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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연극도 발전하고 있고, 미국의 연극도 발전하고 있고, 러시아의 연극도 발전하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의 연극도 발전하고 있다.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의 연극 역시 발전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 가운데에 있다.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지금 나에게 만족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변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난 움직이기로 했다. 큰 변화는 힘드니까 작은 변화부터. 일상에 작은 변화를 만들고 그것에 적응하고, 다시 작은 변화를 만들고 그것에 적응한다. 반복하면 어느새 처음 시작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는 무엇일까.
극단의 하루는 대략 이랬다. 낮 2시에 모여서 1시간 가량 청소를 하고, 다같이 몸을 푼다. 몸을 푸는 것은 정해진 스트레칭을 순서대로 했고, 한국무용 기초 동작들을 반복했다. 한참 땀을 흘리면 4시에서 4시 30분 사이. 그 때쯤 교수님이 오셨고, 연습을 한 후 여섯시쯤에 저녁타임. 저녁을 먹으러 가는 단원들에게 총무 유희 선배가 오천원씩 나눠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7시쯤 모여서 밤 10시에서 11시까지 연습. 이게 대략적인 극단의 스케줄이었다.
나는 일단 연습실과 친해지기로 했다. 연습실에만 오면 긴장이 되었고, 뭔가 짓눌린 듯한 느낌이었기에. 하지만 선배들이 가득하고 교수님이 있는 연습실과는 친해지기가 힘들었다. 집에 가는 길.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해보았다. 끝난 뒤에 남아서 연습을 할까. 음... 아닌 것 같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끝나고 남아서 연습을 하는 선배들이 몇 명 있다. 되도록 아무도 없었으면 했다. 그리고 하루의 마감에는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가치관인지라. 별 것 아니지만 집에 가서 운동하고 씻고 가볍게 게임을 한다거나, 벽에 기대어 TV를 보다가 잠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 시간도 소중했다.
그렇다면 내가 살릴 수 있는 시간은 아침. 늦잠자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오면 사라지는 시간. 그동안의 나에게는 죽어있던 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먹었으면 당장 시작하자.
다음날 아침 9시에 연습실에 나왔다. 연습실 문이 열려 있다. 들어와서 보니 탈의실 구석에 앉아 승영선배가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나온다고 했던 승영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 정짱이. 웬일이야. 이시간에.”
“저도 이제 아침에 나와서 연습하려구요.”
“그래? 좋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아침시간이 진짜 좋다니까.”
승영선배는 진심으로 날 반겨주었다. 그의 말대로 아무도 없는 연습실은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지금껏 보던 연습실의 얼굴이 아니다. 문득 연습실 구석구석을 둘러보니, 이런 공간들이 있었나 싶다. 내가 지금껏 밟아본 연습실은 일부분이었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와서 바로 탈의실로 들어갔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연습실 구석자리에 착석, 시간이 되면 맡은 구역을 청소한다. 청소가 끝나면 다시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가 몸 푸는 시간이 되면 뒷자리로 가서 열심히 몸을 풀고, 끝나면 다시 구석자리 착석하여 뭔가 할 일이 없는지 눈치를 보다가 교수님이 오면 일어나서 인사한다. 그리고 연습이 시작. 앉아 있다가 등장할 때가 되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군대 훈련소에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훈련소는 꽤나 넓은데, 훈련병이 밟아볼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마음껏 돌아다녀본 적이 있었던가. 승영선배가 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뭐 연습할 거 있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요. 이제 저도 선배님처럼 아침반이 되기로 했습니다.”
승영선배의 얼굴에 약간의 의아함이, 그 다음엔 반가움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열심히 하는 동료를 원했다. 꾸역꾸역 밥을 삼키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은 자세야. 한 번 열심히 해보자.”
밥 먹는 데에 열중하는 그를 보니 나도 배가 고파진다. 이따 나가서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공연에서 맡았던 어부들의 계장역은 잘 해냈다. 대사 한마디 짤리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대사에 교수님이 찌푸리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대학교 동기들이 보러와서는 대사가 전과 달라졌다며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잃어버렸던 자신감이 조금씩 스멀거리는 것을 느꼈다. 좋은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갑자기 연습실을 이전하게 되었다. 위치는 종로 3가 쪽. 바로 옆에는 창덕궁이 있고, 앞에는 큰 공원이 있어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다. 대학로에 있으면 온통 놀러온 사람 천지라 왠지 기분이 꿀꿀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한적하여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 좋았다. 승영선배는 ‘이제 연극만 생각하자. 우리는 연극과 사귀는 거야.’하며 설레발을 쳤다. 문제는 이사였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이삿짐만 나르면 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삿짐이 들어가기 전에 연습실 공사를 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단원들의 몫이었다.
