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년 정월 30일 교주 탈환전이 진행되던 와중에 손호는 자신의 어머니 하희와 그의 비첩들과 많은 사람을 동원해 화리까지 나가려고 합니다. 이떄 동관의 현령으로 있던 화핵이 이를 저지하죠. 항상 말하지만 전제국가에서의 군주의 거동은 많은 자금과 인력동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국력이 깎여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표전은 손호의 화리 행차를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단양 출신의 조현이라는 인사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조현은 손량의 재위시기인 256년 12월 그 전달에 일어난 손헌과 왕돈의 반란을 촉에 알리기 위해 파견된 사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관중랑장으로 있던 조현은 촉으로 간 뒤, 사마휘와 유이가 함께 운명과 역수, 그러니까 사람의 힘을 넘어서는 운수를 논한 책을 얻게 됩니다. 조현은 이 글을 자의를 섞어 늘려버리고 구절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속이죠.
"누런 깃발과 자줏빛 덮개가 동남쪽에서 보이니, 끝내 천하를 가질 이는 형양의 임금이로다."
그리고 이맘때 항복한 사람이 수춘 아래에서 동요가 있으며 오의 천자가 곧 올라오리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손호는 기뻐하면서 이는 하늘의 명이라면서 모친과 처자식에 후궁 수천까지 거느리고 우저로 가서 육로를 통해 진을 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위풍당당한 손호의 객기는 엄청난 한파가 몰아쳐 길이 파이고 무너지는 와중에 이 한파에 군의 수레를 끌던 말과 소들이 한파로 죽어버렸는지 중무장한 병사들 백명이 수레 하나를 끄는데 동원되고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탈진한 병사들이 한파로 그대로 동사하는 통에 병사들의 불만이 극한으로 치달아버립니다. 이런 상황에 분노한 병사들 사이에서는 적과 만난다면 바로 난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말이 퍼졌고, 이를 들은 손호는 바로 되돌아가버립니다. 교주탈환 이후 손호는 교지군을 나누어 신창군을 만들고 교지에서 남은 진군을 이끌고 있던 부엄마저 격파하고 무평군을 새로 설치하면서 교주 탈환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 손호는 무창좌부독으로 있던 범신을 태위로 올리는데 이는 손호가 강직한 범신을 꺼려해 태위로 올렸죠. 하지만 범신은 태위에 올랐지만 얼마 안가 노쇠함을 들어 태위직을 사퇴합니다. 이때 범신의 병사들은 그가 사퇴할때 그를 그리워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우대사마로 있던 정봉과 268년 2월에 사공으로 임명되었던 맹인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 맹인이 바로 맹종읍죽의 고사로 효자의 대명사가 된 맹종입니다.
그리고 271년 말 정원인 서원에 봉황이 모여들었다는 보고가들어오자 다음해에 연호를 봉황으로 교체합니다. 하지만 봉황이 모여들었다는 봉황 원년인 272년 손호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272년 8월 손호는 서릉을 지키고 있던 보즐의 아들 보천을 수도로 불러들여 요장독으로 임명하려 합니다. 보즐의 아들인 보천은 형인 보협이 죽은 후에 그 직을 이어받아 서릉을 지켰습니다. 이때 강릉을 지켰던 사람은 주연-주적(시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인 258년 서릉을 육윤이 관할했었고 다음해인 259년 진군장군으로 승진한 육항이 서릉독으로서 관우뢰에 이르는 장강 방어거점까지 담당하게 되죠. 거기에 270년 시적이 사망하자 시적이 맡고있던 강릉 뿐만 아니라 신릉, 서릉, 이도, 낙향, 공안에 이르는 장강 연안 형주지역의 군무를 관할하자 보천이 다시 서릉으로 되돌아오죠. 270년에 육항이 승진하면서 강릉으로 가기 직전까지 육항은 서릉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나헌을 공격할 당시에도 서릉독으로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보천의 직위가 붕 떠버린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기록상으로는 265년에 보천은 손호에게 수도를 건업에서 무창으로 옮기길 권한 것으로 보아 그는 건업에 있었거나 혹은 무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서릉독 보천이 지위를 옮겨 요장독으로 임명되려 하자 난데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보협의 아들인 조카 보기와 자신의 아들 보선을 낙양으로 보내 투항해버리죠. 투항자를 중용해 손호정권에 반감을 극대화시키고 내부분열을 꾀한 서진 정권은 보천을 도독서릉제군사 위장군 의동삼사로 삼고 부절을 주어서 시중과 교주목을 겸임하고 의도공으로 봉함과 동시에 보기를 감강릉제군사 좌장군 산기상시 여릉태수 강릉후를 보선은 급사중 선위장군 도향후로 임명합니다. 동시에 강릉에 있던 거기장군 양호와 형주자사 양조에게 급령을 내려 보천을 구원토록 명하죠.
