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몇달전 가입하고 그동안 PGR21을 눈팅만 해왔지만 이번에 처음 글을 올리게 되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독립을 주도했던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중 우리나라의 DJ와 YS에 비견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들이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입니다. 둘은 일생에 걸쳐 절친한 친구였던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둘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리이벌들이라고 불리어지죠.
애덤스와 제퍼슨 모두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들이었지만 둘의 배경과 성격은 많이 달랐는데 애덤스는 동북부의 소박한 가문에서 성장하여 자수성가한 변호사로써 작은 키에 고집이 강하며 강직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제퍼슨은 부유한 남부의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상속과 결혼으로 200여명 가량의 노예들과 1만 에이커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대지주였습니다. 그는 홀쭉하고 키가 커서 어디에서나 돋보이는 귀족적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분쟁을 꺼려했죠. 태생부터 애덤스와 제퍼슨은 여러모로 정말 물과 불같이 다른 존재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존 애덤스(좌)와 토머스 제퍼슨(우)
독립전쟁 당시 애덤스와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 필요성에 대한 뜻이 맞는 동지들로써 독립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습니다. 미주 13개 식민주들이 독립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개최한 대륙회의를 앞두고 존 애덤스는 북부 메사츄세츠주의 대표, 제퍼슨은 남부의 버지니아주 대표로써 선출됩니다. 둘은 대륙회의에서 서로를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애덤스가 제퍼슨에 비해 8년은 더 나이가 많았기에 제퍼슨이 애덤스를 자신의 멘토로 여기게 됩니다.
대륙회의에서 애덤스는 독립파의 주장을 주도했고 버지니아주의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지명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에 비해 제퍼슨은 대표들간의 논쟁에 사실상 참가한 적이 없었지만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자로써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되지요.
본래 독립선언문의 작성자로써 애덤스가 다른 대표들에 의해 추천되기도 했지만 그는 제퍼슨이 더 적합할것이라고 여겨 사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제퍼슨에게 내세운 3가지 이유들이 흥미롭습니다: "첫째, 버지니아인이 이 일은 주도해야 한다 (버지니아주 인구가 13주중 가장 많았죠). 둘째, 나는 밉상이고, 의심받으며 인기가 없다. 그대는 정반대다. 셋째, 그대의 문장력이 나보다 10배는 뛰어나다." 애덤스가 남긴 이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는 어느 역사가는 애덤스같이 과연 자존심 강한 사람이 과연 제퍼슨에게 양보하려 했겠느냐 라고 의구심을 품지만, 또 다른 역사가는 애덤스의 진정한 열정은 웅변이었기 때문에 그는 독립선언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서로 남겨질 가능성을 낮게 보아서 양보를 했을수 있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전쟁발발 후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지사, 애덤스는 대서양을 건너가 대유럽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는데 둘 다 영국군에 의해 목숨이 위험했던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애덤스는 프랑스 특사로 임명되어 대서양을 넘어가던 시 그가 탄 배가 영국군 전함들에게 추격을 당하기도 했고 제퍼슨은 자신의 농장이 있는 몬티첼로로 쳐들어온 영국군에게 사로잡힐뻔도 했습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대사로 취임한 제퍼슨은 프랑스에서 애덤스와 그의 가족을 만나 오랫만에 찾아온 평화로움을 함께 만끽하게 됩니다. 이때 애덤스와 제퍼슨간의 친분이 매우 두터워져 서로간을 사실상 가족으로 대할 정도였습니다.
1789년 취임한 조지 워싱턴의 행정부에서 애덤스는 실권이 전무했던 부통령직을 맏았고 제퍼슨은 국무장관직을 맏았습니다. 애덤스는 아내인 애비게일에게 “나의 조국은 어이없게도 나에게 인간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직책을 맡겼다.”라며 불평하기도 했죠.
워싱턴은 애덤스와 제퍼슨의 의견보다는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시하여 둘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이렇듯 워싱턴은 해밀턴이 대표하는 연방주의자들에게 기울져 있었지만 그의 초당파적인 인기와 상징성은 공화파와 연방파 간에 누적되고 있던 당파적 적대관계를 억지로 누르고 있었죠.
하지만 워싱턴의 퇴임을 앞두고 벌어진 1796년 대선에서 이 당파적 적대관계는 수면위로 들어나게 됩니다. 애덤스는 연방정부의 권력을 중시하고 친영파적이었던 연방주의자들의 대통령 후보였고 제퍼슨은 각 주들의 독립성을 중시하고 프랑스 혁명에 호응적이었던 공화주의자들의 후보였습니다.
