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어린 시절, 언제나 아슬아슬한 시간에 집을 나서던 나는 항상 잰걸음으로 등교를 하곤 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양손으로 양어깨의 맨 책가방 어깨끈을 야무지게 끌어당겨 질끈 부여잡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극복하겠다는 듯 몸을 살짝 둥그스름하게 앞으로 숙이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학교를 향한 나의 출정식(?)은 마무리되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학교에 도착하고 싶었던 나는 등굣길에 항상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걸었다. 등굣길을 나서면 내 주변을 걷고 있는 또래의 많은 학생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등교 트랙 위에 놓인 경주마이자 경쟁자인 동시에 나의 제물이었다. 목표는 간단했다. 내 앞에 놓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치며 교문에 골인하는 일.
나는 매일 이 등하교 레이스(?)에 자못 진지하게 임했다. 상대방 학생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나는 마치 자동차 경주를 하는 레이싱카 마냥 그렇게 한 명 한 명 따라잡는데 재미를 느끼며 빠르게 잰걸음을 놀리곤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나만의 룰이 있었으니, 절대 뜀박질은 하지 않았다. 뛰는 건 반칙이었다. 오직 걸음으로, 오로지 경보선수와 같은 속보와 파워워킹만으로 내 경쟁자들을 제치는 것이 나만의 룰이자 철칙이었던 것.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게 파워워킹을 하다보면 꼭 좀처럼 따라잡기 힘든 녀석이 한둘쯤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그 친구도 속보로 학교를 향해 남몰래 질주하고 있는 중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나도 오기가 생겨 더 발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는데 그럼 어느새 그 녀석과 나 사이에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레이스가 시작되곤 했다.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판 초면인 아이 둘이서 서로 일절 쳐다보지도 않고 경주마처럼 나란히 정면만을 바라보며 낑낑대듯 진땀을 빼며 잰걸음으로 경쟁하듯 걷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우스운 코미디에 가까웠다. 누군가가 보기엔 의미 없고 우스운 그 등교 레이스가 그 순간 우리 둘에게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비장한 승부이자 거룩한 사투였던 것. 그렇게 치열한 접전 끝에 때론 이기기도 하고 가끔은 지기도 하던 등하교레이스였지만 한 가지 희한했던 건, 목숨을 걸듯 마침내 상대 녀석을 제치고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교문에 골인한 이후에도 기분이 막 상쾌하고 신나기보다는 무언가 허탈하고 머쓱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아침마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듯 아등바등 덤벼드는 내 모습에 대한 자각으로 인한 뒤늦은 현자타임(?)이랄까. 교문을 들어서며 괜한 민망함에 '앞으론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했지만 하굣길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의를 불태우며 레이싱에 참전하곤 했다.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보니 '등하교 레이스' 뿐만이 아니라 살면서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걸 느꼈다. 그 자존심 싸움에서 한 치라도 밀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기 일쑤였다. 김수영 시인의 시구처럼 돌이켜보면 항상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했다. 모임에서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내는 것이 속이 쓰렸고, 여친의 답장이 느린 것에 짜증이 났다.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나는 주변 지인들과 맘속으로 여러 번 절교했다가 화해하길 혼자서 반복했다. 맘에 드는 이성을 두고 친구와 경쟁이 붙으면 어떻게든 친구를 제압하고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티 안 나는 꼼수에 꼼수를 부렸다. 가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쟁이 붙으면 말이 되는 논리든, 말이 안 되는 논리든 전부 끌어와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한 오기와 집착 끝에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만들어지고 끝끝내 상대방의 승복을 끌어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개운치 않고 허망해지기 일쑤였다. '잘 이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잘 지는 것'인데 그때는 지지 않을 생각만 했지, 어떻게 져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작은 승리와 이득에 눈이 멀어 아등바등하다보면 더 큰 걸 놓치기에 일쑤였다. 그 순간에는 눈앞의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지만 한걸음만 멀찍이 떨어져서 내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민망하고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에서도 털끝하나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계산적으로 굴다보면 결국 나중에 가선 더 크게 잃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관계에서도 쓸데없이 욕심 부린 만큼의 후회가 딱 그만큼 돌고 돌아 뒤늦게 되돌아왔다. 이렇듯 사소하지만 부끄러운 경험이 많아질수록 나는 잘 이기는 것만큼 '잘 지는 것'의 중요성을 체감하곤 한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오로지 어떻게든 이겨야만 될 것 같았던 지난 길을 되돌아보며 나는 잘 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재미(?)를 뒤늦게 서서히 알아갔다. 이른바, 잘 지는 재미 말이다. 물론 매사에 모든 걸 져주고 양보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욕심을 내야 하는 상황들, 양보할 수 없는 순간들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고 때때로 상처뿐인 영광만이 남는 상황이라면, 나는 현명하게 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제라도 잘 지고 싶다. 그렇게 잘 져서,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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