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라는 시대는, 그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구도 하나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가장 강렬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했던 몽골이라는 거인이 무너지는 여파로 뒤흔들리는 난세였고,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과 사상계에 분 돌풍, 외부적 자극과 내부에서 발아하는 요소들이 모두 뒤섞이던 폭풍 같은 시대였습니다.
공민왕 중기부터 태종의 즉위까지 50년 안팎의 사이에 수많은 용과 호랑이들이 있어,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사극 등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성계. 최영. 정도전. 정몽주. 공민왕. 우왕. 이인임. 이방원…… 전부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자 하나같이 주역들입니다.
바로 500년 왕조 조선의 설계자 영의정, 조준입니다.
그리고 그게 조준의 영역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여말 선초의 '개혁' 에서 정도전을 먼저 떠올리지만, 토지 개혁에서 정치 개혁, 임용의 개혁, 법의 시행의 개혁, 고리대에 대한 개혁, 법률 모순의 개혁, 호구 질서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실무의 거의 전 방향에서 이를 전개한 주도적인 인물이 조준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떠한 의견이 나와도, 그것이 실무에 적용되는 과정은 조준의 손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물론 조준 본인부터가 도장만 찍는 인물이 아닌 문제 제기 - 대안 마련 - 최종 적용까지 손 대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에게 쉽게 와닿을만한 비유를 들자면 정도전이 좀 더 장량에 가깝고, 조준은 좀 더 소하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조준의 이런 세세한 책임자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당대의 인식은, 좀 우습게도 조준에 대한 비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훗날 명나라 원정 계획을 가지고 이견이 발생했을때, 명나라 공격은 어림없다는 조준의 의견과 명나라 공격을 원하는 정도전의 의견이 갈렸고, 이때 정도전의 편에 섰던 남은의 비난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
남은은 조준이 계산이나 잘하는 사람이지, 어찌 이런 간이 좁쌀만한 양반이 큰 계책을 알겠냐며 조준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그만큼 당대 중신들에게 있어서도 조준은 계책을 꾸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책 실무자로 보였다는 걸 의미합니다. 정도전에 대한 졸기의 평가가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는, 계책을 만들어내는 책사로서의 면모가 더 부각되는 점을 생각하면 서로간의 개성이 보이는 부분이죠.
*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본래 안면이 없던 조준을, 윤소종의 다리를 거쳐 만나는 건, 사실 아주 디테일한 묘사압니다.
2. 그런데 사실 굴러들어온 돌
아마 이 부분이 조준의 가장 개성적인 부분일텐데, '신진사대부' 로 묶이는 고려 말의 주요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파벌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학파 성리학 1세대인 백리정의 문하에서 이제현이 배출되었고, 이제현의 문하에서 이색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색은 성균관 명륜당에서 여러 제자들이 키워냈고, 이 성균관에서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박의중, 이숭인, 윤소종 등이 깊은 교분을 맺었습니다.
공민왕이 새로이 성균관을 세우고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이숭인, 박의중 등 저명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학관을 겸하게 하고 이색을 대사성을 삼았다. 매일 명륜당에 앉아서 경서를 분담하여 수업을 하고 강의가 끝나면 서로 더불어 토론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동방에 성리학에 크게 일어났다. ─ 고려사 이색 열전
그런데 조준은 이 카테고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이례적인 인물입니다. 한살 더 많은 윤소종의 밑에서 잠깐 공부하며 교분을 나누었던 적이 있는듯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성균관 출신들이 자주 가지던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벼슬길에 나아간 뒤에도 독자적인 세력에 속해있거나 과거를 나서서 주관하거나, 이색이나 정몽주처럼 여러 문신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되려 무반직을 역임하기도 했고, 여하간 윤소종 정도를 빼면 문신들 사이에선 여타 성리학자들과 아주 크게 교우관계를 엮으며 영향력을 보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조준의 성리학은 어떠한 스승이나 동료들과의 토론을 거쳐 완성된 것이 아닌, 거의 독학으로 배운 골방 성리학입니다. 이때문에 조준은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3. 이성계가 초빙해서 모신 스승
문신들 사이에서 별다른 영향력이나 교우 관계가 없던 조준. 여기에 왜구 토벌을 나섰을때, 당시 고려 지휘관들의 무능과 부패에 진저리가 난 조준이 "나에게 패전한 장수 처벌권을 주면 큰 일을 한번 해보겠다." 고 한 것 때문에 무인세력에게도 조준은 껄끄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당시 조정의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강직한 조준의 성격은 이인임 세력 쪽에서도 '딱히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그냥 주는 거 없이 미운 놈' 으로 찍히며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이렇게 누구 하나 자기 의견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말만 안들어주면 다행인데 뒤에서 수근거리는 상황이 되자,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거나 정치적으로 아주 큰 외통수에 몰리거나 한 것이 아님에도 조준은 "이런데서 썩어봐야 나만 손해지." 라는 마인드로 아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그 기간이 무려 4년!