여자 단원들은 공사가 끝날 때 까지 쉬고, 남자 단원들 중 중간 선배들부터 막내들까지 아침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했다. 연습실로 쓸 곳은 원래 사무실이 이었다. 크기는 100평 가까이 되었을까. 처음 공간을 마주했을 때 한숨이 나왔다. 이걸 언제 다하지.
공사의 시작은 천장과 바닥. 천장의 석고보드는 부숴버리고 바닥을 뜯어냈다. 석고보드를 뜯어내는데 허연 석고가루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석고보드의 잔해를 바깥으로 날랐다. 움푹 패이고 조금씩 부숴진 천장이 드러났다. 보기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천장은 높을수록 좋으니까.
그 다음은 바닥. 우리는 바닥 위에서 뛰고 구를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약간의 탄성이 필요했다. 나무 각재를 사다리처럼 만들어서 바닥에 깐 뒤에 그 위에는 두꺼운 합판을 올렸다. 합판을 3겹 올리고 못을 박아 넣은 뒤, 나무무늬의 장판을 깔았다. 여기까지만해도 며칠이 걸렸다.
다음은 교수님의 방으로 쓰일 공간과 남녀 탈의실, 기획팀의 사무실을 만들어야 했다. 방으로 쓰일 자리에 합판으로 칸막이를 만들고 문을 달았다. 남자탈의실은 구석진 자리에 커튼만 달았다. 그 다음은 여러 악기들을 올려놓을 받침대들을 만들고, 창문까지 합판으로 막았다. 물론 창문이 열리는 곳은 놔뒀다. 그리고 작업이 끝난 뒤에는 모든 것을 페인트로 검게 칠했다. 2주간의 대공사. 그렇게 연습실이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사였다. 이삿짐들을 옮기는 것은 지금까지 한 공사에 비하면 차라리 쉬웠다. 연습실 이전은 끝이 나고 교수님은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10만원씩 건냈다. 작업량에 비하면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
이사가 끝나고 3일을 쉬고 다시 모였을 때, 남자선배들 중 몇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극단을 나갔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좀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10년이 넘게 몸담은 곳을 그만두어도 그곳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무렇지 않게 잘만 흘러간다. 아마 내가 사라져도 그럴 것이다.
그간 승영선배와는 꽤 친해졌는데, 그것은 교수님의 저녁식사 당번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저녁으로 항상 청국장을 먹었다. 청국장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밖에서 음식을 드시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그 시간에 잠깐 잠을 자거나, 메모로 가득한 종이들을 살피고 또 메모했다. 그런 교수님을 위해 단원들 중 차막내 선에서 식사를 배달했다. 먼저 밥을 먹고 교수님께 식사를 갖다드리면 되었다. 웬만한 곳은 교수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잘하는 청국장 집을 찾아 먹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가게주인에게 그릇을 다시 가져다 줄테니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배달 전문점이 아닌 곳이 대부분이었기에 교수님 식사를 맡은 단원은 철가방을 들고 다녔다.
승영선배는 우리가 들어왔을 무렵부터 교수님의 저녁식사 당번을 하고 있었다. 막내가 들어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철가방을 넘기는 것이 관례였고, 승영선배 역시 우리가 극단에 들어온지 1년이 지났을 때 철가방을 넘겼다. 세환이형과 내가 당번이 되었고, 처음으로 교수님 방에 식사를 들고 들어갔는데 사단이 났다.
“뭐야, 승영이 어디갔어!”
“예? 그게...”
나와 세환이형은 서로 마주보았다. 난감한 표정의 세환이형. 아마 내 표정도 저렇겠지. 이제 이것을 우리가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뭔가 어렵다. 교수님은 우리 둘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교수님은 쩔쩔매고 있는 우리에게 눈길을 거두더니 말했다.
“다 모이라고 해!”
다 모이시랍니다- 나와 세환이형이 외치며 사람들을 모았다. 연습실에 단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앉았다. 태인선배가 귀찮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직 시간 남았잖아. 야, 설사 무슨 일이야?”
“그게... 그... 식사 갖다드렸더니 다 모이시라고...”
세환이형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세환이형은 태인선배를 어려워했다. 대충 알겠다는 듯 태인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변덕이셔.”
