군가 서로에게 종속되거나 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다른 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홍건’ 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백성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컸다. 세상이 불만스러우면, 그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메고 홍건적을 자처하면 된다. 그러면 바로 자신들의 동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서계홍건군의 천완 정권은 파죽지세로 각지를 점령해 나갔다. 관군은 멀리서 홍군을 보기만 해도 도망가고 빈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합세하니 전투라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서계 홍군은 군기가 대단히 엄정했고, 각지에서 지원자를 받으면서도 굳이 홍군에 합류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끌고 가진 않았다. 다만 투항자의 명부만을 작성해두고, 관리가 도망가서 비어있는 관청의 부고를 털어갈 뿐이었다. 아마도 이건 팽형옥의 영향인 듯 하다. 홍군 병사들은 살인과 겁탈을 하지 않고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미륵불을 외웠다.
그에 비해 조정의 군사는 홍군이 몰려오면 황급히 도망가기 바빴다. 도망만 치면 다행이었으나, 홍군이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다시 몰려와 주민들에게 터무니없는 책임을 묻고 약탈하며 불을 지르니 만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항주에서는 이런 피해가 대단히 극심했다. (6)
물론 원나라 조정에서도 온전히 손만 놓고 있진 않았다. 그들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6천 명의 아속군(阿速軍)을 소집했다.
아속군은 중앙아시아 회족(回族) 계열의 병력으로써, 말타기와 활 쏘기에 능하고 사납고 용맹하기로 이전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분명 대단히 용맹하긴 했으나, 가는 곳마다 살육과 겁탈을 즐기기로 이름이 났던 맹수들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오합지졸 민병에 불과할 반란군과 전투를 벌인다면 분명 엄청난 살육전이 펼쳐지겠지만, 다급한 조정에서는 물불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속군의 대장인 혁시독적(赫厮秃赤)은 반란군을 짓밞아버리라는 명령을 받자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고 여기며 임무에 나섰다. 농꾼들이 무기를 들고 설친다 한들 용맹무쌍한 아속군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마음 가짐이 그러하니 혁시독적은 전투를 하러 나서면서도 매일매일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불러 희롱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총대장부터 그 모양이니 휘하 장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술판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밤낮없이 주색에 취한 채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혼미한 정신으로 멀리를 바라보자 저 언덕 너머에서 홍군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제깟 놈들 몰려와도 무슨 재간이겠느냐 하며 비웃으며 바라보던 혁시독적이다. 그런데 홍군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들판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무언가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문지르고 다시 바라보아도 붉은 물결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었다.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던 술기운도 이때쯤에는 다 날아가 버리고, 그는 너무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푸(阿卜)! 아푸!”
대장이던 혁시독적은 말머리를 돌리고는 채찍으로 미친 듯이 말을 두들기며 계속해서 “아푸! 아푸!” 하고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아푸(阿卜)는 바로 ‘달려라’ 라는 뜻이었다. 휘하 병사들은 갑자기 전장을 탈주하는 대장을 황망하게 바라봤지만, 그런 시선도 아랑 곧 하지 않고 혁시독적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달려라, 달려!”
결국 병사들도 모두 전투를 포기하고 대장을 따라 “아푸!” 하고 소리치며 달아나기에 이른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강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아속군의 추태는 회수 유역 전역으로 퍼져나가 당시에 이 전투를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7)
아속군의 어처구니없는 패주 이후, 원나라 조정은 어사대부 에센 테무르(也先鐵木兒)에게 10만 대군을 맡겨 홍군 토벌을 시도했다. 목표는 유복통에게 빼앗긴 여녕(汝寧)을 되찾는 것이 임무였다. 야선 테무르는 자신의 주력군이 도착하기에 앞서, 선봉부대를 파견해 미리 진을 치게 했다.