이 4년 동안 조준은 바깥 출입을 자제 한 체 집에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만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후 조준이 내놓은 문제 제기나 개혁안을 보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분명 아닌데, 이는 4년 동안 조준이 치열하게 현실의 문제 해결 방안을 공부했음을 의미합니다. 중간에 최영이 조준을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글쎄요. 이미 조정에서 최영을 겪어본 조준의 생각으로는 '최영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다' 고 여겼을까요? 그는 최영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문불출하며 정치계의 전면과 인연을 거의 끊어버린 조준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산대첩 등을 통해 새로운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실력자, 이성계 입니다.
이성계와 조준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힘을 합쳤느냐는 실록과 고려사의 기록 등에서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나, 아무리 빨라도 이성계가 이인임 등까지 쳐내며 최영에 이은 넘버 2의 시점에서나 만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아니면, 위화도 회군 직후이구요. 어느쪽이건 간에 그 당시의 이성계는 말할것도 없는 조정의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그렇게 '굉장히 높으신 분' 이었던 이성계는, 그러나 인재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성계의 귀에 조준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4년간 집에만 틀어박히며 공부만을 하고 있는 괴상한 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성계는 조준을 직접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 면담에서, 이성계는 대단한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조준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기량과, 그가 준비하고 있는 플랜에 흡족해진 이성계는 당대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면서도, 일개 낙향 선비인 조준에게 상당한 공경심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사를 같이 논하여 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준을) 마치 오랜 면식이 있는 친구 대하듯 하였다 與論事大悅 待之如舊識
라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한편, 나름대로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은 많은데 써주는 사람은 없었던 조준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실력자인 이성계가 이토록 자신을 대우해주자 크게 감격합니다. 이성계는 크고 작은 일이든 매사 모든 일을 일단 조준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는데, 조준 역시 이렇게 자신을 신뢰해주는 이성계를 돕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고 수집해 놓은 모든 지식과 자료를 총망라하여 아는 것 모르는 것 가리지 않고 대답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 이후, 조준은 이성계의 천거로 인해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발탁됩니다. 조준이 중심에 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개혁 드라이브가 시작됩니다.
4.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이 바로 조준이다.
이 당시 조준의 입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재밌는 부분은, 반 이성계 세력에서 생각하는 '이성계 일파 중에 최악의 악질' 이 바로 조준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조준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 부터 사이가 좋지가 않았는데, 공양왕이 즉위한 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성계파의 선봉장이자 총괄 브레인이며 보수파가 반대하는 제도개혁의 핵심으로 활동하던 조준은 공양왕에게 있어서 가장 큰 눈엣가시였고,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양왕은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서 조준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당시 불안정한 고려(조선) - 명의 외교 관계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행보로 받아들여졌음을 생각하면 이는 공양왕이 조준을 죽이며 음모를 꾸몄다고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조준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자, 낙담한 공양왕은 "이제 내가 또 조준의 얼굴을 봐야 하는구나." 하면서 대놓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명에 다녀온 조준을 판성사에 임명했는데, 이 또한 조준을 덜 보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공양왕 뿐만 아니라 기존 보수파 + 모든 고려 보국 세력에 있어서도 조준은 머리인 이성계를 제외하면 그 일파 중에서 가장 먼저 해치워야 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여러가지로 뒷공작을 통해 구린 소문이 나게 해서 조준을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성계가 낙마한 절호의 기회를 틈타 정몽주가 최후의 반격을 시도할때 역시,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補佐役)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라며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사람으로 정몽주가 직접 조준을 꼽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당대인들의 인식에서, 조준이 이성계파의 거목으로 여겨졌다는 반증이 될 겁니다.
5. 정도전과의 관계는?
