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였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천(백마강/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수도의 시민들이 이유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이건 무슨 세기말도 아니고 (...)
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이상한 일이 기록되기 마련입니다. 별 거 아닌 일을 과장했을 수도 있고 아예 창작했을 수도 있죠. 어느 쪽이든 당시에 퍼뜨린 유언비어거나 멸망 후에 만든 것일 겁니다. 이걸 믿는 사람은 이제 없겠죠? -_-;
650년대에 백제에 일어난 일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아닙니다.
"백제국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사를 받들어 보냈는데, (중략)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일본서기는 이 때를 642년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그 일본서기에도 (641년에 죽었을) 642년에 사택지적이 다시 등장하죠. 거기다 현존 유일한 백제의 금석문이고 백제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증거로 쓰이는 사택지적비에는 그가 죽은 걸 갑인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 때를 654년으로 추정하죠. 왜곡할 문제는 아니고 혼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642년에 황위에 오른 고교쿠 덴노와 655년에 황위에 오른 사이메이 덴노는 동일인물이거든요. 그 사이에 다이카 개신을 한 고토쿠 덴노가 있구요. 이래서 위의 사건을 642년이 아닌 655년으로 보는 주장이 나오는 거죠. 저도 이 쪽으로 마음이 가구요.
+) 그녀의 편이었고 일본의 실권을 가졌던 소가씨는 백제계로도 추측됩니다. 소가씨가 몰락하는 을사의 변이 일어나자 퇴위했고, 고토쿠 덴노가 죽고 다시 덴노가 된 겁니다. 친백제 세력이 몰락했다가 다시 정권을 잡은 걸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녀 자신도 후쿠오카까지 가서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였죠. 백강 전투에서 다시 얘기해보죠.
사택지적은 무왕의 장인, 왕의 어머니는 곧 사택왕후입니다. 선화공주는 안습 저기서 나오는 아우의 아들, 누이동생 4명 역시 사택씨 쪽일 겁니다. 외척인 만큼 권세가 컸을 것이고, 그들을 다 쓸어버린 거죠. 지적이 죽으면서 인생 허무하다 생각할 법 합니다. 그리고 의자왕이 그녀의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도 보이는 거구요. 여기에 좌평은 현재의 장관급, 그 좌평을 비롯한 고위관리 40여명을 숙청합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거죠.
백제에는 큰 성씨 8개, 대성팔족이 있다 했습니다. 건국 초부터 이어진 세력도 있고 웅진, 사비로 오면서 강해진 세력도 있었죠. 중국측 기록에 나타나는데 약간씩 다른 게 있고, 다 한 자로 기록하지만 사택씨처럼 두 글자를 잘못 기록한 것도 보입니다. 백제 왕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권력을 두고 왕들과 싸우던 이들이었죠. 이 시기 그 세력이 어떻게 갈라져 있었는지야 사택씨를 숙청한 거 말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 쪽과 손 잡고 다른 쪽을 쓸어버린 것인지, 연산군처럼 이제 권력도 탄탄해졌다 싶어서 마구 쓸어버린 것인지 말이죠.
물론 추측할 만한 건 있죠.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 소정방, 정림사지오층석탑 대당평백제비명
"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대부인(군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일본서기, 고구려 승려 도현의 일본세기에서 인용
이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간 왕비로 은고가 언급됩니다. 그녀가 저기 나오는, 요사스러운 부인으로 추측하죠. 그냥 암탉이 울어서~ 이런 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656년, 성충이 투옥돼서 굶어죽습니다. 삼국사기에야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만 퍼 마셨고, 이걸 말려서 그랬다 합니다. 글쎄요? 한편 흥수도 660년에 귀양살이하고 있던 걸 보면 역시 650년대 말에 비슷한 테크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삼 년 전 왕이 왕자들 41명을 죄다 좌평으로 임명해분 뒤로는, 우덜 나라는 없어졌제"
657년,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좌평으로 임명합니다. 원래 6명이 정원입니다. 의자왕이 얼마나 정력이 좋았는지 계속해서 큰 일을 벌이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좌평이 다 좌평이 아니라 이전에 쫓아낸 40여명을 대신할 걸 수도 있고, 서자도 다 서자가 아니라 의자왕의 측근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습니다. 어쨌든 계속 조정을 갈아엎고 있는 걸 볼 수 있죠.