거구의 태인선배가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연습실에 들어가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언뜻보니 다 모인 것 같았다. 교수님 방에 들어가 다 모였다고 소곤거렸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이 묶음을 들여다보던 교수님은 곧 종이를 내려놓고 방에서 나왔다.
“지금 보니까 내가 먹는 저녁을 후배들한테 시키는 모양인데, 맞아?”
교수님은 생각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이다 이거야? 승영이 너 대답해봐. 그게 그렇게 하기 싫었어?”
승영선배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근데 왜 니 멋대로 후배들을 시켜!”
교수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승영선배가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태인선배가 말했다.
“선생님. 그게 아닌거 아시잖아요. 어쨌든 얘도 몇 년간 했는데, 그럼 밑으로 내려서 돌아가면서 할 수도 있는거죠. 왜 억지를 부리세요.”
“억지?”
교수님이 눈을 치켜떴다.
“중요한 일일수록 선배들이 해야 하는 거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앞으로는 선배들이 더 일을 많이 해야 할거야. 지금 각자 맡아서 하고 있는 거 다 밑으로 내리지 말고 선배들이 하도록 해.”
말을 마치고 교수님이 방으로 들어가자 단원들이 한숨을 쉬며 흩어졌다.
“승영아, 어떡하냐. 좀 더 해야겠다.”
태인선배가 승영선배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좀만 더 고생해라.”
주현선배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그렇게 선배들의 위로 속에 승영선배는 계속 식사당번을 맡게 되었다.
교수님은 왜 그랬을까. 자신의 식사를 누가 날라준다는 사실 자체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을 누가 한들 어떠한가. 극단역사 40년간 식사당번이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본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노인의 변덕이었을까. 교수님과 함께 극단생활을 하면서 그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고, 그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조금씩 금가는 느낌. 난 당번 때문에 항상 혼자 밥을 먹는 승영선배가 안쓰러워 앞으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원래 내가 했어야 할 일인데 그가 계속하게 된 것에 대한 나름 미안함의 표시랄까. 세환이형도 처음엔 함께했지만, 얼마 뒤 한곳에서만 먹는 게 힘들다며 떨어져 나갔다.
함께 해보니 식사당번은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성실한 그가 우리에게 이 일을 넘길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뻐하던 표정이 이해가 갔다. 보통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싸 가겠다고 하면 주인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릇문제도 그렇거니와 철가방을 들고 와서 음식을 싸가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처음에는 데면데면하다가 그곳에서 며칠 밥을 먹고 친한 척 할 수 있을 때쯤 되서야 기분 좋게 철가방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지방공연이라도 가면 현지에서 교수님께 드릴만한 식사를 찾아야 했다. 지방공연까지 갈 것도 없고 당장 대학로를 벗어나는 공연만 하게 되어도 마찬가지. 일단 메뉴에 청국장이 있는 식당을 찾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맛있어야 할 것. 두가지 조건을 다 충족하는 건 꽤나 까다롭다. 거기에 남들이 저녁먹고 쉬는 동안 남은 그릇을 다시 식당으로 갖다 놓는 일까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몇 년간 매일 한다고 생각하면 꽤나 귀찮은 일인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로에서는 승영선배가 몇 년 전부터 뚫어놓은 식당이 있어 수월했지만, 종로 3가로 연습실을 이전하고서는 꽤 많은 식당을 돌아다녔다. 교수님께서 이번 것이 맛있다, 저번 것은 별로였다 하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긴 식사량으로 판단을 했다. 그 중 전주식당이라는 곳의 청국장을 가장 많이 드신 것을 보고, 우리는 그곳으로 결정을 했다. 원래 없던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인 만큼, 그 보답으로 우리는 전주식당에서만 식사를 했다.하지만 매일 같은 곳에서 밥을 먹다보면, 오늘은 정말 다른 것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선배님. 오늘은 다른 데 가서 먹죠.”
“뭐? 선생님 식사는 어떡하고.”
승영선배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정직한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걱정마십쇼. 제가 잘 말할게요.”
“괜찮겠어? 괜히 미움사서 다음에 포장 안해주면 어쩌려고.”
“에이 저희가 공짜로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설마요.”
내가 앞장서서 식당으로 향했다.
“이모님~”
이모님이란 단어에 음을 섞어 불렀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어 삼촌들 왔어. 뭐 해줄까.”
식당주인이 반겨주었다. 나이는 50대쯤 되었을까. 처음엔 굉장히 까칠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꽤 친해졌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모님. 저희가 오늘은 외식좀 하고 올게요.”
“외식?”