여말선초 공신들 중에서는 정도전의 위상이 정말로 압도적이고, 정도전 - 조준 - 남은 등이 한 세트로 같이 묶어져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흡사 조준이 정도전의 쫄따구인 듯한 식의 묘사나 언급도 간혹 있는 편이지만, 실제 이 둘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수평적 관계에 가까웠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도전이 엄청난 위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준을 무시하고 큰 일을 진행하는 건 불가능 했다고 표현하는 것에 가까울 겁니다.
……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당임원 가운데서도 극히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도당의 임원이라기보다는 '공신' 으로서 이 시대 국정운영의 중추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이고 도당의 임원이었지만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중신으로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중용된 사람들이었다.
(생략)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도당의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직함을 가진 재신, 공신으로서 정사를 다루고 재결받았다. 이처럼 태조는 소수의 재신을 중용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이들 재신들의 정치, 군사 권력이 과대해져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상태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도 있으며, 또한 당시에 그러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 (생략)
변중량은 당시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의 부당함을 말했다. (생략) 어쨌든 몇몇 재신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했다고 본 것은 태조가 소수의 재신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변중량의 말은 소수 재신 중심 정치에 대한 종친이나 다수의 개국공신들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태조는 노하여
"이 몇 사람은 나와 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만약 의심을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는 자인가."
고 하고 변중량 등을 추국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모두 태조의 고굉지신으로서 계속 한마음을 가진 자들이므로 이들을 믿고 정사를 위임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승희, '조선초기정치사연구' 中
태조 시절의 정치 권력은 꽤 재미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재상들이 담당한 영역을 보면 태조 시절은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재상들의 파워가 강력하던 시기'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두세력' 도 아닌, 일개 '한 두 명' 에게 정권과 병권을 움직일 수 있는 막대한 힘이 주어진 시기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재상들이 왕인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 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재상들의 힘은 강했지만, 그렇다고 왕권이 약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을 단순한 신하가 아니라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지들' 로 보았고, 그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주면서 지원했습니다. 심지어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이러다가 위험할 수 있다." 는 다른 신하들의 지적이 나와도, "그들을 못 믿는다고? 내가 제일 신임하는 저들을 못 믿는다면 과연 누구를 믿겠는가?" 라며 지적한 신하를 오히려 꾸짖으며 처벌하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정도전과 조준이 설사 파워게임을 벌인다고 하면, 그건 결국 '누가 더 이성계에게 총애 받는가' 인데…… 두 사람에 대한 이성계의 총애는 어느 한 쪽이 뒤지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를 제쳐두는 건 무리입니다.
실제로는, 위화도 회군 직후 갑작스레 이성계 일파에서 부각된 조준에게 정도전 쪽에서 필요성을 느끼고 먼저 접근했습니다. 조준은 앞서 말했듯 윤소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윤소종은 이숭인과 사이가 안 좋아 조준을 충동질해 이숭인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숭인과 정도전은 본래 친구였는데, 정도전은 조준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친구였던 이숭인을 일부러 욕하고 다니기에 이릅니다.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이성계 파의 일원으로서 자기 행보를 강하게 나가려면, 그만큼 조준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던 거겠죠.
이렇게 보면 정도전과 조준은 본래 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고, '동지' 라고는 해도 피를 나눈 결사의 형제 이런 느낌보다는, 서로 이성계 파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활동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가깝게 지낸, 비즈니스 프렌들리 관계로 보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NBA 시카고 불스에서 수 많은 우승을 이끌어낸 마이클 조던 - 스카티 피펜의 관계라고 할까요.
그래도 조준이 "본래 정도전, 남은과 나는 본래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다." 라고 말하기도 해서, 뜻이 맞는 동안은 서로 사이가 절친하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뜻이 맞지 않을 때죠. 같은 뜻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서로 뭉친 관계였는데, 뜻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정도전과 조준의 틈이 벌어진 것은 요동 원정 문제입니다. 정도전과 남은이 까짓 그 요동 한번 쳐서 주원장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무렵, 조준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휴가를 간 상태였습니다. 설사 정도전 정도의 실력자라고 해도 조준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이런 큰 일을 결정할 수 없었기에, 정도전은 휴가를 얻어 집에서 쉬고 있는 조준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 시도 합니다.