그런데 여기서 오나라에서 승상까지 지냈고 명문가로 발돋움 했던 보즐가문의 수장인 보천이 왜 요장독으로 임명되어 소환되었다는데에 서릉독이라는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보즐전에는 이에대해서 보천이 대대로 서릉에 살았는데 갑자기 임지가 바뀌자 요장독이라는 직위를 포기할 생각하면서도 만일 요장독의 지위를 포기할 경우 자신이 모함을 받을 것이라 여겨 항복한 것이라고 적어놓습니다. 최훈은 여기에 서릉이라는 자신의 기반을 빼앗기고 신변불안을 느낀 보천이 반란을 일으키고 서진에 투항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와는 생각이 다릅니다. 보씨 가문이 과연 대대로 형주의 명문가인가 싶나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보즐은 원래 임회군 회음현 사람이었고 이곳은 합비와 가까운 지역일 뿐더러 보즐은 서주와 수춘 일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을 가서 오이 농사를 지었고 거기에 회계의 호족인 초교의 땅에서 농사를 지을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초정강(초교가 정강현령을 지낸적이 있었기 때문에 초정강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은 보즐과 친구인 위정이 손으로서 방문을 했음에도 작은 소반에 밥과 야채로 된 찬을 주는 등 그를 멸시하기까지 할 정도였죠. 그리고 보즐은 손권이 정권을 잡은 후에 서기로 관직을 시작합니다. 보즐이 출세하기 시작한 것은 211년 창오태수 오거를 잡아죽인 이후부터였고, 일반적인 문관이 아닌 형남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계만이 반란 진압등을 통해 지휘관으로서 출세했으며, 그가 서릉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226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서릉독으로 가서 육손이 무창을 지킬때 서릉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서릉에 자리잡은것은 오래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었으면 육항으로 서릉독이 교체된 뒤에야 반란을 일으키지 육항이 승진하면서 강릉으로 간 뒤에나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 역시 이해가 가지 않죠. 거기에 손호의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불안해 반란을 일으켰다면 손호에게 무창 천도를 권했고 무창으로 천도할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어났던 불만을 감안해보면 이것도 이해가 가질 않죠.
추측해보자면 보천의 반란에 보씨 가문 전체가 단 한사람도 반대하지 않고 가담한 것을 보면 단순히 서릉독에서 요장독으로 직위를 옮기는 일이 아닌 손호가 정치적으로 보씨 가문을 기반이 없는 건업 일대로 옮겨놓고 숙청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어쨌든 반란은 일어났습니다.