마지막으로, 의자왕의 태자는 644년에 임명된 부여융이지만 의자왕이 함께 달아난 태자는 부여효였습니다. 융은 웅진성에서 당나라에 항복하고 웅진도독이 되어 부흥세력과 신라와 싸웁니다.
이걸 보며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거죠. 사택씨 등 숙청한 세력을 대신한 세력은 은고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고, 태자도 그녀의 자식이 아닌 융 대신에 친아들인 효로 바꿨다는 거죠. 그럼 그녀는 적어도 첫째 왕비는 아니었겠죠. 성충, 흥수 등은 사택씨 세력이었든, 태자 변경 등을 반대했든간에 숙청에 말려든 거고 말이죠.
아버지가 아니라 장인이지만 뭔가 고종과 민비가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물론 이건 다 추측의 영역이죠. 하지만 그럴듯 하긴 합니다. 다음은 그녀가 정말 정치에 끼어들 정도로 힘이 있었느냐, 그랬다면 정말 요사스러워서 나라를 망쳤냐의 문제입니다. 숙청당한 세력이 정말 잘못된 걸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도 급진적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십년 넘게 흘렀으니 자신의 힘을 믿은 모양입니다만... 설령 다 옳은 거였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보면 잘 한 건 아니죠.
여기서 볼 만한 부분은 성충의 존재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 시기 나온 것 외에는 없는 수준입니다. 적이 쳐들어오자 그의 말을 되새기고 옥에 갇힌 흥수에게도 물어본 걸 보면 위 사건 전에는 의자왕의 능력 있는 신하들이었던 건 맞는 모양입니다. 죽어가는 순간이나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충언을 하는 걸 보면 더 그렇구요. 그나마 일본의 귀족가문인 후지와라씨의 기록에 나옵니다. 당에는 위징,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신라에는 김춘추가 있는데 백제에 나오는 게 바로 성충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긴 하죠. 이런 훌륭한 신하를 내쳤다는 것... 이런다면 충신을 버렸다는 평을 들을 만 합니다.
+) 조선상고사에서는 그가 여제동맹을 맺은 주역이고, 의자왕의 제갈량 수준으로 나옵니다.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하죠. 이외에도 여러 다른 인물들이 나와서 재미있는 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출처가 없고 교차검증이 안 돼서 쓰지 않고 있죠.
그 내부사정을 정확히 알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 부정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긴 합니다.
사치에 대한 것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습니다. 삼천궁녀야 창작이지만, 저렇게 큰 권력을 얻은 왕이 사치 테크로 빠지기는 쉽거든요. 하지만 그게 중요 원인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게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긴 힘듭니다. 당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끝나든 백제왕 중 주목해야 할 왕 중 하나로 남았겠죠. 이 사건으로 귀족, 호족들이 등을 돌리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부흥운동을 보면 나라의 멸망을 무시할 정도로 분열되었다 생각하기도 힘듭니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는 의자왕입니다. 서로서로 투닥거린 게 수백년이고 자기도 그 중 하나였는데 말이죠. 중국의 다른 왕조들은 말로만 하지 직접 끼어들지 않았고, 그 수나라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에게만 (...)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656년, 성충이 옥에서 굶어죽으면서 남긴 말입니다. 사치도 향락도 없고, 숙청에 대한 것도 없죠.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얘기 뿐입니다. 성충을 숙청한 주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죠. 신라와의 전쟁을 말한 게 아닙니다. 기벌포는 금강 하구로 추정되며, 수군으로 백제를 치겠다면 수도를 압박하고 공격할 수 있는 이 곳으로 와야 됩니다. 하지만 신라도 고구려도 수군으로 이 곳까지 온 적이 없습니다. 적국이든 해적이든 공격받은 기록은 없죠.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기벌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당이 수군으로 공격해 오겠다는 거죠.