“네. 이따 20분 뒤에 올테니까 청국장만 좀 싸주세요. 맨날 집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
“그래.. 20분 이따 온다고?”
식당주인은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그래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부탁드려요~”
승영선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오랜만에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다른 곳에서 밥을 먹었다. 나와 승영선배는 그럴 때 마다 오늘은 외식하자며 낄낄 거렸다. 외식을 하고 청국장이 담긴 철가방을 찾아갈 때는 식당 주인에게 더 친근하게 인사를 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어쨌든 이렇게 매번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승영선배와 가까워졌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고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군기를 잡으며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던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가까워지니 그 때 일을 얘기하며 웃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7월의 끝자락. 다음 공연은 무엇일까.
“일본에 도가라는 곳이 있어. 참 일본이란 나라도 대단하지. 스즈키 다다시 라고 일본에 연출가가 있는데, 나랑 나이도 비슷해. 그 사람한테 도가라는 마을을 통째로 준거야 연극하라고. 거기가 무슨 산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곳곳에 극장을 만들고 연극을 하고, 숙박시설을 만들어서 1년에 한 번 페스티벌을 여는 거지. 기간이 일주일 정도 였나.. 도가 페스티벌이라고 할거야 아마. 그럼 한 마을 전체가 연극 페스티벌을 하는 공간이 되서 다른 곳에서 초청한 극단들이 와서 공연하기도 하고, 자기들도 공연을 하는 거지. 그럼 일본 사람들은 아예 일주일 동안 거기로 여행을 온다고. 거기 머물면서 보고 싶은 연극 찾아보는 거지. 부러운 일이지.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할.”
교수님이 끌끌 거리며 혀를 찼다. 하긴,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긴 하다. 교수님도 한국연극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었고, 스즈키 다다시 또한 일본에서 교수님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했다. 어쨌든 한쪽은 나라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고, 교수님은 받던 지원이 끊겨서 연습실을 이전해야 했으니. 주위의 사람들만 봐도 영화 표값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연극표값은 아까워했다. 물론 연극표 값이 더 비싸긴 하다. 어쩌다 공연을 보러 오겠다고 연락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대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초대권이 없다고 하면 공연관람을 포기했다. 내 주변이 유독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스즈키 다다시에게 연락이 왔어요. 이번 페스티벌에 우리 극단을 초청한다고. 개막작으로 공연을 올리기 때문에 하루만 공연을 하게 될거야. 대충 사진은 봤는데, 극장이 아주 조건이 좋아. 야외 극장에다가 뒤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 뒤에서부터 무대로 다리가 두 개 이어지는 구조야.”
연습이 시작되었다. 지난 번 중국에서 했던 연극을 공연하기로 결정되었다. 배역은 전에 했던 그대로 결정되어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전과 다른 것이 한가지 있었다.
“아무래도 개막작이기도 하고, 외국에서 공연하는 만큼 더 한국적인 색을 넣어보려고 해. 그러려면 우리가 한국적인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된 게 한국사람들이 한국적인 것을 제일 모른다고. 타악선생님 한 분을 모시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그 분에게 우리 전통악기들을 배우고 한번 두닥거려 보자고. 다행히 공연 때까지 시간이 제법 있으니 몸에 체화를 시켜봐. 그럼 내가 봐서 이게 연극에 들어갈 만한 물건인지 한번 판단해보고 괜찮으면 집어넣자고.”
한국사람들이 한국적인 것을 제일 모른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일수도. 티비에서 예능프로만 봐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비하가 흔하게 일어난다. 출연자들이 춤을 못추거나 이상한 동작을 하면 ‘봉산탈춤 추냐’라는 말은 이제 흔하다. 봉산탈춤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고루한 것을 표현할 때 나오는 태평소 소리 또한 익숙하다. 예전에 어떤 연예인이 특정 직업을 거론하면서 '(특정직업)이나 해야겠다.’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논란의 이유는 특정 직업에 대한 비하로 들린다는 것. 하지만 어떤 연예인이 춤을 못 추는 것을 지적당하자 ‘에이 난 봉산탈춤이나 해야겠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논란은 본 적이 없다. 사실 이제는 그런 것에 발끈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겠다. 너무 당연시 되는 거라 그런지.
극단에서 하는 연극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전공자에게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선배들은 약간씩 악기를 칠 줄 알았다. 예전에 극단에 있던 누군가에게 배운 것들이고, 그렇게 배워서 후배들을 가르쳐 왔다. 하지만 잘 친다고 말할만한 사람은 없었고, 이제 제대로 선생님을 초빙하여 악기를 배우게 된 것이었다.