그런데 선봉부대의 임무를 맡은 장수들은 여녕의 사하(沙河) 변에 주둔하고는, 적이 눈앞에 있는데도 밤낮이고 여자를 불러 술을 마시며 노는데 여념이 없었다. 셀 수도 없는 홍군을 눈 앞에 두고 최전방의 선봉 부대 대장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으니, 이 정도면 소인배인지 배포가 대단한 걸물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결국 장수들이 전부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저녁에 홍군의 기습 공격이 있자 선봉 부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주색을 즐기던 장수들은 행방이 묘연했는데, 날이 밝아 전사자를 수습하던 중 시체의 무더기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되었다.
선봉부대의 대패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윽고 에센 테무르의 본대가 여녕성 앞에 도착해 주둔했다. 하지만 이 부대 역시 한심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홍군이 저녁을 노려 또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깜짝 놀란 부대원들은 맞서 싸우기는커녕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 사람이 달아나자 옆 사람이 달아났고, 옆 사람이 달아나자 뒷사람도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도망쳤다. 결국 나중에 이르러 전군이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달아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수습해야 할 최고 지휘관마저도 도망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에센 테무르는 전군이 무너지자 자신 역시 말에 타서 도주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지방관은 에센 테무르의 말꼬리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안됩니다! 이렇게 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라며 숫제 울부짖었다.
그러자 에센 테무르는 격노해서 지방관에게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놈아! 네 목숨만 목숨이지 내 목숨은 목숨이 아니라더냐!” (8)
결국 에센 테무르는 말리던 지방관을 뿌리치고 변량(汴梁)으로 달아났고, 그곳에 진을 치고 패주 한 병력을 수습했다.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도 못해보고 전부 달아났기 때문에 병력은 크게 상하지 않고 꽤 수습할 수 있었지만 군수물자와 장비는 모조리 잃어버린 빈털터리 신세였다.
계속해서 이어진 어처구니없는 전투 결과에 가장 분개한 사람은 바로 탈탈이었다. 조정의 실권자로서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다는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녕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에센 테무르는 탈탈의 친동생이었던 것이다. 탈탈 본인에게 있어선 엄청난 망신이자, 정치적으로도 정적들에게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준 셈이 되어버렸다.
실제로도 에센 테무르의 대패 이후 어사대부 타이친발(朵爾直班) 등은 곧바로 탄핵안을 올렸다. 분노한 탈탈은 월권을 써가며 어사대 인원들을 모조리 좌천시키는 것으로 응수했다. (9) 개인적 망신, 정치적 타격, 도의적 명분의 훼손 등 그에게 있어선 정말 뼈아픈 패배였던 셈이다.
전투로 인해 손상된 본인의 체면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바로 전투 밖에 없었다. 때마침 서주 지역에서 지마이(芝麻李)라는 도적이 또다시 ‘홍건군’ 을 자처하며 봉기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마이의 본명은 이이(李二)로, 그가 지마이로 불린 까닭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릴 때 자기 집의 검은깨와 참깨(芝麻)를 나눠 사람들을 도와줬기 때문에 ‘참깨 이씨 양반’ 정도로 불리게 된 것이 바로 지마이(芝麻李)라는 별명의 유례였다. 원나라의 통치에 불만이 많던 그는 천하가 혼란해져서 기회가 생긴듯 하자 이웃인 조균용(趙均用)을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조정에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백성이 빈곤한데, 마침 영주에서 난리가 일어났으니 기회가 아니겠는가? 반군이 일어나도 관군이 진압하질 못하고 있다고 하니, 사내대장부가 한번 일어선다면 지금이야말로 그때인듯싶네.”
“만일 거사를 치르고자 한다면, 팽대(彭大)라는 사람이 용맹합니다. 그를 불러 함께 일을 도모해 봅시다.”
