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모 제약회사에 입사했던 게 97년 말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에는 큰 일이 터졌었는데 바로 IMF사태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그것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연수를 끝내고 나오니 나라 곳간이 거덜 났다고들 했습니다.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에서 대한민국이 거꾸러졌다는 분위기였습니다.
IMF사태의 영향은 저 같은 신입사원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입사 다음해에는 전 직원이 상여금을 받지 않겠다는 "자발적"인 서명운동이 있었고 제일 말단이었던 저는 당연히 동참하는 것으로 알고 군말없이 시키는 대로 서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어렵다...똘똘 뭉쳐서 이 난관을 벗어나야 된다 뭐 이런 사회, 회사 분위기였습니다.
또 IMF사태는 회사의 광고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약회사의 특성상 TV에 약 광고를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제 많은 모델료 들여가면서 연예인을 데려다가 광고를 찍을 수도 없으니 사원들을 대상으로 모델을 선발해서 광고를 찍자는 안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장이 오케이 했고 각 부서로 공문이 날아왔습니다. 광고회사에서 사람들이 직접 각 부서를 방문해서 직원들 전체를 대상으로 카메라 테스트를 실시할 예정이니 직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카메라 테스트에 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어느 날 광고회사 사람들이 저희 부서에도 찾아왔습니다. 광고회사 직원들은 부서 한편에 공간을 마련하더니 뒤에 배경막도 설치하고 조명도 설치하고 카메라도 설치하고 그랬습니다. 이윽고 세팅이 다 됐는지 그쪽 사람이 "자 이제 한 분씩 나오시죠!" 이러더군요. 부장님부터 직급대로 한 사람씩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일단 카메라 앞에 서면 카메라 뒤에서 광고회사 직원이 이런 저런 주문을 했습니다. 옆으로 돌아서봐라. 카메라 앞으로 조금 걸어와 봐라 뭐 등등 이런 지시들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한 사람 당 약 30초에서 좀 길면 1분 정도씩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속으로 "에이~! 솔직히 내가 어떻게 뽑히겠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전문모델도 아니고 사내모델인데 그래도 혹시?"하는 마음도 있었고 "이거 이러다가 뽑혀서 나중에 광고 찍게 되면 부모님에게도 말해야겠지?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까?" 뭐 이런 생각도 꼬리를 물었더랬습니다.
제가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한 1초나 2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 겁니다. 카메라 뒤에서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던 그 광고회사 직원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습니다.
"됐습니다!"
"옆으로 잠깐 서보실래요?" 도 아니고 "카메라 앞으로 몇 걸음만 걸어보세요!"도 아니었습니다. "됐.습.니.다.!" 마치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 대 이탈리아 전에서 토티에게 레드카드를 뽑아든 모레노 주심과 같은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였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서 "절대 어필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하~! 내가 이러면서까지 광고회사 다녀야 하나?" 라는 느낌까지 들었다는 건 아마도 저의 자격지심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을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뻘쭘해져서 제 자리로 돌아오는데 과장님, 대리님, 계장님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계시더군요. 여직원은 그날따라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묻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어깨가 좀 들썩이는 것 같기도 하고...이렇게 해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CF모델 도전은 처참한 결과와 함께 마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같이 입사해서 같은 부서에 배치 받은 여자 동기가 있었는데 당당하게 뽑혀서 실제 CF에 등장했습니다...)
유튜브에 없을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있네요. 동영상 시작 후 9분 40초부터 나오는 광고가 바로 문제의 그 광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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