40대의 남자분이 타악선생님으로 오셨다. 체구는 작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모습. 처음엔 장고 기본가락을 배웠다. 그렇게 몇 주를 배우다가 악기를 배분했다. 남자들이 북을 잡고, 여자들은 계속 장고를 맡았다. 특별히 어떤 악기가 어떤 성별에 어울리고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실력있는 타악팀이 아닌 이상, 일단 북소리가 힘있게 들리는 것이 좋다며 타악 선생님은 남자들에게 북을 잡게 했다. 확실히 악기를 배분하니 더 재밌었다. 서로 다른 것을 치는데 맞아떨어진다. 점차 고조되어갈 때마다 꽹과리의 신호에 따라 가락이 바뀌고 그것이 흥을 돋구었다. 굿거리에서 자진모리, 자진모리에서 별달거리, 별달거리에서 휘모리로 넘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가락. 처음엔 다들 가락을 외우지도 못하고 어설펐지만 치면 칠수록 익숙해져갔다. 가락이 넘어갈 때 마다 신호음으로 들리는 꽹과리 소리에 소름이 돋았고, 몸이 가락에 맞춰서 절로 움직였다. 굿거리에서 가락을 타고, 자진모리에서 흥을 돋구다가 약간 빠른 별달거리로 넘어간다.
하늘보고 별을따고 땅을보고 농사짓고-
올해도 대풍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달아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어둠속의 불빛이 우리네를 비춰주네-
별달거리에 있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고 나면 세상 시름을 다 잊는 것 같았다. 별달거리 구호가 끝나면 꽹과리의 신호가 들리고 휘모리가 시작된다. 휘모리에서 북은 단순한 박을 계속 쳐야하지만 치다보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젖었고, 손바닥이 터져서 피가 났다. 하지만 아픈 줄을 몰랐다. 휘모리가 끝나면, 쉬는 시간에 손바닥을 휴지로 감싸 매고 다시 북채를 잡았다. 내 이름이 적힌 북채는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어느 날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단원들이 다 모이자 타악선생님이 나를 지목하며 물었다.
“저기 친구는 이름이 뭐지?”
“네, 정짱이라고 합니다.”
“그래, 정짱씨 혼자 휘모리 한 번 쳐볼까?”
선생님은 윤씨였다. 그래서 우리는 윤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난 당황해서 윤선생님을 멀뚱멀뚱 보다가 휘모리 가락을 천천히 쳤다. 다같이 칠 때는 좋았는데 혼자 치려니까 왠지 부담스럽다. 멈추라고 손짓한 뒤 윤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휘모리 칠 때 정짱씨 몸 움직이는 거 보이죠? 몸을 이렇게 써야되요. 다들 몸을 쓰기는 하는데, 호흡이 뒤집혔어. 아 물론 보시기엔 지금 정짱씨가 몸 쓰는게 뒤집힌 거 같이 보일거에요. 근데 휘모리는 빠른 박자라서 바로 다음 박자를 위해 몸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이게 맞는 거에요.”
휘모리를 칠 때 북은 굉장히 단순하다. 강하게 치고 약하게 치고의 반복. 강 약 강 약 강 약 – 이런 식으로. 보통은 강을 칠 때 몸이 수그라들고 약을 칠 때 다시 펴지게 되는데, 어느 정도 속도가 붙으면 그게 뒤집히게 된다. 윤선생님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는 잘 안되겠지만, 다들 릴렉스하고 몸을 가락에 맡기면 저절로 될거에요.”
윤선생님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정짱씨는 어디서 치다가 왔어?”
“네?”
“처음 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어디서 하다가 온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여기서 처음 배웠습니다.”
“그래?”
윤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처음하는 거면 눈이랑 귀가 좋은 가봐. 그럼 타악해야 하는데.”
윤선생님은 빙긋 웃더니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난 다시 한번 선배들에게 연기 빼고 다 잘하는 이미지를 갱신했다. 어느새 그게 내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교수님은 나날히 늘어가는 단원들의 실력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공연 시작 전에 아예 길놀이를 통째로 넣자고 했다. 그는 윤선생님에게 잘하는 단원 중 두 명을 뽑아 꽹과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항상 선생님을 모실 수는 없으니까. 단원들 중에서도 꽹과리를 다룰 녀석이 있어야죠.”
“아, 그야 맞는 말씀입니다. 하기는 해야하는데...”
윤선생님은 ‘꽹과리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디’ 하고 중얼거리다가 교수님에게 물었다.