성충은 당은 반드시 백제를 공격할 거라는 주장을 한 거죠. 당은 고구려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백제를 잡으면 남쪽에 확실한 제2 전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요동 방어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한 남쪽 말이죠. 신라는 백제 걱정 없이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으며, 백제를 흡수하면 백제군과 물자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당은 수군을 크게 늘렸고, 북부긴 하나 한반도에서의 작전도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수군으로 백제를 못 칠 것이 없으며, 반드시 올 거라 분석했을 겁니다.
의자왕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나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도 기벌포에 올 가능성을 생각해 봤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당군이 올 것인가의 문제가 걸렸겠죠. 고구려는 수십년째 버티고 있고, 신라를 치지 말라는 협박은 말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이 막으면 물러났던 그였지만, 갈수록 당의 말을 무시하게 됩니다. 설마 당이 오겠느냐... 했겠죠. 그것도 13만이라는, 백제를 한번에 멸망시킬 수 있는 대군이 말이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게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당의 말을 계속 거부할 거라면 최소한 이에 대한 대비나 첩보 정도는 제대로 했어야 했죠. 그게 안 됐으니... 물론 그렇게 했더라도 당군을 막긴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평가는 좀 더 좋아졌겠죠. 전쟁이 아예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당군은 왔고,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받아야 하니까요. 선조도 임진왜란 없었으면 명군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인데요.
아무튼, 그렇게 그들은 왔습니다.
"660년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행님이랑 대장군은 읎다. 우리 아부지 밑으로는 다 소정방이 맴이다
김춘추도 이에 대응해 한산주, 경기도 이천으로 갑니다. 6월 18일에 도착했고 태자 김법민을 사자로 보내죠. 소정방과 김법민은 21일에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서 만납니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왕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소정방이 니 지금 장난하나? 택도 읎다!
"대왕은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김춘추는 기뻐하며 5만의 군사를 사비성으로 보냅니다. 그들을 이끄는 건 그 해 초 상대등에 오른 김유신, 태자 김법민, 김유신의 아우 김흠순, 김품석의 아우 김품일이었습니다. 흠순과 품일은 화랑인 자식들도 데리고 가니 반굴, 관창이었죠. 김춘추 자신도 다른 병력을 이끌고 상주로 비정되는 금돌성으로 남하합니다. 신라 주력군이 북쪽에서 공격한다면, 김춘추는 남쪽에서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18만 대군이 백제로 향합니다.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목표는 오직 사비성, 백제 자체였죠.
참... 설마 몰려오겠어 하는데 몰려온 게 하필... "맨 위가 소정방 장군, 그 다음이 바로 나, 김↘이↗무이↘"였다뇨...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립니까.
생각해 보니 당이 백제부터 건드린 건 상당히 병법에 잘 맞는 일이네요. 고대로부터 적(당 입장에서는 고구려)이 필사로 버텨서 직접 공격이 어렵다면 다른 곳을 휘저어서 제2전선을 만들고 그로부터 잠식해 들어가거나 최소한 적의 주의를 분산하여 병력을 나누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연스레 전선이 약화되는 효과를 가져오도록 했죠. 명장들이 즐겨 써 오던 수법이었구요. 게다가 고구려 정벌 자체가 잘 하면 한반도 전체를 석권할 수 있고 못해도 찜찜한 뒤통수를 정리해 버릴 수 있는 잭팟인데 그 발판이 되어줄 백제 정벌을 위한 수군은 갖춰졌고 한반도 내에서는 대놓고 호응하는 세력이 있으며 백제는 안으로부터 흔들거리고 있으니... 정보력에서도 당이 충분히 우위에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당이 백제를 칠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봐야겠네요. 어쩌면 대국적인 식견의 문제였을까요...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 혹은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적 혼란은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도 교차검증되는 내용입니다. 물론 과장은 많이 되었을테고 그것이 백제 멸망의 주 원인까지야 아니겠습니다만, 나당 동맹군에 비해 의아할 정도로 무기력한 백제의 대응에는 분명 의자왕의 사치나 향락 혹은 정치적 독주가 영향이 있다고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