이 담판에서 정도전은 "이미 일은 결정되었다. 공은 괜히 다른 말 하지 마라." 면서 거의 통보에 가까운 선언을 합니다. 조준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인것 같다." 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일단 전하가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상태가 좋아지시면 그때 가서 결정하자." 며 확답을 피합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를 '동의는 구했다' 로 여겼는지, 그게 아니라면 혹은 '통보는 했다' 라는 태도였는지, 조준의 부정적인 의사와는 달리 곧바로 남은 등을 데리고 이성계를 만나 요동 원정을 논의합니다. 집에서 쉬던 조준은 그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 아픈 몸을 이끌고 바로 달려와서 반대 의견을 내었고, 국왕의 앞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재상 3명이 요동 원정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양상이 전개 됩니다. 조준은 이런 논리를 들어 반대 의견을 펼칩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는데, 이제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켜서 되겠는가? 이해관계? 그래, 그 이해관계로 한번 따져보자.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명나라의 위세가 어마어마해서 찌를 틈이 하나 없는데, 대체 무슨 얼어죽을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남은이 조준에게 한 비난인 "숫자나 잘 셀 양반이 큰 뜻을 어찌 알고..."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조준은 훗날 이 일을 회고하며 "그 일로 두 사람과 나 사이에 시기하고 용납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건 길 가는 사람도 다 아는 이야기." 라고 말했습니다. 임금 앞에서 재상들이 격렬한 언사로 논쟁한 이 일이, 당시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날 정도로 상당한 이슈였나 봅니다. 하긴 유명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요.
6. 동지를 팔아먹고 이방원에 붙어 권세를 누린 배신자?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그토록 신임하던 정도전 - 남은은 척살되었고, 이 3인방 가운데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은 조준입니다. 그리고 조준은 태종 시기에도 정승으로 재직하며 일단 겉보기로는 권력을 지켜나갑니다.
때문에 '동지를 팔아먹은 자' 라는 식으로 비난받기도 하나, 앞서 말했듯 정도전과 조준의 관계는 필요로 뭉친 사이에 가깝고, 이 무렵에는 그 공통의 목적이 분열된 상태였습니다(애시당초 그렇지 않았다면 왕자의 난 당시 살아남지도 못했겠지요).
정도전, 남은 VS 이방원의 대립에서 조준은 당초 제3자에 가까운 포지션이었습니다. 요동 원정 논의에 세자 책봉 논의에서도 정도전, 남은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은 상태지만, 당장 세자 자리가 엄한 사람에게 날아가게 생겼고, 더군다나 이성계의 측근 재상 정치 때문에 힘이 눌린 이방원 쪽의 종친 + 무인 세력과는 달리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권세를 누리는 조준이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쿠데타에 가담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 왕자의 난 당시 조준은 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이방원은 사람을 보내 조준을 자기에게 합류시키려고 하지만 조준은 "점을 쳐보겠다" 며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고, 애가 탄 이방원은 이숙번을 시켜 재촉하여 조준을 불러들였습니다. 결국 못 이긴 조준은 갑옷을 입은 수행원들을 잔뜩 거느리고 나서 이방원을 만납니다. 아마도 조준으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방원과 만난 자리에서 대세를 깨달은 것인지 결국 그제서야 이방원에게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난 후, 조준은 죽은 두 사람과는 달리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긴 했으나, 실제로 보자면 위세는 예전보다 많이 떨어진 편이었습니다. 일단 뒤에서 적극 밀어주고 비호해주던 이성계가 사라졌으니 예전처럼 불도저 식으로 자기 의사를 밀고 나갈 수도 없어졌고, 태종의 신임을 받는 젊은 것들을 당해낼 방법도 없었습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가 되서 '쿠데타 세력' 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는 이방원 측의 "봐라! 조준 같은 나이 많고 명성 높은 개국공신도 우리를 지지했다." 라는 정권 안전용 선전 도구로 쓰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선 무렵에 뜬금없는 이미 정치생명 끝난 옛날 정치인들이 갑자기 나와서 누구 지지선언하고 그런것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조준은)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이 떨치었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避)하려고 힘썼다. ─ 조준 졸기
7. 이성계의 남자, 왕조 최초의 모범적 재상
앞서도 말했지만, 태조 시기의 재상들과 이성계 간에는 일반적인 군왕과 신하 사이의 관계와도 다른, 어떤 동지적 의식으로 묶어진 특별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성계가 조준에게 병마권을 준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개국 공신과 왕의 관계는, 개국 과정에서 비대해지며 혹은 군사권도 가져간 신하를 왕이 눌러 그 권력을 국왕 측으로 가져오려는 다툼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즉위한 바로 그 날 밤, 이성계는 자신의 사저로 몰래 조준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조준에게 곧바로 '조선 5도의 병마권 전부를 넘겨줍니다."
