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임신하셨어요?” 그때 전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요? 미용사는 제 얼굴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고, 전 제 앞에 있는 거울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아니오, 그렇게 말했어야 했을까요. 전 미용사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어요. 그럴만 하네.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미용사가 실수라도 하면 당장 컴플레인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얄궂게도 미용사는 솜씨가 퍽 좋았어요. 계산하고 나오는데 또 눈이 마주쳤어요. 또 오세요. 하지만 거기에 다시 갈 일을 없을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전 살면서 한 번도 뚱뚱한 적이 없었어요. 한 달 일찍 태어나서 혹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까봐 속을 태웠던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도요. 대학교 때는 이른바 마른 비만 상태였던 것 같지만. 그때는 체지방이고 근육량이고 뭐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 마른 줄 알았지요. 본격적으로 살이 찐 건 첫 직장에서였을 거예요.
삼년 동안 거길 다니면서 가장 많이 참석했던 회사 행사는 직원 송별회였어요. 나중엔 송별회를 하도 많이 해서 회식이 없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송별회에 갈 때마다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또 먹었어요. 버티고 또 버티다, 어느새 제 송별회를 할 때쯤 되었을 때는 살이 이십 킬로그램이 쪄 있었죠.
난 혼자 방구석에서 뭘 먹곤 했어요. 마치 죄라도 짓는 듯이. 노란색 비닐 봉투에 과자를 사 와서는 방 안에서 숨죽여 먹었어요. 그러던 날 보던 엄마가 제게 그러더군요. 제발 몸 좀 어떻게 해 봐. 너 살 쪘어. 난 살 찌지 않았다고 계속 우겼죠. 이건 부은 거다, 이건 살 찐 게 아니다. 그렇게 박박 우기던 내게 미용사가 말했어요.
“혹시 임신하셨어요?”
전 사실, 어디서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내가 조직에서 할 일이 없으면, 내가 어딘가 쓰일 곳이 없으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때의 제게는 뚱뚱한 사람이 어딘가 쓸모없는 사람의 전형처럼 느껴졌어요. 방 안에서 노란색 비닐 봉투나 뒤적이며 먹을 것이나 쑤셔 넣는 뚱뚱한 나 같은.
회사에서 실패한 걸 인정할 수 없는 것만큼, 그런 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 길로 나서서 피티를 등록했어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찾았죠. 식단 일지를 써라. 운동 일지를 꼼꼼하게 적어라. 체성분이 중요하다. 물을 많이 마셔라 같은 모든 이야기들을 읽고 또 읽었죠. 찾아다니지 않은 운동 블로그가 없을 정도로요.
확신컨대, 전 그때 맛이 간 상태였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때 제가 독하다거나 성실하다거나 하고 말을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전 그때 만회하고 싶었던 거예요. 노조와 회사가 다툴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명씩 회사에서 쫓겨날 때조차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고 도망만 치던 나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하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나를, 굉장하다고 여길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죠.
전 필사적으로 운동일지와 식단일지를 적었어요. 식단일지에는 물 한 컵, 호두 한 알, 김치 한 쪽까지 적었죠. 어이구, 그건 또 왜 그렇게 하나하나 셌는지. 운동일지는 더했어요. 세트 수, 무게, 운동 부위와 새로 배운 운동을 악착같이 하나하나 적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날 그날 운동 소감도 간단하게 적어놨어요. 뭐가 안 되고 다음엔 어떤 부위에 집중해야 하는지. 중량은 어느 정도 늘고 있고 난 뭐를 못하는지. 이 운동의 효과는 뭔지. 맨 밑에는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었죠. 운동량, 마신 물의 양, 잠자는 시간은 적당하고 일정했는지, 음식물을 비슷한 시간에 먹었는지, 식이는 적당했는지. 하나하나 동그라미 세모 엑스를 치고, 전부 동그라미인 날에는 자축의 의미로 스티커까지 붙였어요. 그걸 육 개월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해 왔던 것 같아요. 필사적으로 매달린 결과 살은 빠졌어요. 육 개월이 지났을 때 전 비만에서 저지방 근육형이 되어 있었어요. 30인치조차 꽉 끼었는데, 육 개월 뒤에는 24인치를 넉넉하게 입을 수 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무척 기뻤어요. 한참 잘난 척을 하고 다녔죠. 그런데, 문득 허무해지더군요.
전 방구석에서 노란 비닐봉지나 뒤적거리는 제가 한심했어요. 살이 쪘다고 주변에서 한 소리씩 하는 것도 지겨웠고요. 그러니까 내 모든 실패는 내가 살이 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지런히 하루하루 살아가면 무언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의 대접은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난 똑같았어요. 살이 쪘든, 살이 빠졌든 간에 말이에요. 문득 전 울고 싶어졌어요. 저는요, 그런 걸 생각했거든요. 만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여주인공이 살만 빼면 모든 것들이 달라지잖아요. 근사한 남자친구, 화려한 직장생활, 마법처럼 모든 것이 해결되고 행복해지는 그런 게 아니더라도, 여자 주인공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는데.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데, 운동시간이 되었어요. 종을 치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운동복을 입었지요. 멍 때리며 걷다 보니 계단을 오르고 있었어요. 계단을 여느 때처럼 올라가는 데 숨이 안 차요.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참 높더라고요. 이걸 이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올라올 수 있구나. 뛰어 봤어요. 또 숨이 안 차요. 예전에 힘껏 달리던 때보다 훨씬 더 빨리 뛰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사실 회사에서 제일 힘들었던 건요.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걸 보는 게 아니었어요. 갓 임신한 부인을 둔 친절한 선배가 대기발령을 받고, 책상도 컴퓨터도 모두 뺏긴 채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었고요. 정말 힘든 건 무력감이었어요. 내가 무얼 어떻게 하더라도 단협 테이블 너머의 저 사람들은 전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그런 느낌말이에요.
그래도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긴 있구나. 이상하게도 그게 참 위안이 되었어요.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릴 때면, 뭐에 홀린 듯이 한참 운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전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방 의기소침해지고 별 거 아닌 일에도 금세 우울해지는 찌질이지만, 운동을 한 다음부터는 구명조끼가 하나 정도 생긴 거죠.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때처럼 맛이 간 상태는 아니라, 복근이고 뭐고 다 떠나보낸 상태지만요.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여전히 찌질하게 잘 살고 있어요. 아, 부작용도 하나 있네요. “넌 왜 사람 하나 잡아 죽일 거 같은 눈빛으로 운동을 하냐?” 예쁘고 아름답게 운동하는 건 물 건너갔지만, 뭐. 나만 좋으면 됐죠,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