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벌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명사나 협객, 관료들로 다양하다. 군벌이라함은 군대나 사병집단으로 특정지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를 뜻하는데 후한 말의 대표적인 군벌은 동탁, 원소, 마등, 한수, 유언, 유표, 공손찬, 원술, 조조, 손견, 유비 등이 있었다. 군벌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후한말 관료의 부패로 정치가 문란하게되어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황건적을 중앙정부의 힘만으로 토벌하기엔 이미 상당히 약화되어 의용병을 모집하는데 이를 시작으로 유력군벌들이 등장하게된 것이다. 의용병이라지만 사실상 사병이었다. 거기에다 유언이 목牧의 설치를 건의하여 시행되는 것에 기인한다. 기존의 자사는 중앙정부에서 파견되어 주군州郡을 감찰하는 것으로 원래는 태수보다 품질이 낮았다. 목은 자사에서 권한이 대폭 증가된 형태로 군권도 가지게되었다. 유언은 야심을 갖고 목의 설치를 주장한터라 익주에 도착하자 중앙정부와의 도로를 폐쇄하고 거의 왕처럼 행세하게되었다.
중앙정부에선 하진이 환관들에게 죽고 환관들은 하진의 수하들에 의해 거의 몰살하게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동탁이 중앙조정을 접수하게되는데 이때부터 한나라는 사실상 망한것과 다름없었다.
세력이 강했던 군벌들은 조정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사사로이 자신들의 수하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그들의 라인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선임명 후보고의 형식이었는데 평시였다면 이는 분명한 역적의 행위였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하나의 지역에 몇 군벌들의 수하가 배치되자 그들끼리의 분쟁도 일어났다. 조조의 경우 원소에 의해 하나의 세력으로 발돋움했고 손견은 원소의 반대 라인인 원술과 협력하여 활약하였으며 유비는 공손찬에 의해 군벌로서 시작하게되었는데 공손찬은 원술 라인이었다. 군벌들은 수많은 다툼을 하면서 성장하고 멸망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하고있었으나 전란, 천재지변으로 식량을 확보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당시는 한랭 기후였던 시대였던지라 민생은 더더욱 파탄상태였다. 군벌들은 땅을 뺏고 뺏기는 형국이었는데 그런 이유들로 농사로 식량을 확보하기보다 약탈과 자연에서 나오는 것들로 식량을 충당했다. 천재지변과 전란으로 정상적인 식량 확보와 보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나온 조조 집단의 둔전제는 조조 집단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는 결과를 낳게된다. 중원의 거대세력이었던 원소 집단이 오디 등으로 식량을 삼고 원술 집단이 어패류로 식량을 삼았던 것을 보면 중소 세력집단들은 그보다 더 상황이 열악했음은 자명하다. 당시 세력을 유지하기위해선 군대와 더불어 식량과 사족의 지지가 필수조건이었는데 다른 군벌들은 장기적 안목의 현실적인 대처가 없던 상황이었는데 조조는 조지, 한호, 임준 등의 건의로 둔전제를 시행하였기에 다른 군벌들을 압도하게된 것이 아닌가한다. 원소의 세력이 강대하였다하나 조조의 병력이 원소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은 어쩌면 조조는 병력의 정예화를 시행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먹고 살것도 부족하던 때에 더구나 병력도 많은데 병사들의 갑주나 무기를 부족함이 없이 잘 갖췄다고는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렵다. 여몽전과 하제전을 보면 사재로 군수용품을 화려하게 맞추고 병사들의 갑주와 무기 등을 구비했던 것을 보면 다른 여타 군웅이나 장군들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않았을 것이다. 좀더 가정해서 맹장으로 이름을 날린 관우나 장료 등도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하여 전투력이 상승한 것일 수도. 군대는 이동하는 도시와 같았다. 반장전을 보면 군시를 설치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렇다면 소속되어있는 상인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과 공조하에 군비를 갖췄을 것이다. 물론 상인은 군대와의 협력속에서 절대적 이익을 가져갔을 것이다. 삼국의 군주는 다른 여타 군벌보다 시작이나 여건이 좋지못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건설하게된 것은 명분, 사족과 백성들의 지지, 식량의 확보와 보급, 군대의 정예화를 통해 이루었음이 분명해보인다.
전쟁과 전투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군벌시대에선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전투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지만 삼국 정립의 이후부터는 면의 개념이 되었기에 성을 쉽게 공략하기 어려웠고(주변 도시에서 지원과 구원이 있기때문) 약탈로서 보급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약탈과 초토화를 시킨 도시는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어렵다. 따라서 원정가는 군대는 보급이 필수였는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위연전에 정병 5천에 양식을 짊어질 병사 5천명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걸 전체로 확대하여 단정하긴 어려우나 정병과 험준한 길이나 도로의 사례로 충분히 생각할 순 있다.
조씨 집단은 협천자와 둔전제로 명분과 식량을 확보하게된 것이 대군벌이었던 원소를 제압하고 건국할 수 있었다고 본다. 조조는 군대를 족벌경영하였는데 이는 조씨와 하후씨같은 친족들이 최고 지휘관을 맡는 구조였다. 그리고 부하 장군들은 신병을 양성하고 훈련시킨다음 임지를 자주 이동하게함으로써 병력을 사병화하는 것을 막았다.
유비 집단은 유협 집단으로 강한 무력을 갖추고 상인과의 연계로 자금을 형성하여 시작한 특수용병집단이었으나 명분이 부실하고 사족들에 지지를 받지못하여 수차례 붕괴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조조 집단이 대세력화하여 한황실을 제압하자 반反조조의 명분을 구성하고 조조 집단에 융화되지못한 사족들을 규합하고 정계에 진출하려하는 형주 신진사족의 지지를 받아 비로소 세력을 구축한 것.
손씨 집단은 손견이 집단을 구성하였으나 손견의 죽음으로 와해되었다가 손책이 무력을 사용하여 급진적으로 강동 지역을 토벌. 그러나 강동 호족의 지지를 받지못하여 손책 또한 암살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동생 손권이 후계자가 된다. 갑자기 수장이 된 이유로 기반이 불안하였으나 손책의 직속과 외래 명사의 추대로 비로소 혼란을 잡고 외래 집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강동 호족과의 융화 끝에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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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제 시행으로 군량 확보가 가능해지면서 군량 확보할 노력과 자원을 다른 데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가 정예화였으며,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원소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정도로 읽히네요. 흥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식량도 필수 전쟁 자원이던 시기이니 그 해결이 더욱 중요했겠죠(지금도 식량은 주요 자원이지만).
다만,
'겨울, 항복해 온 병졸 30여 만과 남녀 백여만 명 중에서 정예(精銳)한 자를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무제기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항병 30만+@가 있었는데 그 모든 병력을 유지하지않았던데다(현실적으로도 유지하기 어려웠을테고) 원소군에 비하면 소수 병력으로 대응했으니 소수정예화를 추구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조조의 기록엔 유독 '정병'이라는 기록도 많구요.
상세하게 기록이 남아있다기보다(무려 1800여년전의 역사이니 어쩔수없는 측면과 그럼에도 상당한 기록이라고 볼 수있겠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물에 저 본인의 추론과 추측으로 쓴 글이니 무조건 제 말이 맞다라고 주장하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관심을 주시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