서릉의 중요성은 강릉 못지 않았습니다. 서릉의 경우 진이 방릉,영안 지역과 양양,번성을 연결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서쪽 방벽이었습니다. 따라서 서릉이 넘어갈 경우 강릉 역시 위험했습니다. 거기다 서릉이 넘어갈 경우 형남 공략 역시 강릉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행할수 있었기 때문에 서릉 상실은 바로 형주 전역의 상실을 의미했고, 형주 전역의 상실은 오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육항은 보천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행동에 옮깁니다. 좌혁, 오언, 채공등을 먼저 서릉으로 보내 포위망을 형성하게 하고 자신은 강릉의 방어를 확충시기 위해 강릉독인 장함에게 거대한 제방을 만들어 물을 채워 인위적으로 큰 물길을 만들어 강릉의 지형을 변화시켜 방어를 강화시킨 이후 서릉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전군을 휘몰아 서릉성을 금방 함락시키는 것이 아닌 서릉성 인근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그리고 그 포위망을 후방에서 방어할 방벽을 건설할 것을 명령하죠. 아무리 난공불락의 서릉성이라도 백면서생인 보천이 이곳을 지키는 곳이었고 서릉과 가까운 양양과 방릉 등지에서 진의 원군이 달려올 것을 우려한 부하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육항이 이러한 이중방벽을 만들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중방벽 건설을 독려하자 병사들은 고된 중노동에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본 부하들은 육항에게 공격명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정예인데 보천을 신속하게 공격하면 진의 구원군이 이르기 전에 서릉을 함락시킬수 있는데 어찌하여 포위망만 구축하여 병사들의 힘을 빼려하십니까?"
"서릉의 지세는 견고하고 군량은 넉넉하며 방어 계획과 수성무기는 내가 서릉독으로 있을때 계획했던 것이다. 지금 공격하면 바로 공략하지 못하고 진의 구원병이 뒤에서 공격해올 것이다. 이러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할것인데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계속된 부장들이 공세를 주장하자 공성파 중 가장 강경한 공성파였던 의도태수 뇌담에게 서릉성을 공격할 것을 허락하죠. 하지만 육항의 예상대로 아무리 백면서생에 단순 행정가일수 있는 보천은 강력한 서릉성으 방어력과 육항이 만들어놓은 방어계획과 수성기를 이용해 뇌담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이 일이 벌어지자 부하들은 육항이 명령한 이중방벽 건설에 어떠한 토도 달지 못하고 따르며 이중방벽을 완성시킵니다.
이소식을 들은 양호는 서릉으로 가는게 아닌 강릉으로 진격합니다. 양호가 아예 지키기로 굳힌 이상 서릉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보고 강릉을 공격해 양호를 서릉에서 끌어내서 보천-양조-양호가 협공해 섬멸하자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양호전에는 양호의 병력이 총 8만 명이고 강릉 공격에 5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육항군은 3만이 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충분히 포위섬멸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강릉이 가진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육항이 포위를 풀고 나와 맞서리라 생각했겠죠. 하지만 육항 역시 생각해 둔 것이 있었습니다.
원래 강릉의 지세는 평탄하고 교통이 좋았습니다만, 보천을 진압하기 전에 육항이 강릉독 장함에게 명령해 제방을 만들어 참호에 물을 채워 이동을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안 양호 역시 이를 역이용해 이 참호를 통해 만들어진 수로로 식량을 운반함과 동시에 제방을 파괴해 보병들을 이동시킬 것이라고 소문을 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육항은 장함에게 바로 제방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부장들은 이는 양호가 원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말리죠. 하지만 육항은 제방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제방이 파괴되면서 제방에 갇혀있던 물은 당연히 강릉 외곽의 평야를 침수시켰을 테고, 이는 이동을 방해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양호는 당양에 도착하자마자 제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고 어쩔수 없이 수레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게 했지만 당연히 물을 먹어 진탕거리는 도로는 이동을 방해했고 당연히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됩니다. 이 사이 익주의 진군이 속속 양호를 지원하러 달려옵니다. 진의 파동감군인 서윤은 수군을 통해 건평에, 형주자사 양조는 서릉으로 와 육항의 이중방벽을 포위합니다. 육항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함에게 강릉을 지키도록하고 공안독으로 있던 손준에게 장강을 따라서 양호가 함부로 강릉 남쪽으로 이동치 못하도록 했으며 수군독 유려와 진서장군으로 있던 주완에게는 서윤을 막게 합니다.
