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인생에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제겐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앞으로 여생 동안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아갈 친구가 둘 있으며, 저는 그들을 모두 인터넷에서 만났습니다. 어릴 때는 주위 사람들의 '니네 어떻게 친해지게 됐어?' 라는 질문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쩌다 만나서 친해짐'이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는데, 나이가 좀 들고 나니까 사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이제는 "야 누구는 인터넷하다 만나서 결혼도 한다더라!" 라고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존재만으로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한 사람을 인터넷에서 만났기 때문에, 저는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에 그래서 큰 거리낌이 없었어요. 온라인 게임 길드 정모도 자주 나가고, 사이트 번개 모임이나 카페 정모 같은 것도 자주 참석하고, 거기서 알게 된 인맥들도 다른 학교, 직장,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겐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처음에 PGR 연말 솔로 모임을 연다는 것을 봤을때, 저는 그 소식이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마침 신입생 CC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도 1년이 지났고, 슬슬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PGR 21의 솔로 모임이라니, 마치 나를 위해 열어주는 이벤트 같았거든요. 물론 PGR이 여초 사이트라는것은 거짓말이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모임은 남탕이 되어 실제로 여기서 만남이 성사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최소한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이고 진지한 사람 좋은 (여자친구는 없지만) 동성 친구들을 만들 기회이니, 이 역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본격적으로 참석자를 모집하는 공지가 올라왔고, 아니나 다를까 제 우려대로 운영진들도 남탕이 될 것을 우려했는지, 공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어요.
[참석하실 분들은 댓글로 아이디와 실명, 나이를 적어주세요. 나이야 조금은 속이셔도 애교로 허용하지만, 미성년자가 성인인척하거나 혹은 성인이 미성년자인척하는 것은 엄밀히 금합니다. (PGR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별은 안 쓰셔도 됩니다. 쓰지 마세요. 성별 ]딱 보기에도 부족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유저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성의가 담긴 공지에 예의상 짧은 웃음을 지어준 뒤, 얼른 스크롤을 내려
[24세, 박주신, La Traviata. 참석합니다~~] 라는 댓글을 달고, 찬찬히 참석 댓글이 얼마나 달렸고, 누가 달았는지를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이 사람은 여자 같은데?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 댓글에서 스킨로션 냄새가 물씬 풍기더라고요.
'싱글인 누나 언니 계신 참석자분들 환영합니다. 혹시 동년배 회원분이 있다면 환영합니다. 누나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40대 형님도 계셨고, 대 댓글이 십수 개가 달려있는 무려 10대 중반 미성년 참가자도 둘이나 있었지만 대부분 2~30대였으며, 뜻밖에 생각보다는 참석 댓글이 많았습니다. 와 이 사람 어그로 종자인 거 같았는데 무려 정모를 나오네? 싶은 사람도 있었고, 평소에 좋은 글을 쓰셔서 분명히 남자 친구/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참석자도 있었으며, 분명히 제 기억엔 와이프와 아이 이야기를 썼던 것 같은 참석자도 있었어요. (?)
그러나 그 수많은 댓글 중에서, 제 이목을 가장 잡아끄는 댓글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이 평범한 다음의 댓글이었습니다.
[28세, 조현우, 엔터샌드맨]---------------------------------------------------------------------------------------------------
1.
저는 PGR이 좋아요. 이곳에서 만나는 대부분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법이죠. 여기서도 몇몇 사람과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부끄럽게도 한번 벌점을 먹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지상사이며, 누군가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단 한 명,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바로 저 '엔터샌드맨' 이라는 사람이에요.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03/29 12:24
별로 억울 하실 거 없어 보이는데, 본인 의견 자체도 이기적인 생각 아닌가요?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05/01 08:24
글 자체는 굉장히 잘 봤는데 사실 공감은 안 되네요. 다만 어떤 환경에서 살아오셨는지가 궁금하긴 하네요.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06/09 19:24
이 영화 개잼없던데... : (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07/11 12:24
매번 쓰시는 글이 패턴이 비슷한 거 같아요. 괜찮게 쓰시긴 하는데 좀 지루해요. 내용도 비슷하구…. 강박관념도 느껴지는 거 같고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0/14 12:24
에이 착한척 할라고 거짓말 하시는거 아닌가요? 평소 하는 얘기 보면 안 그럴거 같은데...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쓰는 글마다 배배 꼬인 댓글을 달고, 다른 글 댓글에도 제 댓글이 본인 맘에 안 들면 무조건 저런 댓글을 달더라고요. 특별히 어그로로 몰리거나 벌점을 받지 않는 걸 보면 모든 사람한테 다 저러고 다니는 거 같지는 않던데, 제가 관찰하니까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 저치한테 찍힌 사람이 있더라고요. 보통 글에는 멀쩡하게 댓글 달면서, 본인이 싫어하는 특정 일부 사람의 글에만 줄타기하며 까칠하게 댓글을 다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최상급 어그로였던거에요.