“선배들 중에서 뽑아야하는 거죠?”
교수님은 잠깐 단원들을 흘긋거리더니 말했다.
“상관없어요. 잘하는 친구가 해야지 뭐.”
“그러면...”
윤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일단은 정짱씨가 하고...”
사람들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선배들이 피식거리면서 웃었다. ‘쟤는 진짜 연기빼곤 다 잘해’이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정짱이요?”
교수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부계장역을 잘 해내긴 했지만, 아직 나를 못미더워하는 눈치.
“네, 저 친구가 잘 합니다. 그리고 또 한명은...”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유희가 하지. 그래도 선배선에서 한 명 있어야 하니까.”
교수님이 윤선생님의 말을 자르고 유희선배를 지목했다. 윤선생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 편이 아무래도 좋겠네요. 어쨌든 단원들을 이끌어야 하니까. 유희씨가 상쇠를 하시고 정짱씨가 부쇠를 맡으면 되겠네.”
그렇게 난 꽹과리를 맡게 되었다. 꽹과리는 부담스러운 악기였다. 북과는 너무도 달랐다. 북은 하는 만큼 준다. 북에 온힘을 다해 내리 꽂으면 그만큼 강한 울림을 돌려줬다. 그러나 꽹과리는 때리면 안되는 악기였다. 살살 달래야 했다. 꽹과리를 북처럼 치면 그것은 소음이 된다. 꽹과리채에 양말을 씌워서도 쳐봤지만, 양말을 벗겼을때와 느낌이 너무 달라 이내 그만두었다. 윤선생님은 손바닥에다가 연습을 많이 해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프면 잘못치는 거라며. 그 뒤로 난 항상 꽹과리채를 들고 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쉬는 시간에도, 집에 갈 때 지하철안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건 말 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악기라는 것은 센스도 중요하지만, 절대 시간이 중요했다. 내가 악기를 만져본 시간. 그 시간만큼의 성과를 준다. 내가 지금부터 공연 때까지 윤선생님 만큼 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는 가야 했다. 집에 가면 인터넷에서 꽹과리 치는 사람들 동영상을 찾아보고, 그들의 손모양과 내 손모양을 비교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윤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윤선생님은 ‘대충해’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꽹과리에는 신기한 타법이 많았다. 그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느새 시끄러운 소리라고만 여겨졌던 꽹과리 소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아침에 나와 꽹과리를 한참 때리고 있으면, 그 쇳소리가 뇌의 간지러운 곳을 콕콕 찌르는 듯 했다.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비약적으로 실력이 늘었다. 주변에서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희선배는 꽹과리를 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기 보다는, 윤선생님이 가르쳐준 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찌보면 본업이 연기자인 이상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극단에서 내가 약간 특이한 놈 취급을 받는 만큼. 유희선배는 총무다보니 악기 연습시간에 자리를 비울때가 많았고, 그래서 내가 혼자 꽹과리를 맡아서 칠 때가 꽤 있었다. 단원들은 내 꽹과리의 발전을 좋아했다. 흥이 난다면서. 사실 유희선배 없이 혼자서 치는 게 더 좋았다. 꽹과리는 가죽악기들이 깔아준 베이스 위에서 놀 수 있어야 했는데, 유희선배는 그냥 정박을 지키며 건조하게 쳤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유희선배와 칠 때는 가장 기초적인 가락만 쳐야했다. 그것은 마치 고등학교 수학에 재미를 붙였는데, 다시 초등학교 1학년 산수를 하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아까 너 또 다르게 치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같은 걸로 쳤어요.”
“그게 같은 거라고? 다르게 들리는데?”
이미 기본기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나였기에, 그냥 기본 가락만 쳐도 유희선배와는 다르게 들렸다. 꽹과리는 왼손의 막음을 어떻게 주느냐, 혹은 가락의 사이를 좁고 넓히느냐에 따라 소리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분명히 같은 가락을 치고 있었지만, 유희선배는 인정하지 않았다. 계속 다르다고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신호를 주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분명히 들어갈 곳이 아님에도 유희선배는 신호를 줬다. 가락이 넘어갈 때는 보통 짝수박에서 신호를 주게 되는데, 가락을 치다가 짝수박이 되면 느낌이 온다. 예를 들어 여덟 번 치고 넘어가자라고 약속을 하면, 굳이 숫자를 세지 않아도 그 여덟 번째에 느낌이 오는 것. 뭔가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숫자를 세면 더 헷갈린다. 치는 것에 집중하면 숫자를 잊어버리기 마련이라서. 그런데 유희선배는 철저하게 숫자를 셌다. 그리고 많이 틀렸다. 그래도 가락의 갯수를 틀리는 것은 괜찮았다. 신호를 듣고 다같이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아예 가락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유지되던 박자를 갑자기 당겨서 혼자 쳐버린다던가. 한 호흡 쉬어야 하는데 쉬지 않고 혼자서 넘어가버린다던가. 그렇게 되면 가락은 우당탕탕하면서 소듬이 되었고, 이내 무너져버렸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멀뚱멀뚱 꽹과리들을 쳐다보았는데, 유희선배는 그럴 때 마다 좋은 말로 나에게 말했다.