하지만 가장 혈전이 벌어진 곳은 육항이 있던 서릉의 이중포위방벽이었습니다. 양호가 강릉을 공격하고는 있었지만 강릉은 관우가 방어력을 끔찍할 정도로 강화한 이후에 조진,하후상의 정예군이 그렇게 공격했고, 강릉성 내의 상황이 최악인 상황에서도 절대 함락당하지 않았으며 이후의 주연, 제갈근 등의 명장들이 방어력을 더더욱 강화시킨 철옹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육항 역시 이것을 믿고 있었고 설령 육항이 강릉을 함락하더라도 오래 버틸수는 없을 거라 여겼습니다. 강릉성의 방어력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이 강하나 형남의 병력이 강릉성을 탈환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죠. 거기에 제방을 만들어놓은데다가 제방을 터뜨려 강릉 일대를 침수시킨 와중이었기 때문에 진군의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양호의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육항의 상황도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호가 이중포위방벽을 통해 양조와 보천의 공세를 철벽처럼 막고는 있었지만 고립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험난한 방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거기에 식량까지 떨어진 모양이었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방어전을 견디다 못한 장군 주교와 영도독 유찬이 방벽을 넘어 양조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특히 영도독 유찬은 방벽의 허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찬이 양조에게 방벽의 약점을 알려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방벽의 약점은 바로 육항이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급하게 이민족들을 투입한 곳이었는데 이민족들의 군기가 느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항은 바로 이민족들을 바로 다른곳으로 이동시키고 이민족들이 지키던 곳에 노장 정예병들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양조는 육항이 간파한 것 처럼 이민족들이 지키던 곳을 공격해옵니다만 큰 피해를 입었고 역으로 육항이 이를 반격해 양조에게 더 큰 출혈을 강요했죠. 그렇게 1개월 동안 혈전을 벌였지만 양조도 보천도 육항의 방어진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강릉을 노린 양호 역시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서윤 역시 오의 수군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자 결국 양양과 번성으로 퇴각을 시작합니다. 이를 본 양호는 적을 추격할 것처럼 위세를 부리자 퇴각하던 양조군은 혼란해지고 그 사이 육항은 경보병들을 보내 이들을 기습했죠. 이제 남은것은 서릉성. 육항은 그제서야 서릉성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견디지 못한 보천은 항복합니다. 육항은 서릉에 들어가자 처벌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항의 처벌에 관련해 두가지 다른 이견이 존재합니다. 육항전에서는 보천의 가족과 수하의 대장, 관리들을 죽이고 다른이들은 사면해 사면받은 사람이 수만이나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육손전에 있는 육손의 손자들인 육경, 육기, 육운은 이후 종군하다가 전사한 육경을 제외하고는 서진의 조정에 투신했고 그와중에 팔왕의 난에서 환관 맹구라는 자에게 미움을 받아 죄도 없이 모두 사형을 받아 죽었죠. 그런데 이것을 들어 육항이 보천을 죽일때 아이까지 죽여 사람들은 육항의 후세들은 재앙을 당할것이다라고 말했죠. 어쨌든 육항은 보천을 처벌하고 서릉의 성벽과 방어거점을 복구한 뒤 다시 임지로 돌아갑니다. 이때 큰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뽐내거나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겸허한 태도를 취해 병사들과 장수들의 존경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패배한 서진의 후속조치를 보면 상당히 어이없어집니다. 서릉의 패전으로 인해 관리들이 양호와 양조를 공격했는데 양호의 병력이 많음에도 군을 늦게 움직여 오군이 방비할 시간을 주었고 거기에 험한길을 일부러 택했다면서 모든 관직에서 파면하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사마염은 양조만 파면하고 양호의 관직을 평남장군으로 깎는 것으로 그칩니다. 양호의 패인은 육항의 방어일변도에 양호가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호나 양조를 걸고 넘어질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조는 파면당했고 양호는 직위가 강등당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는 사마염이 양호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양호의 성격이 강직하고 바른말을 잘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양호는 종회가 사마소의 측근일 적에도 종회에게 모함을 당한적이 있었고 당시 조정에서 세가 컸던 가충과 그 일파인 순욱, 풍담, 왕연, 왕융은 양호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가충, 순욱, 풍담, 왕연, 왕융은 양호가 예견한 대로 서진을 말아먹는 1등 공신이 됩니다. 특히 왕연은 나중에는 아주 비굴하게 굴죠.
보천이 토벌당한 이후 오나라 조정은 또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위기를 넘기자 손호의 폭압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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