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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7/06/21 02:06:49 |
Name |
치열하게 |
Subject |
[일반] 세상은 흐려졌고, 나도 그렇다. |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직 오후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가장 인기있는 구석자리는 아니지만 나름 공간이 넓게 느껴지는 철봉 옆자리에 앉았는데
막상 옆에 앉은 남자의 덩치가 매우 커서 살짝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환승역이라 사람이 많이 내렸고, 대각선 맞은편에 구석자리가 비어있는 게 아닌가.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출발할 때까지 아무도 선점하지 않기에 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옮기고보니 왜 이 자리가 인기가 없었는지 알것도 같았다.
최근 추가된 임산부 전용석.
옮기기 전에 봤더라면(이 좌석은 2호선처럼 분홍색으로 튀지 않았다.) 옮기지 않았을테지만 이미 옮긴 후였고,
다시 자리를 움직이기도 뭐하고, 지하철 좌석은 자라나는 아이의 입처럼 군데군데 많이 비어있었기에 그냥 앉았다.
휴대폰을 보지 않고 멍때리는 시간은 이미 보냈고, 이어폰을 꽂아 노래를 들으며 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을 때 텅 빈 자리에 지갑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모른 척했다.
유일하게 내가 앉은 좌석 줄에 있는 할아버지는 못 본 듯 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도 못 본 듯 했다.
나도 못 본 척을 했다.
아 왜 내 옆에 떨어져 있는 거지.
주은 지갑을 처리하는 법은 알고 있다.
예전 호프집에서 일했을 때 매니져가 지갑을 주며 집에 가면서 우체통에 넣으라고 했었다.
아 그러면 되는구나 했다.
저 지갑도 그리 하면 된다.
내가 내릴 옆에서 5분도 안되 우체국이 있으니까.
아니 내려서 역무원에게 그냥 줘도 된다.
지갑의 돈은 혹시나 주인을 찾아줬을 때 받을 수 있을까 싶은 사례금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지갑을 갖다주면 되는데
혹시나 내가 저 지갑을 주웠을 때
내가 도둑으로 몰릴까 싶었다.
그 점이 왜 하필 내 옆에 떨어져있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도둑으로 몰릴까봐.
이미 세상엔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 생각해보니 이거 옛날 속담인데 예전에도 많았겠구나.
한 달인가 전 쯤엔 아버지가 지갑을 잃어버리셨다. 돈도 20만원 들어있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셨다.
젠장할 사연에 너도 한 번 당해봐라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그냥 역무원 가져다 주는 게 낫겠지?
우리 아버지와 같은 비극이 없도록
근데 내가 저 지갑에 손대다 도둑으로 몰리면?
그렇다고 냅두면 과연 저 지갑을 그대로 주인 찾아 줄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누군가 횡재했다며 지갑을 그대로 접수하는 건 좀 배알이 꼴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갑을 모른척 하고 있을 때, 다음 역에 도착했다.
혹시나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보고 있으려니 저기 역무원 한 분이 슬렁슬렁 걷고 계셨다.
지갑을 집어 열린 문 사이로 역무원을 불러 이거 떨어진 거에요 하며 전달해주었다.
심장이 좀 쿵쾅쿵쾅했다.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내게 별일 없겠지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래도 한 달 전 아버지와 같은 사례는 안 나오겠지.
주인에게 돌아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세상은 흐려,
아니 난 좀 흐려져있다. 소심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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