“정짱아. 거기서 너도 들어왔어야 해. 나 혼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신호를 못듣잖아.”
유희선배의 얼굴에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교수님도 호통을 쳤다. 너 똑바로 하라고, 일본가서도 그럴거냐면서. 극단의 막내가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함께 연습을 해온 단원들은 모두 알았다. 연습이 끝나면 다들 지나가면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점점 유희선배가 불편해졌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결론은 내가 틀린 것이 되었다.
“정짱아. 내가 여기서 보고 들은게 10년이 넘었어. 물론 너도 니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를 좀 믿고 따라올 수는 없겠니?”
유희선배가 보낸 10년이 넘는 세월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왜 모를까.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완전히 버린 그녀에게 난 그냥 대화를 포기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난 최대한 작게 치며 그녀가 틀리던 말던 그대로 따라갔다.
어느 날 남자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태인선배가 와서 나에게 말했다.
“야. 너 졸라 스트레스 받지?”
“네?”
“너 유희 때문에 스트레스 받잖아. 안 틀렸는데 니가 틀렸다고 그러고.”
“아... 제가 잘 못하다 보니까..”
“꺼져. 이 새끼 가식이야 겸손이야. 너 졸라 늘었잖아. 사람들이 모를 거 같냐. 다 알지. 그건 좋은 거야. 니가 노력하고 연구한거지. 여기선 그렇게 해야돼.”
태인선배의 말이 약간은 위로가 되었다. 이 사람의 말에 위로를 받을 줄이야. 그는 다시 말했다.
“유희 박치야. 옛날부터 그랬어. 우리들은 다 알지. 어떡하냐? 걔는 계속 안 틀렸다고 그럴텐데. 너만 피보게 생겼다야.”
킬킬거리며 태인선배가 탈의실을 나갔다. 위로해주는 가 싶더니 저 양반은 역시나다. 박치라... 그렇다면 유희선배는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본인이 틀린 것을.
“자, 오늘은 윤선생이 와서 봐주기로 했으니까 선생님 앞에서 잘 해보라고.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잘 맞는지.”
공연을 가기 전 최종점검이라며 윤선생님이 왔다. 교수님은 모두 밖에 있는 공원에 모이라고 했다. 야외공연이니까 야외에서 연습해보자며. 선생님과 교수님 앞에서 길놀이를 마쳤고, 교수님은 윤선생님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윤선생님은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위태위태하네요. 겨우 가긴 가는데...”
“그렇죠?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뭐가 문제인가요?”
윤선생님이 나를 빤히 보며 웃음을 참다가 다가와 어깨를 덥썩 잡았다.
“왜 이렇게 주눅이 들었어. 그냥 쳐, 편하게. 옆에서 유희씨가 정박 쳐줄거니까 그냥 편한대로 막 치라고. 이게 원래는 상쇠가 놀고, 부쇠가 정박을 치면 되는 건데 바뀌어도 상관없어. 괜찮아. 누가 알겠어?”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유희선배가 말했다.
“제가 정박으로 쳐달라고 부탁했어요. 듣다보면 너무 헷갈려서.”
“그래요?”
윤선생님이 눈을 동그렇게 뜨고 나와 유희선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른 단원들에게 가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다 같이 해보자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교수님은 옆 벤치에 앉아 노려보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구성은 어느 정도 됐어요. 다른 건 다 됐고, 길놀이를 시작할 때 점고를 하거든요?”
점고는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다. 길놀이 시작 전에 북들이 모여서 느린 속도로 북을 친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둥둥두두두두두----
점차 빨라지며 잦아든다. 이것을 두 번 반복한다.
“점고가 끝나면 상쇠가 가락을 하나 냅니다.”
