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농담을 하면 다들 웃는다. 똑같은 말을 내가 했다면 분명 썰렁해졌을 그런 말인데.
그 친구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듣고 있으면 허점이 너무 많다.
그리고 같이 듣고 있는 일행들의 평소 면면을 보았을때 그 사람들도 충분히 반론을 펼칠 여지가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의 말에 다들 동조하고 온통 지지의 의사와 부연하는 답변으로 대화는 풍성해진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다. 저 친구와 이야기할때 녹음을 해두었다가 그걸 글로 정리해보면 어떤 느낌의 글이 나올까...
언젠가부터 '썰만화'라는걸 보게 됐다.
썰만화 이전엔 물론 '썰'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썰'을 말로 보야야 할까 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치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듯 풀어낸 글인데, 인터넷이란 매개가 없었다면 그 이야기는 말 그대로 친구들과의 대화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온라인상에서는 글이란 결과물로 나왔다.
조금 남사스럽긴 한데 이 '썰만화'라는게 주로 야한게 많은거 같다. (내가 그런 것만 찾아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_-)
썰만화 이전의 '썰'의 진원지는 다양할 텐데 예를 들어 초창기 썰만화였던 '애완견이 제 생식기를 핥아요'라는 에피소드는 네이버 지식인의 질문글이었다.
그리고 내가 우연히 찾게 된 썰 생산지중 하나가 디시인사이드의 '섹드립 갤러리'였다.
처음엔 정말 별의별 갤러리가 다 생기는구나 했는데
인간의 욕망이라는건 참... 야동이나 야애니에 질렸던걸까? 아니면 다른 매력에 끌렸던 걸까?
제일 자주 찾는 갤러리가 됐다 -_-
분명 호기심 내지는 관음증, 성욕 해소의 공간이었다. 정말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 답게 해우소의 역할을 하는 그런 공간.
그런데 그렇게 몇개월간 남들이 응응 하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상한 경험을 몇 번 했다.
오늘은 또 어떤 화끈한 썰이 있으려나 하고 게시물들을 클릭하다가
나도 모르게 따뜻한, 혹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감동받은 채 인터넷 창을 닫고 혼자 그 감상을 되씹는 그런 경험을...
신기한것은 정작 그 글을 작성한 사람 본인도 처음에 그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자신의 글이 그런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로 완성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예상이 든 것이다.
불장난 경험 음담패설 늘어놓으려고 키보드 잡았다가
자신이 잤던 사람 이야기를 하자니 그 사람 처음 만났던 이야기도 하게 되고,
아무리 남녀가 쉽게 만나 쉽게 잘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리고 사랑 없이도 섹스를 목적으로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살을 섞기 위한 최소한의 교감이라는게 있기 마련이고
사랑을 먼저 하고 섹스를 하게 되는 인연이 있는 그 반대편에는 섹스를 먼저 하고 사랑을 나중에 하게 되는 그런 인연도 있는게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인것 같았다.
어떤 독서 관련 커뮤니티에서 한 작가 지망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 지망생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정말 많은 준비를 하는것 같았다.
그래, 바로 그 다독 다작 다상량 중에 다독과 다상량을 하고 있었다.
다작은 준비를 좀 충분히 한 다음에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섹드립 갤러리에서 읽은 0.01% 비율의 아련한 사랑 글들을 떠올리며,
좋은 글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경험과 일단 글을 써갈겨 놓고 보자는 막무가내식 출발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준비되지 않은 글이 설명할 수 없는 마력으로 펜, 혹은 키보드를 잡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끄집어낼 때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이하 도끼)의 후기 대작들 중 일부는 도끼의 말을 속기사였던 그의 아내가 받아적은 후 도끼가 최종적으로 편집하여 소설에 삽입하였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조금은 의심스러운 이야기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있을법하다고 생각했다.
30대가 넘어서야 접한 도끼 소설은 전혀 예상 밖의 성격으로 적응을 힘들게 했다.
분명 세계 최고로 꼽히는 대문호의 작가라 들었는데 술취한 아저씨가 주절거리는 듯한, 기승전결나 여러 소설의 구성요소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글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책은 뭘 이야기 하려는 건지, 이러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독자는 자연히 이런걸 궁금해할 텐데 다음 장에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분명 지금 손에 잡고 있는 페이지는 쏙쏙 들어오긴 하는데 도대체 이걸 내가 왜 읽고 있는거지 하는 의문들은 도끼를 구시대의 헛된 이름으로, 고전이라는 명성으로 쓸데없이 독자들을 억누르고 있는 그런 작가들 중 하나로 취급하게 했다.
그의 데뷔작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터무니 없이 어린 여자에게 가망 없는 사랑의 편지를 쓰는 중장년 영감탱이의 글은 너무 허접해서 아 아무리 도끼라도 첫 소설은 어쩔 수 없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영감탱이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여자의 글은 이상하게 세련되어 있었고 뭐 우연인가 느낌인가 이러고 있다가 영감탱이의 글이 점점 호소력이 올라가더니 마지막 절규때는 필력 평가 따위는 내 의식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입술을 깨문 채 영감탱이의 슬픔에 동조하고 있는 자신을 한참 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소설에 대한 해설에서 도끼가 의도적으로 '필력을 조정'했다는 설명을 읽었을때 베지터가 지구에 왔을 때 전투력을 조정하는 상대방을 보고 놀란것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다.
결국 도끼의 후기 소설들도 작가의 숨겨진 의도나 심오한 사상을 읽어내려 하기보다는 실의에 빠져 만취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오래 사귀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어 온 친구 인생의 기승전결을 자연스레 파악하게 되는 그런 독법을 요구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배명훈의 소설집 '타워'의 작가 후기에서 소설가는 뭔가 '꿍...'한걸 품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뭔가 다른 사람한테 하지 못한 말들이 속에 쌓여 있는 사람이 그걸 글로 터트리면 그게 작가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평소에 성격 좋고 원만해서 속에 쌓여 있는 말이 없는 사람은 작가가 되기 힘들다고..
자기 자신만의 겸손으로는 상관없을지 모르나 동료,선배 작가들과 글에 인생을 걸고 있는 다른 모든 동료들을 성격 드러운 사람들로 몰아가는 그런 발언일수도 있는데, 어쩐지 나는 설득당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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