대선의 승자는 선건인단에서 단 3표를 더 얻은 애덤스로 그가 제2대 대통령이 되고 제퍼슨이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1804년 수정헌법 12조가 비준되기 전까지만 해도 선거인단 각자가 2표를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여 과반수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그 다음 표를 얻은 사람이 부통령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죠.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견차로 이미 삐걱대고 있었던 애덤스와 제퍼슨의 관계는 당시 유럽을 휠쓸고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념차로 인해 급격히 악화되었고 수십년간의 우정도 갈라져 버리게 됩니다.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했던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미국 독립혁명의 연장으로 보아 마땅히 미국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고 애덤스는 무지한 민중의 폭력은 중우정치로 이어지고 결국엔 1인 독재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애덤스 재임시기 의회에서 공화파 의원과 연방파 의원간에 벌어졌던 난투극 풍자. 의원들간의 욕설과 침뱉기가 지팡이와 화로집게를 동원한 싸움으로 돌변했던 사건.
4년 후 벌어진 리턴 매치에서는 제퍼슨이 선거인단에서 8표 차로 승자가 되어 제3대 대통령이 됩니다. 프랑스 외무장관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댓가로 뇌물을 요구한 소위 XYZ사건의 여파로 미국 여론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덤스는 전쟁 대신 외교적 타협을 선택했고 덕분에 여당인 연방주의자들이 애덤스에게 등을 돌린것이 패착이었습니다.
1800년 대선은 양측의 선거전이 욕설과 비방으로 점철되어 미국의 더러운 (어쩌면 가장 더러운) 첫 대선이라는 평가가 붙습니다. 양당의 지지신문들이 애덤스와 제퍼슨의 섹스 스캔들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고 제퍼슨측은 애덤스를 "바보,위선자,범죄자,독재자"로 비난했고 애덤스측은 제퍼슨이 "입에 칼을 물고 있는 무신론자이며 자코뱅당원"이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대선때만 되면 선거가 비방광고들로 점철되었다며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고상한 민주주의의 변질에 대해 한탄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건국의 아버지들부터 벌써 진흙탕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죠.
1800년 대선시 서로에게 주어진 인신공격은 애덤스,제퍼슨 양쪽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애덤스는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제퍼슨의 취임식에도 참여하지 않고 취임식날 새벽 백악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후 칩거해버립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제퍼슨은 취임식 연설에서 "우리는 모두 공화당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방당원입니다"라고 국가통합의 제스쳐를 보내고 조지 워싱턴를 치켜세웠지만 전임자 애덤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죠.
한때는 매우 절친했던 둘이 서로 교류없이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지만 1812년 1월1일, 애덤스가 퇴임한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 회복의 전기가 마련됩니다. 애덤스는 편지에서 "자네와 나는 서로를 이해시킬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되네"라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제퍼슨도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망하기 전까지 14년 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총 158통의 편지들이 오고갔는데 이 중 109통은 애덤스가 발신자였고 49통은 제퍼슨이 발신자였습니다. 애덤스가 보낸 횟수가 2:1로 훨씬 많았지만 질적으로도 그의 편지들이 더 구구절절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에는 정치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치열한 논쟁과 서로에 대한 위로, 국가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는데 역사가들에 의해 오늘날 아주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중 어떤 한 편지에는 제퍼슨이 자신은 프랑스 혁명이 그토록 많은 희생을 불러올줄 몰랐다면서 애덤스에게 자신이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걸 실수로 인정하는 내용이 있고 애덤스는 이에 대해 자신이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마워하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우연의 일치로 두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의 독립기념 50주년이었던 1826년 7월 4일 동시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애덤스가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구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퍼슨은 그보다 몇 시간 앞서 저 세상으로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제퍼슨은 향년 83세였고 애덤스는 91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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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엔 YS가 애덤스고 DJ가 제퍼슨이 아닌가 싶네요. 이게 물론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비교는 아니자만 그래도 성격상으로는 저렇게 커플링(..)이 된다고 봅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면 애덤스가 제퍼슨에 비해 더 보수적인 편이었고 YS와 DJ의 상대적 이념 포지션도 비슷하죠.
US History 공부하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애덤스와 제퍼슨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본 적은 처음이라 되게 재밌네요. 앙숙으로 지내다가 서로 서신을 교환하면서 화해를 했다는 부분에선 뭔가 인간적인 감동이 느껴지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