태상왕이 즉위(卽位)하던 날 저녁에 준(浚)을 침실로 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한 문제가 대저(代邸)에서 들어와서 밤에 송창(宋昌)으로 위장군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하게 한 뜻을 경이 아는가?”
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畫角)·동궁(彤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한다.”
하고, 드디어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을 제수하고, 1등(一等)의 훈작(勳爵)을 봉(封)하여 ‘동덕 분의 좌명 개국 공신(同德奮義佐命開國功臣)’의 호(號)를 주고,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와 전지(田地)·노비(奴婢) 등을 하사하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김부라는 사람이 술김에 진탕 마시고 조준의 집 앞을 지나가다, 공신인 조준의 집이 큰 것을 보고 술이 덜 깨서 "집이 이렇게 크면 뭐하냐? 틀림없이 나중엔 다른 사람이 이 집을 차지하게 될걸." 이라고 떠들어대다, 그 이야기가 이성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격노해 "조준은 이 나라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할 개국 공신인데, 그런 사람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떠들어댔으니, 김부 그 놈은 우리나라가 금방 망할 거라고 하는 거 아니냐?" 라고 하면서 김부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또 정도전, 남은과 조준이 한참 틀어질 무렵, 이성계와 굉장히 친근한 사이던(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남은은 슬쩍 "조준이 요새 이상한 짓을 하던데요." 하는 식으로 조준의 뒷담화를 털어놓았지만 조준에 대한 신뢰가 극에 달한 이성계는 대충 이 말들을 들은척 만척 하면서 넘겨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예 목을 베어버렸겠지만, 그 남은 역시 이성계가 신뢰하는 사람이라 딱히 벌을 주진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성계의 총애가 대단하던 시기가 지난 뒤론 실권 잃은 종이 호랑이가 되어서 그동안 숨 죽이던 사람들에게 공격도 많이 당하며 본인 스스로 "이제 물러나겠다. 아니, 물러나게 해주라." 고 하던 조준이었지만, 정치적 역학 관계와는 상관없이 태종 역시도 조준에게는 국가 원로 공신으로서 극진한 신임과 대우를 해준 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태종이 술자리에서 여러 공신들과 술을 마실 때, 잔이 조준에게 오면 태종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조준의 행운을 빌어줄 정도였습니다. 또한 조준이 사망한 뒤론, 때때로 언급하게 될 때조차 그 무시무시한 태종 이방원도 함부로 '조준' 이라고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늘 "생전에 조 정승은..." "조 정승이 예전에 했던 것이..." 하는 식으로 깍뜻하게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를 '재상의 모범' 으로 삼아 말을 해야 할떄는, 태종은 늘 "재상이라면 조준과 같아야 한다." 같은 식으로 조준을 모범적 재상의 으뜸으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개국 초기 풍파로 정도전, 남은 등이 죽은 조선에서는 조준이 최초로 언급된 '전대의 모범적 재상' 으로 받들여졌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8. 불과 물의 파트너 관계, 조준과 김사형
조준이 좌정승일때, 우정승인 사람이 김사형이라는 인물이었고 둘은 실무에서 8년간 호흡을 맞춘 콤비였습니다. 조준으로서는 일하면서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김사형이었을 겁니다.
이 두 사람의 성향은 정반대였는데, 본래도 강직하고 과감해서 이성계의 신임을 바탕으로 얻은 권력으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 일을 추진한 것이 조준이라면, 김사형은 반대로 남에게 미움 살 짓도 안하고 비호감으로 찍힐 짓도 안하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심지어 졸기에서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라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습니다.
성향이 다룬 이 둘의 콤비는 기묘한 시너지를 발휘했는데, 기본적으로 김사형은 크고 작은 일의 결정은 전부 조준에게 맡겼습니다. 그럼 조준이 뛰어난 능력과 일사불란한 태도로 착착 진행시키면, 김사형은 옆에서 이걸 거들고 보좌하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조준이 능력은 뛰어나지만 옆에서 감히 한마디 말 하기도 힘들어서 분위기가 긴장되는 타입의 상사였다면, 김사형은 그런 긴장관계를 옆에서 때때로 풀어주는 타입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바로는 조준이 이성계에게 부탁해서 술을 얻어 김사형에게 대접하는 잔치를 열어준 적도 있어서, 내심 조준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잘 커버해주는 김사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