매번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다크나이트에서 하비 덴트가 그랬던 것처럼, 커튼에서 에르큘 푸아로가 그랬던 것처럼 정의를 위해 수라의 길을 걷기로 한 저는, 마침 저 사람이 최근에 쓴, 아무런 영양가 없는 존존스와 메이웨더를 비교하는 글에 여태까지 받았던 것을 갚아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La Traviata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2/07 07:53
아침이라 피곤하고 귀찮고 이종격투기 싫어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글이네요. ^.^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2/07 9:01
무슨 의도로 이 댓글 다셨는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시면 신고하겠습니다. 복싱팬이신거 같은데 이종룰로 붙으면 체급
차이보다는 그라운드 적응도로 승부가 결정나는게 정설인데, 발끈해서 반론하실거면 근거라도 대세요. ^.^는 뭐야 대체.
La Traviata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2/07 10:11
위에 읽지 않았다고 쓴거 안 보이시나요. 내용을 얘기하셔도 안 읽어서...... 근데 메이웨더가 존존스가 평생 번 돈 권투 한 번 하면 벌 수 있는데 왜 이종 룰로 붙어야 되죠? 이런 글은 꼭 돈 못 버는 이종격투기팬들이 쓰던데... 엥? 이거 완전열폭 아니냐? ^.^는 고양이가 우연히 지나가다 자판을 눌렀습니다.
엔터샌드맨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2/07 11:23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사람 진짜 저열하네요. 댓글 더 안 달겠습니다. 사람이 불쌍해서 신고는 안하겠는데 커뮤니티 활동 그렇게 하지마세요.
La Traviata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신고 15/12/08 15:12
삭제(벌점 4점), 지나친 비아냥 댓글입니다.
[엔터샌드맨의 말은 엔터샌드맨의 말로 반박가능...]
벌점 4점은 받았지만, 강등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내가 얻은 통쾌함을 생각해보면 이는 공평한 거래였다고 생각했어요. 요새 유행하는 말로 사이다였습니다. 당신도 당하니까 열 받죠? 부들부들하죠? 그러게 왜 남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그래요. 앞으론 그러지 마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상처는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긴 건 이긴거니까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글 자체도 첫 댓글부터 어깃장을 놓으니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고요. 그 사건 이후로 제 글에는 더는 엔터샌드맨의 댓글이 달리지 않았어요. 다른 글에는 평범하게 댓글을 달았지만, 더는 남에게 아슬아슬하게 시비를 걸듯 말 듯한 댓글은 남기지 않더라고요.
사실 엔터샌드맨의 참석 댓글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와 나보다 4살이나 많네. 그 나이 먹고 진짜 그러고 싶나 하는 거였고,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그래 여자친구 없을 거 같더라, 데스메탈에, 이종격투기에, (머리에 침 뱉기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까지…. 완전 여자가 싫어하는 취미 3종 세트니까. 취미가 그러면 얼굴이 잘생기든가 성격이 좋든가 해야 되는데, 성격은 별로인 게 확실해 보이고, 뭐 이런 생각이었어요.
조금 지나니까 막상 만나서 시비 붙으면 어떡하지, 사람 많으니까 가까이서 얼굴 안 마주치고 끝날 수 있으려나? 26살이나 먹고 인터넷에서 시비 붙은 걸로 뭐라고 하진 않겠지? 하고 걱정이 되더라고요. 저 사람 때문에 안 나가긴 싫고, 나가려니 찝찝하고... 그렇게 고민을 좀 하다가, 어차피 껄끄러운 사람 있는거 나 혼자 아닐테고, 분명히 어그로같았던 사람도 나오는 정모인데다가 운영진도 대책이 있을텐데 괜찮겠지, 하고 일단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극단적 상황으로 흐르면 복싱 검은띠에 유도 다이아, 태권도 전설등급에 키 73kg, 몸무게 183 스펙이 어디 헛것이 아니니 몸싸움으로 제압하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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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슨 모임 회비를 무려 3만 원이나 걷을 때부터 사실 좀 신기하긴 했지만, 설마 호텔 파티룸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PGR 운영진중에 홍콩니스나
진워렌버핏, 도끼 같은 거부들이 있어서 사비를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임 장소는 훌륭했습니다. 장소가 너무나 훌륭하고 으리으리한 나머지 대부분의 PGR 회원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더라고요.
