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선가 질식하고 있을 또 다른 공주를 응원하며
막다른 골목이다.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가 됐는데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부모는 그런 자식을 품어주지도, 진심 어린 위로도 해주지 않는다. 범행 순간마저 전국민이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마지막, 그나마 의지했던 친구에게 손을 뻗었지만 거절 당한다. 남은 건 모든 걸 버리고 강물 안에 몸을 던지는 일이다. 그렇게 죽기 위해 투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공주가 물 위로 올라온다. 그렇게 삶이 자신을 괴롭혀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생을 선택하는 힘찬 수영을 한다. "한공주! 한공주!" 외치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응원과 함께.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먹먹한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실화인 이 집단 성폭행 자체의 폭력성도 높았지만 사건 이후 사회와 주위 사람들이 한공주에게 주는 또 다른 폭력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밀양 사건뿐 아니라 많은 범죄 피해자가 2차, 3차 피해를 겪는다. 영화 '한공주'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한공주'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다. 맨 마지막 공주의 이름을 외치는 여고생들의 응원 소리는 명확하게 그들을 향해 내미는 손길이다. 물 속에 웅크려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고. 또한 사회에 외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 아는 여자 (2004년 작 / 감독 : 장진 / 출연 : 정재영, 이나영, 류승룡)
- 아는 여자에서 알아가는 여자로
: 엔딩에 와서야 상대방 호구조사를 한다. 자신에게 사랑을 준 여자에게 마침내 사랑을 느낀 남자는 제대로 된 연애 관계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 전까지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생이 곧 끝나가는 마당에 자포자기하며 살던 남자의 모습은 도도함 그 자체였다. 허나 삶도 사랑도 다시 시작하려는 이 순간 남자는 몹시 서툴고 어색해보인다.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던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인정받은 순간 둘 사이 권력의 추를 가져오며 관계 우위에 선다. 그렇게 여자는 지금까지 스스로 상대에게 만든 신비주의를 깨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남자의 관심을 받으며 혼자만의 사랑을 탈피하고 주고 받는 사랑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남자에게 살짝 욱하는 여자의 모습은 이들이 보다 솔직한 관계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장진이 건설한 이 마법 같으면서 현실적인 연출은 그의 재치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자 마지막 발화였다.
- 지구를 지켜라 (2003년 작 / 감독 : 장준환 / 출연 : 신하균, 백윤식 / 음악 : 이동준)
- '그래,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영화 미쓰 홍당무의 대사다. 두 영화 주인공 모두 정상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지구를 지켜라' 주인공 병구는 사람을 고문했다. 모든 기이한 주장과 흉폭한 행위는 영화를 보는 내내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백윤식이 사람이든 외계인이든 중요하지 않다. 만약 병구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무조건 법적으로 중형감이다. 그의 주장은 옳았고 지구도 구할 뻔했지만 끝까지 병구의 성격에 동감하긴 어려웠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마지막 엔딩 크레딧 3분의 영상으로 병구의 모든 심정적 이해가 가능케 됐다. 그가 겪은 커다란 불행들과 작은 행복들을 짧은 다큐처럼 편집하여 병구가 이상한 짓을 했던 이유와 정상이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크레딧과 함께 작은 화면으로 이 영상을 처리한 것도 마지막을 자칫 신파로 떠내려감을 막는 효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엔딩 곡 '에필로그'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병구가 우는 것처럼 들리는 첼로 선율과 그걸 지탱하는 현악 오케스트라 편곡은 이 영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오래도록 남게 만든다.