조균용의 소개를 통해 지마이는 팽대를 만났고, 이런저런 연줄로 몇 명의 동지를 얻어 그들 무리는 총 8명이 되었다. 서로 피를 따서 나눠 마신 그들은 근처의 서주성을 찾아갔다. 8명 중 4명은 성에 몰래 들어가서 불을 질렀고, 남은 4명은 성 밖에서 불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불길에 서주성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틈에 8명은 무기를 탈취하고 성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니, 다른 백성들도 여기에 합류해서 결국 단 8명에 의해 서주라는 큰 성이 어이없이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10) 봉기 군들에게는 놀라운 무용담이지만 원나라 조정의 입장에서는 차마 언급하기도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서주를 장악한 지마이의 군세는 이 무렵 10만을 일컫을 정도가 되었다. 함부로 손을 대기도 어려운 지경이라 두고만 보고 있었을 뿐인데, 탈탈은 스스로 이 전투에 나서겠다고 자원했다.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지난 실책을 씻으려는 의도였던 셈이었다.
전투에 나서기 전, 탈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정예병이라고 이름났던 아속군의 어이없는 패배도 그렇고, 지금 원나라 관병은 너무 무능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홍건 군과 싸우는 병사들 중 그나마 전과를 거두고 있는 군사들도 관군보다는 지방의 향신(鄕紳)들이 개별적으로 조직한 의병이나 민병이 더 잘 싸우는 판이었다.
결국 탈탈도 관군보다는 이런 민병을 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출정에 앞서 도성에 살고 있는 민첩한 장정들과 근처의 소금 캐는 일꾼을 소집하여 2만 명의 병력을 만들었다. 부패한 제국군보다는 몸 건강한 민간인과 소금 장수가 더 믿음직했던 것이다. 준비가 갖춰지자 그는 서주를 향해 진군했다.
1352년 9월, 서주에 도착한 탈탈은 지체하지 않고 서주의 서쪽 성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탈탈 본인이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며 공세를 쉬지 않고 퍼부어댔다.
성문이 뚫리면 전황은 절망적이기에 지마이의 군사들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홍건적 궁수들이 성 밖에까지 나와 화살을 쏘아댔고, 그 화살들이 한두 개도 아니라 빗발처럼 탈탈의 옆에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탈탈은 바로 눈앞에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지는데도 눈 하나 깜짝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11)
최고 지휘관이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도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말단 병사들이 먼저 도망갈 순 없었다. 결국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퍼부은 끝에 탈탈 군은 외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성내로 진입한 탈탈은 군사를 사면으로 나누어 적이 도망칠 퇴로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여 학살에 가까운 섬멸전을 벌였다. 지마이는 필사적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붙잡혀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탈탈이 전투 후 적의 기치와 물품을 모두 빼앗아 불사르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아군의 승전고를 보고하기도 전에 뜻밖에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먼저 도착했다. 조정의 사자가 전한 말은 실로 예상외의 말이었다.
“탈탈을 태사, 우승상에 임명한다. 조정으로 복귀하라. 군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제대로 된 토벌은 이제 막 시작된 셈이나 다름없는데, 작은 승리를 한번 거둔 후에 바로 복귀하라는 명령이라니……. 그 의도가 너무나도 뻔하게 보였기에 태사, 우승상에 임명한다고 해도 탈탈으로서는 오히려 찜찜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가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것을 견제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목소리를 높이는 반대파의 중신인지, 혹은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 차라리 반대파의 중신 따위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지만 황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탈탈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 끝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다시 만난 순제는 탈탈을 호들갑스럽게 반기며 조상들의 존칭호, 구슬 옷, 백금을 내려주고 ‘서주 평정 공적비’ 를 세우는 등 요란한 환영 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축하 환영회의 풍악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저 멀리서 검푸른 구름은 멈추지 않고 몰려오고 있었다. 탈탈 본인에게도, 원 제국의 하늘에서도.
(1) 명사 122 한림아 전
(2) 하교원(何喬遠), 명산장(名山藏)
(3) 위와 같다.
(4) 철경록(輟耕錄), 취태평소
(5) 오함, 주원장전
(6) 도종의, 남촌철경록
(7) 경신외사 상권
(8) 엽자기, 초목자
(9) 원사 137 타이친발 열전
(10) 경신외사 상권
(11) 원사 138 탈탈 열전 “賊出戰,以鐵翎箭射馬首,脫脫不為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