개중에도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커뮤니티를 해치는 악성 바이러스인 일부 친목 종자들은 만나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고, 몇 안 되는 미성년자 주위에 모여 챙겨주는 사람들과 PGR러의 본분인 똥의 생산을 위해 그저 열심히 먹는데 치중하고 있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무슨 남의 결혼식 온 것처럼 정장을 쫙 빼입고 온 멋쟁이도 있었고, 동네 담뱃가게 가다가 잠깐 들른 것처럼 보이는 우리 형 타입의 사람도 보였습니다. 가지각색이었어요. 정말로.
나이는 어린편이었지만, 인터넷 정모 짬은 베테랑급인 저는 대충 비슷한 나이의 비슷한 부류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낯익은 아이디를 가진 사람의 의외의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나는 잘 모르던 사람들이 뜻밖에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내가 그래도 PGR에서 나름 활동을 티 나게 열심히 했구나, 하고 뿌듯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을 보내자 운영진과 일부 진행자로 보이는 분들에 의해 성별과 성적 지향에 따라 사람이 나뉘어 섰는데, 남자가 정말 훨씬 더 많긴 했지만 뜻밖에 7.5:2.5 정도로 절망적인 성비는 아니었습니다. 이만하면 여초 사이트 라벨 붙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닉네임과 성별이 적혀있는 회사 사원증 비슷 하게 생긴 신분증을 나눠주고 목에 걸도록 했는데, 운영진의 노고에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굉장히 고생했던 기억이 나네요.
모임은 딱 봐도 자기들도 애인 없을 것 같은 운영진의 엉성하고 나사 빠진 진행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회원들의 참여 태도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얼굴에 철판을 깐 것 같은 적극 구애형 인간들 덕에 나름 재밌게 진행되었습니다. 선비 사이트답게 최대한 소외 되는 사람 없도록 배려하는 사람이 많아서 아빠 웃음을 짓기도 했고요. 이쁜 사람 잘생긴 사람이 아주 많지도 않았지만, 적지도 않은 것을 보며 역시 외모 비율 보존의 법칙은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분위기에 취해 너무 마실것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갑작스레 밀려오는 요의에 잠깐 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그새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엔 다른 잘생긴 사람이 와서 수다를 떨고 있더라고요, 테이블 모두가 떠난 저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그 새로운 잘생긴 사람의 말에 정신없이 집중해있는 모습을 보며 저는 이곳은 내가 돌아갈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사람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비슷한 처지인지는 몰라도 같이 돌아다니던 한 여성분과 어깨가 부딪혔습니다. 그녀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키가 아담한 편에 약간 직장인의 사복 차림이라는 느낌이 드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좀 있어 보였고 막 눈이 부실만큼 훌륭한 외모는 절대 아니었지만 여친룩이라고 하는, 뭔가 남자친구가 있을법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아뇨, 제가 자리를 뺏겨서 경황이 없어서 시야가 좀 좁았었나 봐요. 미안해요~"
서로 형식적인 사과를 주고받고 나서 이번에는 조심해서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가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잠깐만요!"
"저요? 무슨일이세요?"
"저한테 무슨 할 얘기 없어요?"
"무슨 얘기요? 없는거 같은데"
"저한테 사과하실 일 있지 않아요?"
"부딪힌거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혹시 다치셨어요? 안 그래 보이는데"
"아뇨, 그거 말구요, 그거 말구 사과할 일 있을거 같은데"
뭔가 재밌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선문답을 하는 그녀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PGR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인가? 같이 롤 하다가 내가 트롤해서 졌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ID 카드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배 부분에 있는 카드에 시선을 가져갔습니다. 블라우스가 벌어진 사이로 보이는 하늘색 티셔츠위에 살짝 떠 있는 ID 카드. 그곳에 마침내 제 시선이 도착하자마자, 어디서 예쁘지만 나쁜 손이 나타나 카드를 가지고 갑니다.
"와, 왜 숨겨요 카드? 자기는 내꺼 읽고 얘기하는거 같은데?"
"에이, 재미없게 닉네임 보려고 하지 말고 맞춰봐요. 최근에 PGR에서 사과할 일 만든 거 생각나는 거 없어요?"
"저 착한 사람이라 그런 적 없는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카드 보여줘 봐요."