윤선생님이 앞에서 꽹과리 한 가락을 쳐주었다. 조용한 공원에서 꽹과리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개개갱 갱 갱 개 갱 개갯 개~ 갭
굿거리를 내는 가락이다. 다만 윤선생님이 낸 가락은 약간 더 멋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유희선배는 이게 굿거리인지도 모를 듯 했다. 윤선생님은 유희선배에게 해보라며 눈짓을 했다. 그녀가 더듬더듬 쳐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윤선생님이 가락을 풀어서 천천히 몇 번 더 쳐주었지만, 유희선배는 끝내 치질 못했다. 얼굴이 점점 찌푸려지던 교수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뭐하는 거야! 선생님 오신 시간 다 뺐을 참이야?”
윤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정짱씨가 한 번 쳐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확 쏠렸다. 손이 살짝 떨렸다. 윤선생님처럼 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하게는 쳐냈다.
“됐어! 그건 그냥 정짱이가 하도록 해!”
“에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요.”
윤선생님이 교수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수님은 뭔가 새로운 것이라도 있나 하는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예, 선생님. 왜 뭐가 더 필요한가요?”
“일단 이 번 공연은 정짱씨가 상쇠를 맡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당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번 만 그렇게 하시죠.”
교수님이 말이 없다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저 친구가 잘 합니까?”
“배운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잘 하는 겁니다. 한 번 믿고 맡겨보시죠.”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선생님이 나와 유희선배에게 왔다.
“유희씨. 지금 보니까 악기를 어려워 하는 것 같아요. 일단 젊은 피에게 맡기고 천천히 따라오는 걸로 하세요.”
유희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그렇잖아도 너무 어려워서... 차라리 다행이네요. 정짱아, 너만 믿을게.”
이렇게 훈훈하게 끝날 거였나. 뭔가 이상했다. 유희선배의 표정은 한겹 코팅된 것 같았다. 그녀는 웃었지만, 내 눈에는 그것이 편하게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길놀이 연습은 끝났다. 이제 내일이면 일본으로 떠나야 하기에 교수님은 더 연습을 하려고 했지만, 경찰들이 와서 민원이 들어왔으니 그만 하랜다. 어쨌든 나는 이번 길놀이의 상쇠를 맡게 되었고, 뿌듯했다.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느낌? 하지만 걱정되기도 하고. 일본인들 앞에서 잘 해내야 할텐데. 윤선생님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와서 슬쩍 말했다.
“긴장할 것도 없어. 그냥 막 해. 틀려도 일본사람들이 알겠어? 원래 그런가부다 하겠지.”
윤선생님은 그렇게 농담을 하며 떠났다. 하지만 그 농담에 마음이 놓인다.
다들 연습실로 들어와서 짐을 쌌다. 공연에 사용될 소품들과 무대를 만들 때 쓰는 공구를 챙겼다. 하나라도 빼먹으면 큰일이다. 다시 가지러 올 수도 없다. 선배들이 소품목록이 적힌 종이들을 들고 몇 번씩 확인을 했다. 확인 할 때마다 볼펜으로 체크를 하다 보니 종이가 시커멓다. 연습실이 먼지로 가득 차고, 이사할 때 쓰는 파란박스가 20개 정도 쌓였다. 모두들 기진맥진. 교수님은 고생했다며, 공연 끝날 때 까지 방심하지 말자고 한다. 다음날 콜 시간은 아침 9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다들 흩어졌다.
지하철 안에서 동기들은 일본공연이 기대된다며 재잘거렸다. 나 또한 기대가 되었지만, 그 곳에서 꽹과리를 쳐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두렵기도.. 하루 한번만 하는 공연. 두 번은 없다. 잘 해내야 한다. 하나 둘 씩 동기들이 내리고, 곧 나도 내렸다. 손바닥에 꽹과리채를 두드리며 집으로 걸었다. 길은 어둡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하다. 하루가 저물었다.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외국공연을 가기전날은 기분이 묘하다. 분명히 놀러가는 것은 아닌데, 놀러가는 느낌이랄까. 일단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그런 기분을 주는 것인지. 피곤하니 잠은 잘 올 것 같다. 이제 눈을 감았다 뜨면 다음 날 아침일 것이다. 방 창문에 달빛이 슬쩍 비치고, 밖에서는 여러가지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지나가며 내는 경적 소리, 술에 취한 누군가가 호기롭게 주정부리는 소리. 많은 소음들이 모여 밤의 소리를 낸다. 익숙하다. 그 소리가 정겹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또 올립니다. 이번엔 국악이야기가 많았네요. 약간 산으로 간 것 같기도 하고..;;
도가에서 했던 공연이 인상적이었어서 한 번 더 다룰 생각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