- 꽃피는 봄이 오면 (2004년 작 / 감독 : 류장하 / 출연 : 최민식, 윤여정, 장신영)
- 봄처럼 따뜻한 아름다움
: 만약 내게 미적인 기준만으로 한국 영화 최고의 엔딩을 꼽으라고 한다면 '꽃피는 봄이 오면'을 선정할 것이다. 영화 내내 방황하며 지내던 최민식이 자신의 낡은 아파트 앞 벤치에서 돌아온 애인과 통화를 하는 이 장면은 스샷처럼 예쁘면서 따뜻하게 그려졌다. 그리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서민 아파트, 벤치, 오고 가는 사람들, 벚꽃나무 한 그루와 미소를 짓는 최민식이 전부다. 소소한 소품들이 모여 이뤄진 그림 같은 엔딩이 마치 '인간의 행복에 거대하고 대단한 것이 필요할까' 라는 물음을 건내는듯 하다. 비록 영화 전체의 완성도는 빼어나지 못할지라도 엔딩만큼은 영화 '제 3의 사나이'의 엔딩과 견주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년 작 / 감독 : 허진호 / 출연 : 한석규, 심은하)
- 각자의 진심을 품은채 각자의 길을 떠나는 두 사람
: 남자는 마지막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사별의 슬픔보다는 좀 더 평범한 이별의 아픔을 전달하고 싶은 나름의 배려였을까. 어떤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괴로운 부분인지, 그 진실을 공유하지 않은 남자는 '추억이 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하며 고마운 얼굴로 생을 마감한다. 애닳고 궁금하고 보고 싶은 감정의 극을 경험한 여자는 계절이 지난 후 빈 사진관 앞에 섰다. 자신의 사진이 걸려있는 모습에 미소 지으며 이전까지 한석규를 향한 원망과 울분을 추억으로 바꾸었음이 느껴진다. 이 남녀는 보편적 관점에서의 연애를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의미의 소중한 사랑을 얻고 각각 생과 사의 길로 떠난다. 한석규의 목소리로 부른 엔딩 곡 '8월의 크리스마스'가 흐르며 꿈 같은 사랑의 매조지를 따스히 장식한다.
- 워킹걸 (2015년 작 / 감독 : 정범식 / 출연 : 조여정, 클라라, 김태우)
- 편견에 대항하는 마지막 한 방
: 여러 외부 장벽 때문에 낮은 평가를 받음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아예 평가의 대상에조차 들어가지 않는 작품이다. 주연 배우의 나쁜 이미지와 그걸 또 다시 갉아먹은 불미스러운 사건, 감독의 성희롱 발언, 영화엔 없던 여성 노출 마케팅, 음란하다고 평가받는 각본 등등 남녀 관객 모두에게 쳐다도 안 볼 영화가 되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3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였기에 관람 의지조차 없었다.
허나 '워킹걸'은 여성의 관점에서의 섹스 토크를 계몽이 아닌 자유로움과 코메디로써 우리 사회의 성 담론 편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특히 엔딩에서 보여준 재치있는 연출은 성 담론 뿐만 아니라 일하는 여성의 딜레마를 얘기하는 영화의 주제를 제대로 부각시키며 그저 그런 3류 영화가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웃음과 메시지를 동시에 주는 영화는 만들기 어렵다. 워킹걸이 그렇다고 뛰어난 명작은 분명 아니지만 엔딩만큼은 분명 큰 웃음과 감탄을 자아낼 멋진 한 방이었다. 편견의 무게로 영원히 파묻히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 달콤한 인생 (2005년 작 / 감독 : 김지운 / 출연 : 이병헌, 모욕감, 황정민)
- 창작자와 수용자, 그 사이에서의 쉐도우 복싱
: 김지운 감독은 분명히 말했다. 이병헌은 에릭의 총에 맞아 죽었고 엔딩씬의 모습은 죽기 전 가장 화려했던 모습을 회상하는 거라고. 하지만 어떤 예술이든 만든 사람의 의도보다는 관객이 직접 작품을 통해 느낀 감정이 조금 더 앞선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김지운의 말처럼 '현실'이라고 하기엔 연출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일관성도 떨어진다. 마지막 내래이션처럼 이병헌이 꾸는 꿈의 일부분이라는 주장이 좀 더 마음에 든다. 욕망과 고생을 함께 하는 꿈을 꾼 이병헌은 현실로 돌아온 후 자신의 헛된 희망을 쉐도우 복싱을 통해 날려버린다는 설정이 구조적으로 맞게 느껴진다. 물론 제 3의 해석도 많이 존재한다. 감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즐겁게 스토리를 토론하게 만든 역할을 영화가 톡톡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마무리였다. 언제쯤 다시 김지운은 이런 작품을 또 만들 수 있을까.