"무슨 착한 사람이 막 댓글 험하게 달다가 벌점 받고 그래요? 거짓말 되게 잘하시네"
벌점을 받았다는 얘기에 뭔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벌점? PGR에서 두 번밖에 안 받았는데? 한번은 가입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기억도 잘 안 나던 시기에 우회 욕설로 받은 거였고 한번은 최근에...
사고가 거기까지 도달하자 표정에 제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녀는 무슨 기괴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쿡쿡대며 손으로 붙잡고 있던 카드를 놓았습니다. 운영진이 탄력 있는 끈을 썼는지 카드는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린 사람처럼 몇 번을 위 아래로 출렁이다가, 이내 앞뒤로 몇 번 뒤집히고는 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닉네임이 쓰여 있었습니다.
"다시 물어볼게요, 저한테 무슨 할말 없어요?"
사람이 급하고 당황환 정도에 따라 정말 날것 그대로의 본심이 무심코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때가 아마 제가 스무 살이 넘어서 가장 제 본심이 가공 없이 그대로 튀어나왔던 상황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제 입에 나온 이야기는 제가 생각해도 참 대단했어요.
"님 왜 여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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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차피 자리가 없다고 이미 다 밝힌 마당에 둘이 따로 이야기하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부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그녀와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직 경찰서에 가본적은 없지만, 아마 경찰에게 심문받으러 가는 용의자의 기분이 이럴것 같았습니다. 아까는 여친룩으로 표현했던 그녀의 복장은 이제는 '저승사자가 아끼는 좀 밝은 톤의 수의'로 보였고, 그렇게 맛있었던 호텔측이 준비한 음식은 마치 음식점 진열용 음식 모형을 씹는것처럼 플라스틱 맛이 났습니다.
저는 제가 달았던 댓글에 대해 사과했지만, 사실 그녀가 사과를 듣고 싶어하는것이 아니라, 이유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왜 그런 댓글을 달았는지, 정말 그렇게 복싱이 좋은지, 복싱 하는 사람은 원래 다 그렇게 복싱 얘기만 나오면 폭력적인지, 그라운드 기술도 없는 복싱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가 사실 복싱과 이종격투기와는 상관 없이 그냥 그 댓글을 달았다고 하자 그녀는 납득하기 어려워 했습니다. 왜 본인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본인은 간간히 남기는 제 일상적인 글을 재밌게 보고 있었으며, 매번 꼬박꼬박 리플도 달았고, 오히려 본인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게 아닌지 되물었습니다. 본인이 단 댓글이 남에게 기분 나쁜일이 될 수 있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저는 그녀의 그런 태도를 납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실 그녀의 말투는 실제로 온라인과 판박이였어요 여전히 제 이야기에 어깃장을 놓고, 꼬투리를 잡고, 의심하며,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온라인으로 보이지 않던 것, 주위에 모든것에 마냥 재밌고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것을 전혀 숨기고 있지 않는, 경박해보일만큼 순수한 미소가 보였거든요.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의 한계에 대해 몰랐던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로 그것을 정면으로 느끼는것은 저로서도 정말로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던가요. 그렇게 서로에 대해 썩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우리였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일도 아니었을뿐더러, 피차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와 저는 금방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나 솔로가 많은 PGR의 현 시국에 대해 논하고, 평소 맘에 안 드는 운영진의 디스를 하고, 오늘 봤던 PGR러중 특이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애인이 없어 이런곳에까지 나온 서로의 처지에 대해 한탄하고, (저는 약간 이해 할것 같았지만) 서로 왜 애인이 없는지에 대해 이해 못하겠다는 식으로 감싸주기도 했습니다. 왜 본인을 남자라고 생각했냐고 하는 그녀의 말에 예전에 분명히 야동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냐고 되물어 벙어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날 그 뒤에 정확히 뭘 했는지는 사실 오래전 이야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분명한것 한가지는 저는 그 식사 시간 이후엔 PGR 싱글 모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더이상 보지 못했다는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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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생에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제겐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앞으로 여생 동안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아갈 친구가 셋 있으며, 저는 그들을 모두 인터넷에서 만났습니다. 어릴 때는 주위 사람들의 '니네 어떻게 친해지게 됐어?' 라는 질문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쩌다 만나서 친해짐'이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는데, 나이가 좀 들고 나니까 사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이제는 "야 누구는 인터넷하다 만나서 결혼도 한다더라!" 라고 더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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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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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외롭네요.' 라는 글을 써주신 유란님과
그 글에 외로움이 사무치는 댓글을 달아주신 PGR 유저분들께 바칩니다. 크크크 PGR 솔로들 화이팅!
사무장님 죄송합니다. 오후엔 일 열심히 할게요...
* 순도 100% 픽션입니다. 크크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