- Best 3. 추격자 (2008년 작 / 감독 : 나홍진 / 출연 : 김윤석, 하정우, 김유정, 서영희)
- 그들의 미래에 빛은 있을까
: 가끔 그런 작품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염려되는 영화. '추격자'는 하정우의 잔혹함이나 슈퍼 아줌마의 어리석음보다 엔딩에서 김윤석과 김유정의 뒷모습이 관람 후 긴 잔상으로 남았다. 불과 하루 전까진 존재조차 몰랐고 짐짝에 불과했던 아이였지만 이제부터 유일한 보호자가 된 김윤석. 범인이 잡히긴 했지만 엄마가 사망한 것도 모른채 고단하게 잠이 든 김유정. 불 꺼진 병실 속 있는 그들에게 드리운 어둠이 마치 그들의 미래처럼 막막하고 먹먹하게 느껴진다. 창문 밖 도시의 불빛만으론 도무지 그 미래가 밝게 걷혀질 것 같지 않다. '중범죄'라는 칼날은 한 번 휘둘러진 것만으로도 다수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깊숙이, 그리고 오래 입힐 수 있다는 현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엔딩이다.
- Best 2. 낮술 (2008년 작 / 감독 : 노영석 / 출연 : 송삼동)
- 여자를 향한 남자의 유쾌한 찌질함
: 우연히 혼자 강원도 여행을 하게 된 한 남자가 있다. 그 며칠 간 다양한 군상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찝적거리다 잘 안되니 무섭게 변하는 여자, 반대로 자신이 찝적거렸는데 잘 안된 여자, 자신을 흔쾌히 도와주다 알고 보니 게이였던 남자 등등. 핵심은 술과 여자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다. 소심한 이 주인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술은 거절하지 못해서 안 좋은 상황에 계속 처했다. 반면 이성을 향한 욕망은 전부 실현하지 못한다. 그 과정 속에 몸과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끊고 터미널에 앉아있다.
그때 지금까지 여행에서 만나보지 못한 뛰어난 미모와 친절을 가진 여자가 나타났다.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후 짧은 대화 속에서 둘 다 혼자 여행하는 상황을 알고 여자는 기뻐하며 묻는다. "저도 혼자 여행하는데. 같은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세요? 전 강릉가는데." 그리고 고민하는 주인공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여자에게 대답을 하는 찰나에 영화는 마무리 된다. 나는 어떤 얘기를 했을까. 그냥 서울로 돌아간다?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찬스라고 판단하고 강릉이라 대답한다? 남자의 욕망을 유쾌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기 좋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 Best 1. 우아한 세계 (2007년 작 / 감독 : 한재림 / 출연 : 송강호, 오달수 / 음악 : 칸노 요코)
- 한국 영화사 가장 폼 안나는 밥상 엎기
: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소위 '밥상 엎기'란 캐릭터의 폭력성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인다. 그와 달리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내동댕이친 라면 그릇은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갖는 권위 만큼이나 초라해보인다. 기러기 아빠의 애환이 그득히 담겨있는 분노의 한 방이었지만 엎어진 라면을 홀로 치우는 그의 뒷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해학으로 다가온다. 특별한 촬영 기술 없이 울먹이는 얼굴과 뒤태만으로 이 영화는 훌륭한 피날레를 보여준다. '파이란'에서의 최민식의 울음과는 전혀 다른 감정색을 표현한 송강호의 연기는 영화를 가득 채우기 충분했다. 배경으로 깔리는 칸노 요코의 장난스러우면서 각 잡힌 엔딩 OST도 멋진 피날레에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아버지'라고 하는, 흔히 무겁게 다뤄지는 소재임에도 '우아한 세계'는 주제 의식을 잃지 않고 관객이 부드럽게 목 넘김하며 관람하게끔 연출하는데 성공한다.
- Best 10 이외의 Best 10 (무순)
만추
소원
똥파리
마더
장화, 홍련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알포인트
애니멀 타운
파이란
헬로우 고스트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내가 좋아한 올해의 여자 아이돌 노래 Best 1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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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동이 끝나고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결말이지만 텅 비어버린 집과 분노로 엎어버린 라면을 주섬주섬 챙기는 초라한 몰골, 이에 대비되는 티비 속에서 행복한 가족의 모습, 서서히 깔리는 경쾌한 칸노 요코 음악. 이 모든 것의 어우러짐은 이 시대의 아버지라면 꼭 봐야할 엔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